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아직 회의는 끝나지 않았다.
남은 세 사람은 현 말튼 성의 병력을 책임지는 수장들이었다.
어떻게 병력을 배치할지에 대한 회의는 오랜 시간 동안 집무실에서 계속되었다.
아르실의 명령대로 다친 주민과 자식을 치료소에 보내고 시체마저 치운 렘 브란트.
지친 몸을 이끌며 렘 브란트는 숙소에 가는 중이었다.
렘 브란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잡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사는 건지 아니면 그냥 죽고 명령만 따르는 시체가 된 건지 원.”
연신 한숨을 내쉬던 렘 브란트의 귀에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쿵쿵!
아무리 안색이 수척해지고 정신이 지쳐도 이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그는 알 수 있었다.
육중한 철갑이 땅바닥과 부딪히며 나는 소리였다.
렘 브란트는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말튼 성의 대로변에서 행군하는 천 명이 넘는 무장한 병사들로부터 나는 소리였다.
렘 브란트는 병사들의 정체를 알아보곤 깜짝 놀랐다.
“뭐야 저거 하룬가의 사병들 아니야?”
하룬가의 단순 사병도 아닌 저택을 호위하는 사병들이었다.
사병들만이 있는 것도 아닌 기사들 또한 있었다.
하룬가를 대표하는 세 기사단은 아닌 임시 기사단원들이지만, 뿜어내는 기세는 그에 못지않았다.
이들을 이끄는 근위대장 오툰은 말에 올라 탄 채 병사들의 걸음을 재촉했다.
“서둘러라! 최대한 빨리 가야한다!”
“넷!”
근위대장의 말에 절도 있게 답하는 병사들.
근위대장을 따라가는 병사들은 하룬가의 병사들이 다가 아니었다.
렘 브란트가 속해 있었던 자유 해방단 단원 또한 이 무리에 속해 있었다.
자유 해방단원들은 다들 하나 같이 위험한 임무를 할 때만 입고 가는 중무장을 했다.
렘 브란트는 서둘러 몸을 숨긴 채 계속 그들의 진군을 지켜보았다.
“하룬가가 갑자기 왜 자기네 사병들을? 게다가 자유 해방단 애들은 왜 따라가는 거야? 우리 단장은 어디 있는 거고.”
그들이 향하는 곳은 말튼 성의 정문이었다.
말튼 성의 정문은 여전히 나가려는 사람들과 들어오려는 사람들로 인해 혼잡했다.
오툰은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을 향해 거친 목소리로 일갈했다.
“모두 비켜라! 위대한 하룬가의 병사들과 자유 해방단원들의 행렬이다! 막아선다면 내 친히 이 검으로 목을 벨 것이다!”
오툰의 우렁찬 함성에 북적이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그쳤다.
사람들 중 한 명이 오툰에게 물었다.
“무엇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가시는 겁니까?”
“보면 모르겠나? 너희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짐승들의 군대를 박살내러 가는 길이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래! 위대한 하룬가의 자비로 알고 영광으로 생각해라!”
오툰의 확고한 답변에 질문한 시민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다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이 사라진 시민들의 인파는 순식간에 갈라지며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완성되었다.
오툰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말의 박차를 가했다.
“가자!”
“푸륵!”
오툰이 타고 있는 말이 갈기를 휘날리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자 뒤따르던 군대들 또한 그 뒤를 따라갔다.
평소에는 미워하는 하룬가지만, 지금만큼은 예외였다.
위풍당당한 행렬에 사람들은 환호하고 축복했다.
저들이 짐승 군대를 이겨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모습들이었다.
정문을 통해 빠져나가는 하룬가의 사병들과 자유 해방단원들.
그들을 말튼 높고 거대한 성벽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하룬가의 적자 하랄드와 말튼 성의 영주 샤로텐이었다.
군대 행렬을 지켜보던 하랄드는 뭐가 불만인지 눈살을 찌푸린 채 투덜거렸다.
“이런데 쓰라고 있는 호위병들이 아닌데, 하필 하룬가의 다른 두 기사단들이 외지로 나간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하랄드의 투덜거림을 들은 샤로텐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자칫 하룬가의 본가가 함락될 수도 있는 상황인데 이때가 아니면 언제 하룬가의 호위병을 쓴다는 말이지요?”
