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킹덤]: 러시아의 민족 만들기와 제국을 향한 탐색_1.jpg](https://i1.ruliweb.com/img/26/01/10/19ba61d961038908.jpg)
저자 - 세르히 플로히
역자 - 허승철
출판사 - 글항아리
쪽수 - 568쪽
가격 - 30,000원 (정가)
존재한 적 없지만 전쟁까지 불러온 상상의 단일체, 범러시아 민족
잃어버린 왕국을 좇다 근대 국가의 길을 잃어버린 러시아의 역사
15세기 후반부터 우크라이나ㆍ벨라루스와의 관계 속에서 자라난
러시아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뿌리를 추적하다
제국이 정체성이 되어버린 민족
러시아 민족 만들기 프로젝트가 직면한 독특한 과제
전후 탈식민주의 시대를 거치며 제국주의는 민족주의와의 결합에서 빠지고 점차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는 듯했다. 대영제국이 해체되며 인도를 비롯한 영연방의 식민지들이 하나둘 독립했고, 독일 역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독일 민족 국가로 통합하려는 구상을 포기했다. 최근 러시아, 중국의 제국적 행보는 이러한 세계 흐름에서 벗어난 예외 사례로 치부되곤 했다. 그러나 2026년 새해 벽두부터 전해진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 소식은 민족주의의 고양이 제국주의와 얼마나 빠르게 결합할 수 있는지 단번에 드러내며, 여전히 역사를 뒤적여 두 개념의 조합 공식과 경로를 파악할 필요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동유럽사 연구자인 세르히 플로히 하버드대학 교수는 2016년 모스크바 한복판, 크렘린궁 인근 광장에서 러시아 제국과 민족이 얽히고설킨 매듭을 상징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웃 나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대공이자 키이우 루시의 군주였던 볼로디미르를 기리는 동상이 러시아 수도 한복판 가장 중요한 장소에 세워진 것이다. 1147년 모스크바를 창건한 유리 돌고루키 동상보다 더 높이, 더 중심에 자리한 이 동상의 위치는 러시아의 역사적 정체성에서 키이우 루시, 더 나아가 우크라이나가 지니는 함의에 골몰하게 한다. 그 함의는 동상 제막식 연설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이 볼로디미르 대공을 러시아 영토를 넓히고 중앙집권 국가의 토대를 마련한 정치인으로 호명할 때 분명해진다. 푸틴은 그가 “여러 민족, 언어, 문화, 종교로 이루어진 연합”을 이룩했다는 언급을 빠트리지 않는다.
저자는 볼로디미르 대공 동상과 푸틴의 연설에서 키이우 루시라는 ‘잃어버린 왕국’ 신화를 되찾으려다가 근대 국가로 거듭나는 길을 상실하고 또 하나의 ‘로스트 킹덤’이 된 러시아의 모습을 본다. 미궁에서 빠져나가는 실타래의 매듭을 푸는 직조공처럼, 이 책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교차하는 약 600년의 러시아 역사를 정교하게 풀어내며 근대 민족 만들기에 있어서 러시아가 직면한 과제의 보편성과 독특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오늘날 러시아는 인종·문화·정체성의 ‘정신적 지도’와 러시아연방의 정치적 지도 사이를 조화시키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회학자 어니스트 겔너가 말한 근대 민족주의의 핵심 요구, “정치적 단위와 민족적 단위가 일치해야 한다”는 원칙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20세기에 제국 해체를 경험한 열강들도 겪었던 보편적 문제다. 하지만 러시아의 문제는 한층 더 깊다.
러시아 문제의 핵심은 러시아 민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있다. 러시아 민족은 오로지 러시아 연방 안팎의 러시아 인종으로만 구성되어 있는가 아니면 동슬라브인인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도 포괄하는가? 다른 제국들이 피지배민과 국가 기원 신화 및 역사적 뿌리를 공유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하필 러시아는 이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공유해왔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근대 민족의 발명을 다룬 기존 연구들과 이 책이 차별화되는 지점도 러시아 민족의 이러한 조건을 조명하는 데에 있다. 저자는 제도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던 범러시아 민족이 발명되어온 역사를 추적한다.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범러시아 민족은 지도에서 찾을 수도 정치적 실체로 구현된 적도 없지만, 러시아 정치·문화 엘리트와 대중의 의식 속에는 강력한 현실로 기능해왔다. 이러한 상상의 단일체가 실제 지도 위의 국가들보다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다.
