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가난한 서양 사람들의 식생활 이야기를 하면서 양을 불리기 위해 주구장창 수프만 끓여먹었다는 언급을 한 적이 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이는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는 양을 늘려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빵을 만드는 비용이 너무나도 비쌌다는 점이지요.
흔히들 "귀족들은 하얗고 부드러운 밀빵을, 농민들은 검고 딱딱한 호밀빵을" 먹었다고들 하지만 실제로는 그 호밀빵조차도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습니다. 호밀을 구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곡식으로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큰 산을 두 개나 넘어야 했거든요.
우선 곡식을 곱게 빻아야 했는데, 당시 모든 방앗간은 영주의 소유였기 때문에 비싼 세금을 물어가며 곡식을 빻아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방앗간지기들은 따로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중간중간 훔쳐내기가 일수였고, 그래서 "모든 물레방앗간 주변에는 모래 언덕이 있다 (모래를 섞어넣어서 눈속임을 한다는 뜻)"는 오래된 속담도 있을 정도였지요.
이렇게 얻은 곡물 가루를 빵으로 구워내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물레방아를 돌리는 강이 영주의 소유였듯이, 땔나무를 하는 숲도 영주의 소유였기 때문에 장작 가격이 비쌌거든요.
게다가 빵을 굽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를 오랜 시간동안 유지시켜야 했는데, 난방이 주 목적이었던 벽난로 아궁이로는 제대로 구워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때 그때 먹을만큼 소량의 반죽만 구워내거나 제빵 길드의 신세를 져야 했지요.
그러다보니 가난한 농노들은 빵을 구워먹기보다는 집에 몰래 숨겨둔 조그만 맷돌을 (방앗간지기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이런 불법 도구를 적발해서 영주에서 일러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손으로 돌려가며 거칠게 갈아낸 곡물 가루를 물에 풀어 죽을 끓여먹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맛으로 끓여먹고, 간편하게 준비할 수 있어서 끓여먹는 게 일반적이지만요. 오트밀 (Oatmeal: 귀리로 만든 죽)을 아침식사 대용으로 가볍게 먹는 모습을 중세 농노들이 본다면 '미래에도 여전히 먹을 게 없나 보구나'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체험, 삶의 현장' 찍는 것도 아니고, 물과 곡물가루만으로 만드는 죽은 별로 맛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물 대신에 육수를 사용하고 여기에 버터와 파마산 치즈를 갈아넣어 맛을 냅니다.
냄비에 예전에 만들어 둔 육수를 네 컵 부어넣고 살짝 끓여줍니다.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면 거품기로 저어가며 콘밀을 한 컵 천천히 뿌려가며 넣습니다.
한 번에 왕창 넣었다가는 큼직한 멍울이 생기면서 덜 익은 옥수수 경단을 먹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원래 폴렌타는 옥수수 가루가 아닌 다른 곡물가루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대항해시대 이후 신대륙에서 감자와 옥수수가 전파되면서 지금에 와서는 폴렌타라고 하면 옥수수 가루가 기본 레시피로 자리잡았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콘밀의 비율을 높여서 뻑뻑한 죽을 만들어 먹고, 남은 것은 시간이 좀 지나서 굳으면 그대로 잘라서 팬에 구워먹기도 합니다.
1~20분 정도 약불에 끓여가며 콘밀이 다 익으면 불을 끄고 버터 조각과 갈아낸 치즈를 섞어줍니다.
계속 열을 가하다 보면 버터나 치즈의 유지방이 분리될 수 있으니 불을 끄고 남아있는 열로 요리를 끝마치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옛날에는 빈민들이 먹는 음식의 대명사가 폴렌타였다지만 버터와 치즈가 들어가면 뭔들 맛이 없을까요.
신대륙에서 전파된 감자와 옥수수는 수많은 유럽사람들을 살려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아일랜드 지역은 감자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아지는 바람에 감자마름병이 돌면서 흉년이 들자 지역 인구의 25%가 감소하는 엄청난 비극을 불러일으켰지요.
옥수수는 그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꽤나 오랜 기간동안 수많은 농민들에게 유행했던 펠라그라(Pellagra) 병의 주 원인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거라곤 옥수수밖에 없다보니 주구장창 옥수수만 갈아먹었는데, 이 때문에 필수 영양소인 나이아신이 부족해지면서 병에 걸린 거지요. 지금도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아프리카 빈곤 계층이나 탈북자들을 보면 이 펠라그라 병에 걸린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는 것. 폴렌타가 맛있다고 이것만 주구장창 먹었다가는 영양소 부족에 시달릴 수도 있으니...라는 핑계를 대면서 고기를 곁들입니다. 현대인이 영양 과잉이라면 모를까 영양 결핍이 생길 일은 별로 없는데도 말이죠.
