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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본 이 글에서 썼던 댓글을 좀 더 풀어서 써보는 글임
다들 알다시피 임진왜란 초기, 고니시군 1만여 명이 북상하기 시작하자 조선 정부는 신립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군대를 보내서 일본군을 저지하도록 했음
이때 같이 동행한 김여물은 야전 하지 말고 문경의 산악지형에 의존하여 싸우자고(이때 문경새재에는 성곽이 없었음) 주장했지만 신립을 이를 묵살하고 탄금대에서 기병을 가지고 야전을 시도함
그리고 시원하게 말아먹었음
이것 때문에 신립은 지금까지도 심심하면 까이고 있고, 반대로 대체 왜 그랬을까에 대한 갑론을박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
그렇다면 진짜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 이유와 추측들이 있는데, 일단 내 생각을 정리해봤음
조선이 임진왜란 이전에 가장 마지막으로 겪은 일본과의 실전경험은 을묘왜변이었음
그리고 을묘왜변 때 왜구들은 야전을 정말 매우 몹시 엄청 많이 못했음
정확히는 기병을 상대하는 법을 아예 몰랐음
위 영상은 을묘왜변과 관련된 화약무기 이야기가 주 내용이어서 왜변 초기에 조선군이 전멸하고 뭐 이런 내용 위주로 나오고 있는데, 을묘왜변 당시 왜구들은 조선 기병만 떴다 하면 맥을 못 추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음
전라도 영암성에서 조선군은 성을 포위한 왜구들에게 화살을 쏘다가, 갑자기 소수 기병대가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했는데 이때 왜구들은 당황해서 진형이 그대로 무너지고 도망치기 일쑤였음
이게 극단적으로 드러난 건 제주도에서의 전투임
을묘왜변 때 왜구들은 총 2차례에 걸쳐 침략했는데, 전라도에서 1차 침략이 좌절당하자 잔존 왜구들은 제주도 침략을 감행함
이때 왜구의 규모는 1천여 명, 하지만 제주목사 김수문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상황이었음
하지만 김수문은 성이나 산악 지형에 의존하지 않고 과감하게 야전을 하기로 결정함. 김수문은 보병 70명이 진을 치게 한 뒤 기병 4기로 '치마돌격대'를 꾸려서 돌격하도록 했는데
놀랍게도 왜구들이 기병 4기를 당해내지 못하고 빤스런을 하기 시작함.
다시 한번 말하지면 기병 74명도 아니고 보병 70명에 기병 4명, 그것도 돌격한 병사들은 기병 4명이 전부였는데 그걸 못 이겨내고 도망쳤다는 거임
이쯤 되면 왜구가 너무나 오합지졸처럼 보일 텐데, 그렇다고 얘네 장기가 없었던 건 아님
애초에 싸움에 자신이 없으면 바다 건너 약탈하러 오지도 않았겠지
그렇다면 을묘왜변 기준, 조선군이 파악한 왜구의 장기는 뭐였을까?
정원에 전교하였다.
"지금 제주목사의 계본 【*.】 을 보니 적왜가 우연히 지나다가 노략질한 것이 아니다. 험한 곳을 의지하여 고수(固守)한다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니다. 속히 대신과 병조·비변사 당상을 불러 원병(援兵)과 군량·군기 등의 일에 대해 의논하라."
