'매뉴얼!'
그녀는 예전에 구석에서 종이책으로 된 매뉴얼을 봤던 것을 떠올렸다. 당시에만 해도 요즘 같은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초월적 아날로그라고 생각했던 물건이 이젠 그녀에게 하나 남은 구원의 손길이 된 것이다. 잠시 두리번 거리던 유나는 좌측 구석 계기반 사이에서 손쉽게 종이책을 찾아 꺼낼 수 있었다.
- 기관부 9보조 기관사실 계기 작동 매뉴얼
책 표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콧물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숨막히는 곰팡내가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만 같은 고서의 모습에 유나는 조심스럽게 첫장을 잡아 넘겼다.
- 부욱
힘 조절 실패. 매뉴얼의 제목이 씌인 첫장이 기세 좋게 찢겨져 나간다. 유나는 커다란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것 같은 표정으로 허공에 떠도는 종이를 잡아챘다.
"아냐아냐. 이거 내 탓 아니야. 괜찮다 윤냥. 괜찮다 윤냥. 침착 침착."
유나는 손아귀에 말아쥔 종이를 주머니에 쑤셔박으며 주문이라도 외우는 것처럼 스스로를 다독였다. 침착하게 그녀가 다시 책의 둘째장을 손에 쥘 때 였다.
- 장견습. 어디냐.
정욱의 메시지가 날아든다.
- 부욱
경쾌한 파열음이 주변에 울려퍼진다. 화들짝 놀란 유나는 책에서 떨어져 나간 두 번째 책장을 손에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히잉."
그녀는 입으로 우는 소리를 내며 두 번째 장도 주머니로 우겨 넣었다. 그리고 무척 조심스럽게 세 번째 장을 펼쳤다.
- 어디냐고.
타이밍의 귀재 정욱의 두 번째 메시지가 날아든다. '이 인간 어디선가 날 감시하고 있는 건 아닌가.' 유나는 허튼 생각을 잠시 떠올렸다가 떨쳐버렸다.
다행히도 이번엔 예상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았다. 유나는 조심조심 매뉴얼을 펼쳐 들었다. 첫 페이지가 되어버린 세 번째 페이지에는 목차라고 큼지막하게 씌여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여느 책들처럼 목차 앞의 두 페이지는 내용 없이 비어있었던 모양이다. 이대로라면 그 누구도 앞의 두 장이 찢겨져 나갔을 거라고 생각 못할 것이다.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
- 어제 일 때문이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본 것이 없다.
정욱의 세번째 메시지가 날아든다. 유나는 메시지를 보고 잠시 굳어 있었다. 서러움이 밀려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본 것이 없는 사람이 그 따위로 말할 수 있나...... 눈물이 눈에 그렁그렁 맺힌다. 하지만 그녀는 목차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니 떼어선 안 되었다.
눈물을 닦아내고 목차를 쭉 훑어보니 경보에 관련된 매뉴얼은 거의 마지막 장에 있었다. 초조한 상태로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고 읽어내려간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그토록 찾던 여덟 글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 경고 코드 : 노랑 (점멸)
- 잡으러 간다.
글을 읽는 것과 동시에 정욱의 네번째 메시지가 떠올랐다. 유나는 소름이 돋았다. 이 사람은 대체 뭘까. 타이밍의 신이 현신이라도 했단 말인가.
- 노랑 점멸은 시스템 자동 복구일 경우 나타나며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5분 동안 대기 모드가 지난 후 자동으로 정상 상태로 복원된다. 마지막 백업 상태로 초기화 되므로 기관 전체의 설정값 재설정이 필요할 수 있다.
유나의 눈이 '자동으로 정상상태로 복원'이라는 말에 꽂혔다. 그간 긴장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간단한 해답이었다. 그저 기다리면 저절로 돌아오는 거라니. 안심이 되자 긴장이 맥없이 풀려버린다. 만약 매뉴얼 찾느라 헤맬 것 없이 바로 정욱이 기다리는 12번 데크로 갔다면 지금처럼 애가 탈 일은 없었을 터다. 억울했다.
- 9보조 기관실까지 가기 2분 전.
그녀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욱의 메시지는 계속해서 무자비하게 날아든다. 유나는 정신없이 매뉴얼을 접어 구석에 집어 던지고 보조 기관실을 박차고 뛰어 나왔다. 언제부터 점멸이 시작됐는지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앞으로 2분 안에 끝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욱을 보조 기관실에 들어가게 해선 안 된다. 그녀는 출입문을 꼭 닫았다.
