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태평추
어릴 적 예천 외갓집에서 겨울에만 먹던 태평추라는
음식이 있었다
객지를 떠돌면서 나는 태평추를 잊지 않았으나 때로
식당에서 메밀묵무침 같은 게 나오면 머리로 떠올려보기
는 했으나 삼십년이 넘도록 입에 대보지 못하였다
태평추는 채로 썬 묵에다 뜨끈한 멸치국물 육수를 붓
고 볶은 돼지고기와 묵은지와 김가루와 깨소금을 얹어
숟가락으로 훌훌 떠먹는 음식인데 눈 많이 오는 추운 날
점심때쯤 먹으면 더할 수 없이 맛이 좋았다 입가에 묻은
김가루를 혀끝으로 떼어먹으며 한번도 가보지 않은 바다
며 갯내를 혼자 상상해본 것도 그 수더분하고 매끄러운
음식을 먹을 때였다
저 쌀쌀맞던 80년대에, 눈이 내리면, 저 눈발은 누구를
묶으려고 땅에 저리 오랏줄을 내리는가? 하고 붉은 적의
의 눈으로 겨울을 보내던 때에, 나는 태평추가 혹시 귀한
궁중음식이라는 탕평채가 변해서 생겨난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허나 세상은 줄곧 탕탕평평(蕩蕩平平)하지 않았다 한쪽
으로 치우치지 않고 탕평해야 태평인 것인데, 세상은 왼
쪽 아니면 오른쪽으로 기울기 일쑤였고 그리하여 탕평채
도 태평추도 먹어보지 못하고 나는 젊은 날을 떠나보내
야 했다
그러다가 술집을 찾아 예천 어느 골목을 삼경(三更)에
쏘다니다 태평추,라는 세 글자가 적힌 식당의 유리문
을 보고 와락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 있었던 것인데, 그
앞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다가 대신에 때마침 하
늘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말았던 것인데,
그날밤 하느님이 고맙게도 채 썰어서 내려보내주시는
굵은 눈말을 툭툭 잘라 태평추나 한 그릇 먹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간절하게 참 철없이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안도현, 창비시선 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