【*계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적왜들이 험하고 견고한 벽을 점거해 방패(防牌)를 둘러 세우고 철환(鐵丸)을 마구 쏘면서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사(勇士)들로 하여금 달려나아가 돌격하게 했더니 더러는 크게 외치면서 나와 대적하기도 하고 더러는 화살을 쏘기도 했습니다. 다시 추격하여 활을 쏘았더니 벽 안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장졸(將卒)들이 여러날 동안 고전하느라 인마(人馬)가 지치고 기계가 거의 고갈되어 험한 곳을 점거하고 있는 적왜를 언제 포축(捕逐)할지 기약하기가 어려워 매우 염려됩니다."】
- 명종실록 13권, 명종 7년 6월 3일 갑인 1번째기사(다만 이건 을묘왜변보다 3년 전에 표류해온 왜구와의 전투 이야기임)
이헌국은 아뢰기를,
"신이 변협(邊協)에게서 들은 말인데, 왜적들이 여름철 초목이 무성할 때면 숨어서 총을 쏘기 때문에 싸우기가 쉽지 않고 반드시 가을 겨울 나뭇잎이 떨어진 뒤라야지만 섬멸하기가 편리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신립(申砬)은 정반대로 말하였기 때문에 신은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은 초목이 무성할 뿐 아니라 여름철 장맛비가 내릴 때라서 거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 선조실록 99권, 선조 31년 4월 29일 계미 1번째기사(내용 자체는 왜란이 발발한 이후 신립을 까는 내용이지만, 여기서 이헌국이 '변협에게 들었다' 면서 언급하는 왜적의 전술 이야기는 을묘왜변 때 이야기를 하는 거임. 변협은 을묘왜변에 참전했던 사람인데 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죽었음)
이 기록들을 보면, 을묘왜변과 기타 왜구의 침략을 통해 조선군이 학습한 왜구의 장기란 '방패벽 뒤에 숨어서 or 풀숲에 매복한 상태에서 총을 쏘는 것'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이러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탄금대 전투에서 나온 이야기를 다시 돌아보면?
- 야전 하면 안된다 = '(조선군의 장기로 알려진)기병돌격 하면 안된다'
- 문경의 험한 지형에 의지해서 방어전을 하자 = '(왜구의 장기로 널리 알려진)풀숲에서 사격전 하자'
이말인즉슨 신립 입장에서는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아군의 장점은 다 갖다버리고 왜구가 잘 싸우는 환경에서 싸우자' 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는 거임.
탄금대의 패인에 대한 분석은 수도 없이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게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함.
다만 그렇다면 김여물 등 방어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장수들은 뭔가 싶을 수도 있음
이건 아마 상주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서 신립에게 합류한 이일이 '이번 왜구는 지난번 약골들이랑은 차원이 다르니까 야전 하면 안돼' 라고 이야기한 것 때문일 거임. 다만 신립은 그걸 안 믿었던 거고 김여물은 믿었던 거지 ㅇㅇ
그러면 결국 을묘왜변의 데이터고 나발이고 걍 신립이 돌격만 좋아하는 바보인 거 아니냐? 는 결론이 나오는데, 나는 여기에 정치적인 이유가 끼여 있다고 생각함
신립은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왕자의 장인이 됨
그 왕자란 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신성군인데
비록 신성군이 어리긴 했지만 선조에게 대단히 총애를 받고 있었고, 어차피 광해군같은 나이 많은 형제들도 다들 후궁으로부터 얻은 서자들이지 정실 왕후로부터 얻은 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걸 감안하면, 신성군은 세자가 될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 볼 수는 없는 상황이었음
하물며 그 아버지가 광해군이 세자책봉된 이후로도 늦둥이 영창대군을 왕 만들고 싶어서 정치질하던 선조라는걸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지
즉 신립은
- 사위가 세자가 될 가능성이 0%는 아닌 상황
- 그런데 갑자기 대규모 외적의 침입이 터짐
- 이걸 이겨내면 나의 정치적 입지가 확 치솟을 테고, 그렇다면 어쩌면 사위가 세자가 될 수도...?
- 게다가 그 외적은 기존의 실전경험에 따르면, 1천 명이 기병 4명을 못 막을 정도로 대기병전이 형편없는 놈들
- 나는 기병전을 매우 잘함
- 좋았쓰!