'뭔가...... 뭔가 핑계 거리를 찾아야 해. 바로 나가지 못한 이유를! 그것도 보조 기관실 안이 아니라 밖에서 찾아야 해.'
유나는 어두침침한 복도에서 둥둥 떠다니면서 머리를 최대한 굴렸다. 정욱 특유의 무심한 무표정을 마주하고 싶진 않았다. 방법을 찾아 주변을 샅샅이 살피던 그녀는 빨간색으로 색칠된 방화시스템의 질소 살포용 손잡이를 꺼내 들었다.
[2069년 4월19일 오후 12시27분]
"장유나"
9보조 기관부로 향하는 복도에서 정욱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유나를 불렀다. 그가 찾으러 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나는 허공에 둥둥 떠다니면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정욱은 가뜩이나 치솟아 있는 짜증이 척추를 꿰뚫는 것만 같았다.
눈이 뒤집혀서 이를 갈며 그녀에게 다가서던 그는 낌새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동 손잡이를 박차고 유나를 향해 몸을 날려 단숨에 곁으로 날았다. 그녀는 마치 자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장유나! 눈 안 떠?"
정욱은 유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반응이 없다.
"야 임마!"
정욱이 당장이라도 뺨을 날릴 기세로 손을 들어올렸지만 그녀는 아무 반응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정욱은 뺨을 날리려던 손을 거둬 유나의 코에 갖다 대었다. 콧구멍 사이로 바람이 정말 미약하게 흘러 나온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나린호 시스템 검색. 현 위치에서 의무실까지. 망막 투사 안내."
정욱은 유나의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 안고 단말기에 음성 명령을 실행시켰다. 짧은 로딩시간이 지나고 망막 위로 경로가 올라온다. 정욱이 움직이기 위해 벽으로 선을 뻗을 때였다. 순간 시야가 흐려지면서 정신줄마저 놓칠 뻔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금새 호흡이 딸리는지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어느 새... 대체 무슨 일이...?'
그는 당황스러웠다. 유해물질이나 독이 선내에 있을리가 없는데 대체 무슨 일인가. 마치 중독이라도 된 듯이 온몸의 감각이 점차 희미해져 간다.
정욱은 이를 악물었다. 가까스로 벽을 박차고 통로 쪽으로 날아가면서 이동 손잡이를 잡아 채려고 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정욱은 흐릿한 눈으로 스쳐지나가는 이동 손잡이를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 쿵
정욱의 등이 그대로 복도 끝 벽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결코 적은 충격은 아니었지만 이미 몽롱한 의식탓인지 정욱은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정욱은 몸의 감각이 점차 아련하게 멀어져가는 동안에도 혹시나 품에 끌어 안은 유나가 벽에 부딪히지 않았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의 몸은 유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을 잃었다. 정욱은 의식이 점점 가늘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2069년 4월19일 오후 1시17분]
정욱이 천천히 눈을 뜨자 희미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초점이 안 맞는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뜨자 조금씩 주변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아까 유나를 안고 날아 들었던 복도 끝이다. 아까 벽으로 날아들면서 부딪힌 등이 뻐근한 것이 느껴진다. 그는 우선 손에 힘을 살짝 주어보았다. 온전히 힘이 들어가진 않지만 감각은 전부 돌아온 듯 했다. 정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 문득 유나가 떠올랐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유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코로 손을 가져가려던 그는 손을 거뒀다. 서로 맞닿아 있는 가슴을 통해 그녀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갓 스무살이 된 그의 부사수는 아기처럼 앳된 얼굴로 새근 새근 잠들어 있었다. 이따금씩 얼굴을 찡그리며 무엇인가 답답한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이 눈에 띈다. 아직 숨 쉬는 것이 힘든 것일까.
정욱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유나의 등으로 가져갔다. 아니나 다를까 온통 땀으로 범벅인 옷 위로 꽉 졸라져 있는 속옷이 느껴진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속옷만 풀어주자 유나가 한번 움찔 거리더니 편안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잠시동안 지켜본 결과, 다시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다.
'속옷이 얼마나 자기 몸에 맞지 않길래 의식이 없는 중에도 숨 쉬는데 불편해 할까.'
그때 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가빠진 호흡, 온몸을 적신 식은땀, 그리고 흐릿해진 의식과 감각. 그는 그제서야 왜 이렇게 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