“시끄럽다, 우리 하룬가가 나서주는 걸 고맙게 생각해라.”
“이 사태의 원흉이 하룬가이니 당연히 그쪽이 나서야죠, 안 그러십니까, 하랄드 경?”
“한 마디도 지려고 하지를 않는 군, 망할 영주.”
하랄드의 무례한 언행에도 샤로텐은 딱히 화내지 않고 오히려 능숙하게 대응했다.
그로인해 하랄드는 더욱 화난 것 같이 보였지만, 샤로텐은 신경쓰지 않았다.
군대 행렬을 응시하던 샤로텐은 자신과 하랄드 뒤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그쪽은 저 행렬에 끼지 않는 겁니까?”
샤로텐이 말을 건 대상은 자유 해방단의 단장 하밀부르크였다.
영주의 질문에 하밀부르크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군대 하나에 대장이 둘이 있으면 분란이 생기는 법입니다, 더군다나 싸우러 가는 군대도 아니니.”
“흐음, 그건 그렇지.”
하밀부르크의 담담한 말에 샤로텐은 동의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어졌지만, 성벽 아래에서 들려오는 시민들의 환호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진군하는 하룬가와 자유해방단의 군대는 말튼 성에서 조금 떨어진 평원에 자리를 잡았다.
눈을 위로 올리면 끝없이 높은 하늘이 있고 바로 앞에는 사방이 보이는 넓게 펼쳐진 대지가 있는 곳이었다.
이곳이라면 적들이 어디서 오는 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잠깐의 쉴 틈도 없이 오툰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임시 막사를 준비하고 목책을 세워라!”
오툰에 명령에 병사들은 가져온 물자로 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하룬가의 병사들은 물론 자유 해방단원들 또한 군말 없이 명령에 따랐다.
오툰은 차례차례 세워지는 목책의 상태들을 확인하며 병사들을 격려했다.
“잘하고 있다, 계속해라, 목책 하나가 나 혹은 동료의 목숨을 살린다는 생각으로 세워야 한다!”
“넷!”
병사들을 격려하고 있는 도중 부관 중 한 명이 오툰에게 말을 걸었다.
“상태가 괜찮군요.”
“우리 하룬가의 사병들은 내가 항상 단련을 시킨다,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게 당연하지.”
“저희 하룬가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저기 있는 저 놈들 말입니다.”
부관이 가리킨 곳은 다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자유 해방단원들이었다.
부관은 자유 해방단원들의 의욕적인 모습이 의외인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최근 들어 저희 하룬가를 따르는 자유 해방단원들의 태도가 불성실해졌는데 지금은 잘 따르는 군요, 근위 대장님께서 따로 조치라도 취하신 겁니까?”
“아니, 내가 아닌 녀석들의 단장이 따로 조치를 취한 거겠지,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은 모두가 힘을 합해야 할 때니깐.”
“모두가 힘을 합해야 할 때라……저희 하룬가의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니 웃기는 군요.”
“나도 안다.”
부관이 피식 웃으며 한 마디 하자 오툰 또한 옅게나마 웃었다.
스스로를 비웃는 것 같은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웃음기를 지운 부관은 본론을 꺼내들었다.
“이방인 하운드를 막기 위함이라 들었습니다, 급하게 명령을 받아 하는 일이긴 하지만, 이런 목책으로 적을 막을 수 있는 겁니까?”
임시로 준비한 재료에다가 급하게 세우는 목책이었다.
그렇게 튼튼하지도 않고 검으로 치면 부서질 정도였다.
목책의 상태를 걱정하는 부관에게 오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대는 인간만이 다가 아닌 짐승도 있지, 본능만으로 덤벼드는 짐승들을 상대로 이 목책은 잠깐의 시간이라도 벌 수 있을 거다.”
선봉에 서는 건 인간들이 아닌 발 빠른 짐승들일게 분명하다.
그런 짐승들 상대로 이런 목책은 효과적이다.
목책의 가시에 찔려 한 놈이라도 쓰러지면 뒤에서 따라오는 다른 짐승들이 엉켜 무너질 것이다.