라는 사고회로가 돌아갔을 수도 있다는 거임
물론 정말로 이런 정치적인 욕심만 작용한 건 아니고, 신립의 전략적 목표가 뭐였는지도 따져봐야 함
당시 신립의 목표는 '북상하는 왜구를 저지하는 것' 이었지, '왜구를 최대한 많이 죽이기' 가 아니었음. 잘 싸운다고 끝이 아니라, 왜구의 진격 자체를 틀어막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거임
즉 김여물의 의견이 당장의 싸움을 이기느냐 마느냐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인데, 전략적으로는 그렇게 맞말이라고 보기가 힘든 상황임
문경에 틀어박힌 조선군 상대로 고니시군이 몇 번 들이박아 보고 어 이거 안되겠네 걍 돌아갑시다! 하고 무시하고 서울 가버리면 전투에서 이겨 놓고도 전쟁은 지는 상황이 될 수 있었으니까 ㅇㅇ
즉 잘못하면 병자호란 일본버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는 거임
설사 신립군이 방어전을 하기로 결심했고, 일본군이 신립군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음
신립이 이끈 조선군의 규모는 모 위키에 따르면 8천명 또는 1만 6천여 명으로 추산된다고 하는데, 이거 임진왜란에서 제일 처음 상륙한 일본 '제 1군'의 규모보다 적음. 많이 쳐줘도 비등비등한 정도지 결코 조선군이 일본 제 1군보다 훨씬 많지는 않음
그리고 왜란 때 상륙한 일본군은 제 9군까지 있었고, 수군은 별도로 운영됨. 물론 얘네가 한번에 다 상륙한 건 아니지만, 최소한 탄금대 전투 벌어질 무렵 이미 제 2군까지는 상륙한 상태임
실제로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 2군은 탄금대 전투에 참전만 안 했을 뿐 이미 그때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음
그러니까 그때 일본군은 조선군보다 머릿수 자체가 훨~씬 많았음
신립이 당시 일본군의 정확한 규모를 알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몰랐을 확률이 대단히 높음),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상대해야 하는 적이 너무 많음.
그렇다고 방어전 하기에 상황이 잘 갖추어진 것도 아닌게, 내가 아까 앞에서 뭐라고 했다? 그때 문경에는 아직 성곽이 없었다
그말인즉슨 신립은
- 성벽 없음(충주성은 규모가 너무 작아서 신립이 이끄는 대부대가 주둔할 수가 없었음. 그리고 문경새재는 내가 앞에서 이미 이야기했지만 왜란 발발할 때만 해도 성곽이 지어지지 않아서, 사실상 산비탈에 의존해서 싸워야 하는 상황)
- 병사의 질이 일본군보다 딸림
- 무기의 화력이 일본군보다 딸림(조선군은 대포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 수도 있는데, 왜란 당시 조선군의 야전교범을 분석해보면 당시 조선군은 야전에서 대구경 총통을 많이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신립은 애초부터 야전을 생각하고 내려온 만큼 기껏해야 승자총통같은 핸드 캐논 위주로 무장했을 가능성이 높음)
이라는 악조건 삼박자를 고루 갖춘 상태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거임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신립이 욕먹어야 하는 이유는 '전투에서 패배해서' 가 아니라고 생각함
당시 상황을 따져보면 패배 자체는 필연적인 상황이었음.
이런 악조건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순신 같은 신화 수준의 명장이 아닌 이상 이기기 힘듬
하물며 그 이순신도 일본군이 서울 빨리 따는 데에 집중하느라 전라도에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썼고, 이후 일본군이 전라도로 들어가려고 시도할 때쯤에는 조선군도 정신 좀 차린 상태인데다 권율, 김시민 등이 우주방어로 틀어막았기 때문에 최소한 신립보다는 상대적으로 여유를 확보한 상황이었음
그래서 신립이 욕먹어야 하는 포인트는 승패 그 자체가 아니라, '지더라도 잘 져야 하는데 너무 압도적으로 패배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함
패배도 다 같은 패배가 아님
패배를 딛고 일어나 오히려 반격의 실마리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많고, 패배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사람들도 많음
