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튼 보병병종 말아먹어서 기동력말고는 아무런 장점도 없는 군대로 만든게 팩트잖슴?
어짜피 일본활은 ㅈ도 안되는 활이라 튕겨낼수 있는데 창은 아니거든 애초에 창병부터가 기병을 상대하기 위한 병종인데
일본의 창은 4미터가 될정도로 충분히 기병들을 저지할수 있는 수준으로 가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기병들이었음
말이 군사력이지 보군한테 지급하는 급여를 줄 사람들을 3명에서 두명으로 줄여버려서 키운 군사력의 크기라서 허우대만 큰거고
문종때 개편한 오위를 재개편하면서 갑사들(부사관계층에 해당됨)을 의홍위에 몰아주면서 병력의 중간통제가 불가능해짐
그리고 갑사나 장교들을 모집할때 의도적으로 유독 궁시에만 집중하도록 편성한것도 백병전에 취약해짐
그리고 세조가 정리한건 진관체계인데 이 진관체계는 앞서말한 보군들한테 지급할 급여를 줄 보인을 줄여버리면서 보인 한명당에게 생기는 부담이 커져서 도주하거나 감당이 안된 자신을 팔아 노비가 되서 회피를 하니 보병들이 제대로 유지가 될수가 없고
이게 세조때부터 시작되서 임진왜란때까지 계속되니까 아예 막을 여력 자체도 없어지게 된거임 누가 말아먹었겠냐?
당연히 세조지
허우대만 키웠다고 무조건 까기엔 당시엔 쓸만한 정병 13만이나 뽑을 수 있게 한 나름의 기책이었음.
군적에 올라와있는게 40만인데 정병이 10만이 안된다고 한숨 쉬던게 조금 해소된 부분이잖아.
체급이 커진 이상 질적 저하는 당연히 따라오는 부분이고
여기에 엮인 폐단이 있지만 이 군역 문제는 세조만이 아닌 조선 체제와 다른 배경도 좀 연관지어야 한다고 봄.
그리고 세조 때 태종-문종 때보다 궁시 비중을 더 높였다고 하는거임?
실록 어디에도 세조가 궁기병 비율을 더 높였다는 말은 안 나와
시험엔 기창시험도 있었고 궁/지창기병 비율은 세종때부터 3:1이었는데 세조때 편제상 지창 비율은 더 높음.
궁시 중심은 전부터도 있었고 경국대전 이후에 기사 중심의 시스템이 더 확실히 내려앉은거니
세조에게 책임을 지울수는 없음.
대륙간탄도탄도 개발 못하고 그만둬서 문제
아앗.. 그건 문제 맞네
대장군전이 필요하다 자금성까지 닿을 길고 굵은 대장군전이
화기개발은 둘째치고 형이 만든 진법이나 진형체계 전부다 갈아엎고 궁기병으로 빠르게 이동격파한다는 궁기병 양성으로 탄금대에서 개같이 털리고 선조가 명나라로 빤스런 하는 계기를 만든다
근데 세조는 기병 기창 훈련을 제일 많이 시킨 왕임. 세종때부터 이미 궁기병은 늘고 있었고
여튼 보병병종 말아먹어서 기동력말고는 아무런 장점도 없는 군대로 만든게 팩트잖슴? 어짜피 일본활은 ㅈ도 안되는 활이라 튕겨낼수 있는데 창은 아니거든 애초에 창병부터가 기병을 상대하기 위한 병종인데 일본의 창은 4미터가 될정도로 충분히 기병들을 저지할수 있는 수준으로 가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기병들이었음
으으음 세조 때 어떻게 보병 병종을 말아 먹은거임? 세조 때는 데 진법까지 정리됐고 외치 업적까지 있는데다 조선 전기 군사력의 절정기 아니었나 중앙의 지방군 훈련 통제도 이때고
말이 군사력이지 보군한테 지급하는 급여를 줄 사람들을 3명에서 두명으로 줄여버려서 키운 군사력의 크기라서 허우대만 큰거고 문종때 개편한 오위를 재개편하면서 갑사들(부사관계층에 해당됨)을 의홍위에 몰아주면서 병력의 중간통제가 불가능해짐 그리고 갑사나 장교들을 모집할때 의도적으로 유독 궁시에만 집중하도록 편성한것도 백병전에 취약해짐 그리고 세조가 정리한건 진관체계인데 이 진관체계는 앞서말한 보군들한테 지급할 급여를 줄 보인을 줄여버리면서 보인 한명당에게 생기는 부담이 커져서 도주하거나 감당이 안된 자신을 팔아 노비가 되서 회피를 하니 보병들이 제대로 유지가 될수가 없고 이게 세조때부터 시작되서 임진왜란때까지 계속되니까 아예 막을 여력 자체도 없어지게 된거임 누가 말아먹었겠냐? 당연히 세조지
근데 정작 지휘관 뽑고 기병뽑는 시험은 궁시로만 침
그리고 16세기를 전후로 훈구파의 면세토지 집적현상이 일어나서 근간부터 진관체계는 붕괴되버리기 시작하는데 누가 스타트를 끊었을까?
그리고 애초에 진관체계는 지역향토방위에 가까운 개념이라 약탈해오는 왜구나 여진족들을 막을정도지 얘네가 수만 10여만 단위로 집단으로 정복하러 오는 경우는 막지 못함
허우대만 키웠다고 무조건 까기엔 당시엔 쓸만한 정병 13만이나 뽑을 수 있게 한 나름의 기책이었음. 군적에 올라와있는게 40만인데 정병이 10만이 안된다고 한숨 쉬던게 조금 해소된 부분이잖아. 체급이 커진 이상 질적 저하는 당연히 따라오는 부분이고 여기에 엮인 폐단이 있지만 이 군역 문제는 세조만이 아닌 조선 체제와 다른 배경도 좀 연관지어야 한다고 봄. 그리고 세조 때 태종-문종 때보다 궁시 비중을 더 높였다고 하는거임? 실록 어디에도 세조가 궁기병 비율을 더 높였다는 말은 안 나와 시험엔 기창시험도 있었고 궁/지창기병 비율은 세종때부터 3:1이었는데 세조때 편제상 지창 비율은 더 높음. 궁시 중심은 전부터도 있었고 경국대전 이후에 기사 중심의 시스템이 더 확실히 내려앉은거니 세조에게 책임을 지울수는 없음.
공신전 같은건 애초에 세조만이 아닌 전대 후대에도 나오는 것이고 발급 자체를 문제삼으면 다 엮어야겠지 뿌려서 문제가 됐다면 다른 왕과 비교해서 규모를 까야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쪽은 잘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