설령 목책이 바로 부서져도 땅에 떨어진 목책의 부스러기들은 짐승들의 발에 상처를 낼 것이다.
설명을 들은 부관은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만, 시간을 번다는 말씀은?”
“우린 적의 대략적인 숫자만 알지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한번 부딪히고 힘들다 싶으면 바로 후퇴할 거다.”
“대충 미끼역이란 말이군요, 미끼 역에다가 길 안내역까지 해야 한다니 쉽지 않겠군요,”
다른 성에서 올 지원군이 원활하게 올 수 있게 길을 터는 것 또한 이들의 임무였다.
여러모로 막중한 임무의 무게를 느낀 오툰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를 보던 부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대체 적이 얼마나 강하기에 하룬가 본가의 주둔하는 호위병들과 저희 임시 기사단원들이 나선 겁니까? 말튼 성의 토벌대가 당했다는 건 들었지만, 그 정도론…….”
“카시아와 준을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저희 하룬가를 대표하는 두 이방인 아닙니까?”
“둘이 당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하룬가가 이 지방에서 모은 사병 천 오 백 명 또한 당했지”
오툰의 무겁게 가라앉은 말에 부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룬가의 최대 전력 중 하나인 이방인, 그 이방인 중에서도 강자인 카시아와 준이었다.
괴물보다 더 괴물 같던 두 사람과 하룬가의 사병 대부분이 당했다니.
부관은 벌벌 떨며 말했다.
“맙소사 이방인 하운드가 이끄는 군대가 보통 강한 게 아닌가 보군요.”
“군대에게 당한 게 아닐 거야, 사병들과 말튼성의 토벌대라면 모를까 카시아와 준마저 처리했다면 그건 필시 이방인 하운드의 짓일 거다.”
“호, 혼자서요?”
“살아남아 도망친 말튼 성의 병사의 말로는 거대 짐승 혼자서 군대를 박살냈다하더군.”
이어지는 오툰의 말에 부관의 표정은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침묵이 있고서 부관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만약 가장 먼저 나서는 게 조종당하는 인간들도 짐승들도 아닌 그 이방인 하운드라면…….”
“승산은커녕 도망치기도 힘들 거다, 만약 운 좋게 지원군이 먼저 도착하면 굳이 맞서지 않고 지원군과 함께 군사를 뒤로 물릴 거다.”
“지원군이 먼저 도착하기를 빌어야겠군요.”
또 다시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의 주위를 감돌았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가만히 서서 한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바삐 움직이는 병사들을 감독할 때다.
각자 자리로 돌아간 개 병사들을 지휘했다.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일은 머리 위에 높이 뜬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요히 달이 중천에 뜬 한밤중.
넓은 평원을 돌아다니는 한 무리의 병사들이 있었다.
말튼 성의 기사들과 감독관이었다.
말튼 성의 영주 샤로텐의 명령을 받고 말튼 성 주위를 순찰 중이었다.
하루종일 말을 타도 여유로운 기사들에 비해 감독관은 반쯤 죽어가는 표정이었다.
“으어어어어억.”
말 타는 게 익숙하지 않은 지 감독관은 하루 종일 말을 타는 동안 자세를 잡기는커녕 매달린 채 버티고만 있었다.
옆에서 이 모습을 본 말튼 성의 기사들은 반쯤 농담 섞인 말을 했다.
“요즘은 말을 저런 식으로 타나? 나 때는 저렇게 타면 교관님에게 죽도록 맞았는데 말이야.”
“큭큭, 너무 놀리지 말라고 저것도 대단한 거야, 한나절을 낙마 없이 말에 매달린 친구라고.”
“중간에 토만 열번 넘게 하지 않았나? 토만 안했어도 칭찬 정돈 했을 거야, 큭큭.”
“야야, 놀리지 말라면서 더 놀리면 어쩌자는 거야, 어이 젊은 친구 속은 괜찮나?”
기사들이 서로 농담을 하는 와중에도 감독관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말할 기운은커녕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말허리를 붙잡은 자신의 다리 힘은 풀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임무를 마칠 생각이었다.
새벽이 다 되도록 감독관과 기사들의 정찰은 끝나지 않았다.
해와 달이 서로를 마주본 채 돌아가기를 한 바퀴.
어느새 하루가 지나갔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