당장 고려도 거란의 2차 침입 초반에 삼수채 전투에서 역사적인 대패를 당했지만, 이 정도면 고려군의 위협이 없을 거라고 본 거란군이 개경으로 진격했고, 그 결과 양규가 이끄는 병력 1700명이 거란군 후방을 마구 어지럽히며 대활약을 펼칠 수 있었음
그리고 양규의 활약은 이후 여요전쟁 전체의 승리에 중대한 역할을 함
임진왜란 초기, 도원수를 맡았던 김명원은 왜란 최초의 육상전 승리인 '해유령 전투' 를 이끈 신각을 섣불리 처형한 적이 있음
이거 가지고 김명원을 까기도 하지만, 사실 그때 김명원이 한 행동이 지나친 건 아니었음. 왜냐면 신각 본인부터가 상관인 김명원에게 통보하지 않고 무단으로 이탈해서 싸우고 돌아온 거였거든 ㅇㅇ
가뜩이나 전시인데 그런 돌발행동을 벌였으니, 김명원의 처벌이 그리 과했다고 보기는 힘듬
하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승리한 장수를 처형한 꼴이 되버린 거라, 김명원은 이때 대단히 후회했던 것 같음
그래서 그런지 김명원은 이후 이순신이 원균의 모함을 받아 조정에 압송당하고, 이순신 편이었던 류성룡마저 선조의 눈치를 보느라 이순신 편을 들지 않던 그 순간에도 '그래도 끝까지 잘 살펴보고 결정해야 한다. 무작정 이순신을 죽여서는 안 된다' 라며 이순신을 두둔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음
다시 이순신을 기용하여 통제사로 삼았다. 이때에 한산도의 패전보가 이르자 조야가 크게 놀랐다. 상이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 물으니, 모두 황공하여 대답할 바를 몰랐는데,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 병조 판서 이항복이 ‘현재의 계책으로는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삼아야만 된다.’ 하니, 상이 따랐다.
- 선조수정실록 31권, 선조 30년 7월 1일 경인 3번째기사
게다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칠천량 해전의 참패 직후 이항복과 함께 유이하게 '이순신을 다시 기용해야 한다' 고 주장한 사람이기도 함
즉 김명원은 왜란 초기에 저지른 실책을 토대로 한층 더 성장했던 거임
신립도 기왕 패배하더라도 잘 졌다면 양규나 김명원처럼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걸 못했다는 점에서 참 아쉬움
특히 신립이 이끈 군사 중 기병의 비중이 상당히 컸다는 걸 감안하면, 진짜 잘만 하면 양규처럼 활약할 수도 있었을 거임
하지만 그건 대체역사의 영역이고.... 이래나저래나 참 아쉬움
설령 야전이 맞다고 쳐도 논바닥에서 싸우는건 병1신짓이라 어차피 쉴드가 안돼
패장에게 명예란 없다
설령 야전이 맞다고 쳐도 논바닥에서 싸우는건 병1신짓이라 어차피 쉴드가 안돼
애초에 쉴드치려고 쓴 글은 아니고 왜 꼬라박았을까에 대해 분석을 해본거임 개인적으로는 논바닥도 논바닥인데 경기병이 기동할 만한 공간 자체가 안 나오는 전장에서 싸웠다는 게 제일 큰 문제라고 생각함 이게 신립이 기병돌격을 의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한건지 아니면 의도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된건지는 모르겠는데 이래나저래나 장군으로서 실책이라 결국 본인 잘못이라고 생각함
너무 쳐발린거군 ㄷㄷ
지형파악을 못해 늪지에 발잡힌건 실드하기 어려운 실책이라 결국 자만 or 정치적 이유때문에 무리하게 교전했다는게 부각됨
지형파악을 안해서 들이받은 건지 그런 상황으로 밀려들어간 건지는 현재로서는 불분명함 다만 전자 후자 둘 다 결국 신립 본인 잘못이라 비판받아야 마땅한 실책인 거고
수습이라도 하고 돌아와야하는대 패배 책임지고 투신ㅈㅅ한거도 쫌...
저거 '성벽 없음'을 좀 우습게 여기는 경우가 많던데 성벽이 없다는 건 그 주둔 병력을 먹여 살릴 물과 식량도 없다는 소리여. 그렇다고 충주에서 식량을 추진해서 조령까지 가져가기엔 이미 충청도 관내의 장정이란 장정은 죄다 징병해서 쓰는 상황이었고... 농성전에서 식량이 없다? 그거 남한산성 재판인 거임. 조령이면 성도 없으니 병력 대부분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서 뿔뿔이 흩어지는 참사였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