범러시아 민족에 기반한 러시아 제국은 영국 사학자 제프리 호스킹의 표현대로 영국처럼 “제국을 소유한” 형태가 아니라 “제국 그 자체”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영국의 식민지들처럼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서 수익을 가져다주는 영토가 아니라 이미 러시아 제국 본토의 일부처럼 여겨진다. 러시아는 중국과 더불어 제국의 행보를 보이는 예외 사례가 아니라 제국의 또 다른 유형에 해당하며, 이러한 제국의 탈식민화 또한 다른 종류의 과제를 요구한다. 이 책의 서평을 쓴 소련 역사학자 마크 에델이 인용한 중국사학자 피터 C. 퍼듀의 탈식민화의 두 유형을 참조해보자. “제국을 소유한 경우 식민지를 버리고 본토 핵심을 보존할 수 있다…. 제국 그 자체라면 주변부의 상실은 국가와 사회의 완전한 변형을 의미한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는 제국의 매듭을 풀기보다는 ‘잃어버린 왕국’이라는 과거 체제의 복원을 추구했다. 그 결과는 2014년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동남부 침공, 그리고 2022년 우크라이나와의 전면전 돌입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책 말미에서 러시아가 포스트-제국 세계의 요구에 맞춰 영국과 독일 등 제국처럼 러시아연방의 국경 안에서 근대적 시민 국가를 형성하기를 촉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냉전 혹은 이보다 더 끔찍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출간 후 9년이 지난 오늘날의 현실은 새로운 냉전 체제일까, 아니면 이미 더 끔찍한 국면에 접어든 걸까. 확실한 건 제국을 뺀 민족 개념을 새롭게 상상해야 한다는 점, 여기에는 국가와 사회의 완전한 변혁이 수반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매듭을 풀려면 이 책의 시선을 빌려 키이우 루시라는 ‘잃어버린 왕국’의 기억이 어떻게 러시아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형성해왔는지 거꾸로 되짚는 작업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BBC 역사 매거진』 올해의 책 선정★
★『키이우 인디펜던트』 추천★
러시아 민족의 이론적, 정치적 곡예의 역사
러시아 민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러시아 역사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쟁점이었다. 다른 제국 국가들처럼 러시아에서도 제국이 먼저고 민족이 그다음이었기에 정치적 국면과 제국의 이해관계가 재편될 때마다 민족을 정의하는 논리 또한 새롭게 설정되었다. 저자는 15세기 후반 이반 3세의 모스크바 공국이 몽골 칸으로부터 독립하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약 600년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 등 동유럽 이웃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키이우 루시의 영토적·상징적 통합을 회복하고자 모색했던 이론적, 정치적 곡예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이 책은 특히 러시아 민족과 제국의 형성 역사에서 큰 역할을 했던 우크라이나에 집중한다. 러시아 민족 정체성은 우크라이나와 키이우 루시라는 신화를 공유했을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영토로의 확장과 우크라이나 지식인들과의 사상적 교류에 따라 재구성되어왔다. 17세기 키이우 수도사들이 집필한 러시아 최초의 역사 교과서 『개요서』는 키이우 루시 영토에 살았던 사람들을 포괄하는 ‘슬라브-로시아’ 민족 개념을 제시했고, 이 책은 러시아에서 150년 이상 기본 교재로 자리매김하며 이후 민족 개념 논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모스크바 제국이 러시아 제국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도 키이우 지식인들이 서양에서 모스크바로 들여온 근대 민족 개념이 전통적 왕조와 종교 개념과 결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 국가 구축에 기여했다. 19세기에 러시아 제국이 서부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영토를 두고 폴란드 반군과 다툴 때도 키이우는 교육 기관, 고고학 연구 등 새로운 제국 정체성을 건설하는 현장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동슬라브인의 민족주의가 부상하며 러시아 민족 정체성 모델과의 긴장이 고조된다. 러시아 제국은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대러시아인(러시아인), 소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 백러시아인(벨라루스인)으로 삼분된 러시아 민족 개념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는 세 민족을 문화적 외투 아래 통합하려는 목표로 제시된 언어적 개념일 뿐, 각 민족에 자치권을 부여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거치며 이 제국적 민족 모델은 붕괴되고,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은 각자의 영토를 주장하는 별개의 민족으로 자리잡는다.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수립하면서 세 민족은 각각 공식적으로 독립된 공화국을 갖추게 된다. 소련은 러시아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를 배척하고 민족 간의 평등한 공존을 표방했지만, 이해관계의 변화에 따라 토착화 정책을 펼치다가 이를 번복하고 억압하는 등 일관되지 않은 민족 정책을 펼쳤다. 결국 소련 정권은 러시아 민족을 동등한 여러 민족 중 으뜸이 되는 부류로 규정하고, 모스크바에 권력을 집중시켰으며 러시아어를 소련 전역에서 사용하게 하는 등 러시아 문화에 동화시켜 제국주의가 발전할 토대를 마련했다.