닭다리 한 쪽을 소금과 후추로 간하고 껍질 있는 쪽만 밀가루를 뿌려 바른 다음 탁탁 털어서 여분의 밀가루를 털어내면 준비 완료.
무쇠팬에 오일을 넉넉하게 두르고, 풍미를 더하기 위해 버터를 약간 첨가한 후 닭다리의 껍질 부분이 아래로 가게 해서 굽습니다.
이렇게 굽는 방법을 소테(Saute)라고 하는데, 기름을 살짝 두른 뜨거운 팬에 지져내는 요리법이지요.
더 맛있게 하려면 아예 처음부터 버터로 구워내는 방법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버터에 포함되어 있는 수분이 발연점을 낮추기 때문에 일반 버터로 조리했다가는 모조리 까맣게 타버립니다.
버터를 중탕으로 가열해서 유지방 부분만 따로 건져낸 정제 버터를 사용해야 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만들어 놓은 게 없으므로 일반 식용유를 사용합니다.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정제 버터 한 통 만들어야 하는데...
한쪽 면이 다 구워지면 뒤집어서 반대쪽을 구워줍니다. 치킨 소테는 딱 한 번만 뒤집는 것이 관건입니다. 계속 뒤적거리면 애써 바삭하게 구워낸 껍질이 흐물흐물해지거든요.
대신 살모넬라균을 죽이기 위해 고기 내부 온도는 확실하게 75도 이상으로 조리해야 합니다.
완성된 치킨 폴렌타. 블로그에는 사진을 따로 올렸는데, 실제로 요리할 때는 폴렌타 슬슬 저으면서 닭다리를 요리하면 두 요리가 얼추 비슷하게 완성됩니다.
맛은 고소하면서도 크리미하고, 치즈와 버터의 풍미가 살아있으면서도 거칠한 콘밀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식감이 끝내주게 맛있습니다. 마치 잣죽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미세한 알갱이들이 느껴지는 그 특유의 식감이 참 마음에 드네요.
옥수수 가루로 만드는 음식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요리이기도 합니다.
이만큼 만들기 간편하면서도 이 정도로 맛있는 음식은 만나기 쉽지 않거든요. 콘브레드 만들어 먹을 때는 별로 줄어들지도 않던 콘밀이 폴렌타 만드는 법을 배우고 나서는 한 봉지 비우는 게 금방입니다.
그러고 보면 옛날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배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먹었던 음식들이 지금은 오히려 별미로 여겨지는 경우가 꽤 있는 듯 합니다. 조선시대에 빈민들을 구휼하기 위해 나누어 주던 빈자(貧者)떡이 빈대떡으로 변해 사랑받는 거나, 죄수들이나 먹던 랍스터가 고급 요리재료로 각광받는 거나, 가난한 농부들이 먹던 폴렌타가 당당히 이탈리아 요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지는 걸 보면 말이지요.
과거에는 빈자들을 구제하기 위했던 음식들이 현재에는 이런저런 그 당시에는 구하기 힘들었던것들을 첨가해서 먹고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려고 하니 어쩐지 이 광경을 옛 사람들이 본다면 도둑맞은 가난이라고 할것 같지 말입니다. 오트밀같은 것도 지금은 고급화는 아니지만 현재에는 다이어트식이나 간단한 한끼로서 판매하는걸 보면 역시나 과거의 시점에서 보면 격세지감이 들것 같습니다. 뭐, 실제로 볼수 있을지는 둘째치고라도 말이죠. 이번에도 잘 배우고 갑니다.
과거에는 빈자들을 구제하기 위했던 음식들이 현재에는 이런저런 그 당시에는 구하기 힘들었던것들을 첨가해서 먹고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려고 하니 어쩐지 이 광경을 옛 사람들이 본다면 도둑맞은 가난이라고 할것 같지 말입니다. 오트밀같은 것도 지금은 고급화는 아니지만 현재에는 다이어트식이나 간단한 한끼로서 판매하는걸 보면 역시나 과거의 시점에서 보면 격세지감이 들것 같습니다. 뭐, 실제로 볼수 있을지는 둘째치고라도 말이죠. 이번에도 잘 배우고 갑니다.
도둑맞은 가난 ㅋㅋㅋㅋ
언제나 게시물 올리실때마다 역사,어떻게 파행됐는지에 대해서 한글자 한글자 놓치지 않고 잘보고 있습니다. 덕분에 공부도 되고 좋습니다 유익한 게시물 많이 올려주세요~ㅎ
사진보다(폄하는 아닙니다) 글이 더 좋은 유일한 분..
저도 폴렌타나 포리지 같은 죽이나 걸쭉한 스프 종류 좋아합니다. ^^ 좋은 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