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누르하치가 이끌던 대군은 1618년 음력 4월 15일 무순 인근에 당도했다. 후금의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이 때 누르하치는 상인으로 위장한 부대를 선행해서 보낸 것 같다. 당시 무순에는 마시를 위해 여진인들이 온다는 거짓 정보가 유포되어 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에 연계하여 상인으로 위장한 부대를 선행하여 보내어 무순이 방위태세를 해제하게 한 것으로 유추된다.
물론 명과 조선의 기록에 서술되는 마시에 관한 거짓 정보의 유포 역시 십중팔구는 누르하치가 뿌린 정보로 판단된다. 누르하치는 거짓 정보의 유포 및 그에 연계된 위장집단의 파견으로 무순의 방위망을 흔들고, 이어서 무순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무순은 해당 위장부대의 접근과 그에 뒤이은 후금군의 공격으로 곧장 함락되진 않은 것 같다. 사보타주와 기습에 관한 부분은 거론되지 않지만, 후금의 기록을 살펴보자면 이 이후 후금군은 무순을 포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누르하치는 이 때 무순을 포위한 뒤 포로로 잡은 한인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서신을 쥐어주고, 그를 앞으로 보내어 당시 무순의 수장이던 이영방에게 서신을 전달케 했다.
해당 서신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전의 글에서 언급했던대로 대의명분의 선전, 회유, 압박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선, 명과 같은 국가로서는 전형적이라고 할 만한 항복종용서신이었지만, '오랑캐 왕국'의 수장이 '천하질서의 중심을 이루는 제국'에게 전쟁을 선포한 뒤 그 변경 장수에게 최초로 보낸 투항 요구 서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자면 꽤나 감회가 새롭다.
누르하치가 보낸 투항 서신의 그러한 내용구성은 누르하치가 지난 수십년간 명-조선-몽골, 그리고 다른 여진 세력과의 외교 활동으로 단련된 바였다. 누르하치는 해당 서신에서 칠대한과 같은 거창한 명분을 서신에서 전부 열거하진 않았으며, 칠대한에 거론된 명분중 '명의 군대가 경계를 나와 여허를 도와 그 곳에 주둔한 문제'만을 전쟁의 명분으로 거론했다.1
이는 칠대한의 명분중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것인데, 누르하치가 명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명나라의 변경관리체계에 따른 여진 세계 이원화 및 국경 원상복구화 기조, 그리고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 견제임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이유였다.
해당 서신의 끝자락, 마무리 부분도 다소 염두에 둘 만하다. 여기서 누르하치는 '찰나의 순간의 분노'에 사로잡혀 본인의 말을 믿지 않고 경거망동해 일을 그르치지 말라는 논조로 서신을 끝마쳤다.2
찰나의 순간의 분노에 휩쌓여 우리를 믿지 않고 이 일을 그르치지 말지어니, 항복하라.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4월 15일-
삽화 출처 : 칼부림
여기서 말하는 찰나의 순간의 분노란 거시적으로는 '감히 오랑캐 따위가 천조(天朝)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중국인으로서 중국에 도전한 이인(夷人)에 대한 분노를 지칭하는 동시에 미시적으로는'평화롭게' 살고 있던 자신들을 급작스럽게 포위한 누르하치에 대한 억하심정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당시 이영방이 품었을 누르하치에 대한 억하심정에 대해 좀 더 깊이 파고 들어가자면, 누르하치는 자신이 무순을 공격 하기 전 거짓 정보를 뿌리고, 이후 위장부대를 통하여 마시를 열게한 후 기습 공격으로 마시를 습격한 것에 대해 이영방과 무순 병사들이 분노를 하고 있을 것을 예상하고 이러한 문구를 서신에 삽입하며 이영방에게 투항을 종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요컨대 누르하치가 보냈다는 서신의 해당 내용은 후금의 기록에는 없는 '거짓 정보 유포'와 '마시 습격'의 존재를 미약하게나마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무엇이 되었건, 누르하치의 항복 종용 서신을 받은 이영방은 처음에는 꽤 의기롭게 대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금의 기록상에서 그는 조복(朝服)을 입고 나서서 말로는 누르하치의 뜻을 받들어 항복하겠다고 하면서도 뒤로는 무순의 병사들에게 병장기를 준비하게 했다. 아마도 이영방이 갑옷을 입지 않고 누르하치와 그의 군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조복을 입은 자신에게로 이목을 끌어 자신의 군대가 항전을 준비하는 것을 가리려 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영방의 바램과는 달리 누르하치는 곧 본인이 가지고 온 공성병기들과 전투부대들을 동원하여 무순에 대해 즉시 공격을 가했다. 공성전의 정확한 전투과정은 살펴지지 않으나, 본격적인 공성 전투가 개시된 이후 이영방은 단 한 시진도 안되어 패배했다.3