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는 제국의 유산을 되살려 새로운 민족 정체성을 구축하려 했고, 결국 2014년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전쟁으로 이어졌다. 역설적이게도 이는 러시아 제국이 지배하던 역사적‧문화적 공간의 해체를 앞당겼다. 2005년에서 2015년 사이, 두 민족이 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러시아 국민의 비율은 81퍼센트에서 52퍼센트로 줄어들었으며,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에 대한 이미지 또한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더불어 러시아인이 주민 다수를 이루던 크림반도와 돈바스 일부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점령은 전선 양쪽에서 인종적 민족성을 강화했다.
이 모든 논쟁의 역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범러시아 민족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안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제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재정의되어야 했던 불안정한 구성물이라는 점이다. 범러시아 민족을 지탱하기 위해 러시아의 사상가와 지도자들이 감행한 이론적·정치적 곡예는 민족과 제국의 관계를 푸는 데 끝내 실패했다. 그 허망함을 저자는 절제되고 균형 잡힌 논조로 생생하게 전한다.
목 차
- 머리말
지도
1부 러시아 발명
1장 차르정의 탄생
2장 제3의 로마
3장 제국주의 국가
2부 루시의 재통합
4장 계몽 군주
5장 폴란드의 도전
6장 국경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
3부 삼분화된 민족
7장 우크라이나의 부상
8장 대러시아, 소러시아, 백러시아
9장 언어 사멸시키기
4부 민족 혁명
10장 민중의 노래
11장 전제정의 붕괴
12장 러시아 혁명
5부 해체될 수 없는 연방
13장 레닌의 승리
14장 민족 공산주의
15장 러시아의 귀환
16장 대조국 전쟁
17장 소비에트 국민
6부 새로운 러시아
18장 하강하는 소련 적기
19장 러시아세계
20장 러시아의 전쟁
에필로그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추 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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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가, 러시아 국민을 이루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시대를 관통하는 러시아 민족주의를 탁월하게 그려낸 단연 매혹적인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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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지방’이 왜 러시아 정체성의 핵심이 되었는지 밝히는 이 연구는 단순한 역사 서술이 아니라 오늘의 지정학적 현실과 직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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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주변국에 강압적으로 대응해온 기원인 ‘깊은 기억’과 그 역사적 배경을 드러낸다. (…) 절제된 태도로 547년의 역사를 담아내며 시대를 꿰뚫는 직선적인 서사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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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들이 강력한 기원 신화 아래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자 했던 열망을 선명히 보여주는, 시의적절하고 흠잡을 데 없는 연구서다. (…) 플로히는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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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역사학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냈다. 아득한 과거와 현재의 긴박한 현실을 생생하게 연결해 헤드라인 너머의 러시아를 이해하게 한다. 표트르 대제에서 소련 붕괴까지, 역사와 신화가 어떻게 불타올랐는지를 정교하고 힘 있게 그려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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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민족주의의 모순을 심도 있게 탐구한 저작. (…) 저자는 러시아의 지난한 과거가 러시아에 어떤 변화의 과제를 남겼는지 명쾌히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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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민족의 역사를 태동기부터 블라디미르 푸틴 체제에 이르기까지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낸다. 국제적 역사학자인 저자는 이 주제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역사를 관통하는 아이러니와 우연, 그리고 비극을 예리한 시선과 담대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오늘의 러시아를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