삽화 출처 : 칼부림
사실, 무순 전투 이후에 벌어진 전투들에서 후금에게 항복치 않는 명군 지휘관들에 의해 빛이 바래는 감이 있긴 하나, 이영방의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나마 저항을 결의한 것이 오히려 대단하다고 할 만 했다. 당시 이영방이 데리고 있던 병사의 수는 고작해야 일개 유격부의 규모에 지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마저도 '마시 습격'으로 말미암아 이미 꽤 큰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기마저도 상당히 흔들렸을 상황인데, 상대는 1만이 넘는 대군이자 정예병이었으니, 이영방의 결심은 꽤 대단했다고 할 만 했다.
이영방이 겉으로 드러나는 압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결심한 이유에는 아마도 후금군과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맞부딪혀 보지 못한 탓이 있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현대의 절대적이고 전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후금군의 역량과 누르하치의 지휘능력이 사료를 통해 명확히 드러나므로 이영방의 명군이 누르하치의 후금군에 비해 확실히 열세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이영방으로서는 요동 변방의 여진/몽골계 세력, 요컨대 명이 '오랑캐'라고 칭하는 세력의 경우 공성전 역량이 그리 뛰어나지 못하며, 따라서 성벽을 끼고 화기를 통해 방어전을 수행 하면 어느 정도 거점 방어에 성공할 확률이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실제로도 당시의 몽골계 세력들의 경우 공성 역량이 상대적으로 다소 뒤떨어지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영방의 판단은 최소한 몽골계 세력에 대해서는 통용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후금은 건주 시절서부터 지금까지 이미 여진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수십여회의 공성전을 수행했던 전적이 있었다.
비록 해당 공성전들의 경우 대부분 명의 성보들보다 다소 빈약한 수준의 성, 요새들을 대상으로 한 공성전이었으나 개중에는 호이파와 같이 막강한 방위력을 소유하고 있던 성에 대한 공성전 역시 존재했다.4 그렇게 공성전 역량을 키워온 후금군으로서는 그만한 대군으로 이미 적잖은 병력피해가 누적된 무순을 공략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 밖에도, 이영방 본인이 공성전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대명(大明)의 신하이자 장수로서 감히 '오랑캐' 따위에게 항복할 수는 없다는 마음을 굳게 머금었었다는 생각 역시도 든다. 하물며 이영방은 본인이 지금보다 직급이 낮았던 시절에, 당시에도 이미 한 세력의 군주였던 누르하치를 상대로 동등한 위치에서 만나며 그의 해명을 수용해 본 경험이 있기에 그런 이를 상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은 고려를 해보자면 이영방은 명백히 누르하치와 후금군을 실제보다 상대적으로 과소평가 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결과는 그와 같이, 곧 현실로 드러났다.
1.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4월 15일, 『만주실록』 천명 3년 동월 동일. 만문노당과 실록의 기록은 약간 뉘앙스가 다른데 만문노당에서는 '여허를 돕는다'는 부분이 생략되고 있다. 그러나 대략적인 맥락은 동일하다.
2. 『만문노당』 이상과 같음
3. 『만주실록』이상과 같음
4. 마침 호이파 전투의 경우 무순 전투와 마찬가지로 위장부대의 선행 작전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40년 음력 10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