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 남긴 글입니다.
전공 교과서나 만화 외에 내가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은 요시모토 바나나 작가의 <키친>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삶의 고됨과 따뜻함을 가벼운 문체로 달콤 씁쓸하게 그려낸 것이 좋았다. 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볼 때에도 대단한 스토리도 없고 가끔은 졸리기까지 한 '일상물 (Slice of Life)' 장르의 덕후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치열하게 살아가는 세상 속 성취 혹은 생존만이 아닌 나만의 소소하게 평안하고 즐거운 일상을 찾기를 바라는 무의식의 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와 아내가 밥을 먹으면서 틀어놓는 방송들 중 <알쓸신잡>은 몇 번이고 다시 돌려보게 되는 프로그램이다. 유시민 작가도 물론 멋지지만, 왠지 김영하 작가에 대해 관심이 갔다. 이후 아내가 한국에 잠시 들렀다 그의 저서 <여행의 이유>를 구해 왔을 때 그의 세계와 글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그렇게 10년 만에 읽게 된 책 <여행의 이유>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 중 하나는 탈여행, 비여행, 즉 간접 체험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인을 시켜 산에 오르게 하고 그 얘기를 전해 듣는 귀족이나, 아내가 세계를 돌며 기록한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작가나, 도시를 떠난 적도 없으나 지리학을 가르친 칸트의 경험이 비여행, 탈여행의 예였다.
아내와 나는 서로에게 많은 부분이 동화되었다. 예를 들면 나의 영향으로 아내는 마늘을 먹고, 자전거를 타게 되었다. 나는 아내의 영향으로 아웃도어에 나가고, 미역국을 좋아하게 되었다. 즉, 한 사람이 알고 있는 장소에 그 장소를 잘 모르는 상대를 초대해 '같이 여행'을 즐기게 된 것이다. 반면 아내가 직접 열심히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하여 구현한 요리를 나는 맛이나 보고 사진을 찍으면서 그 요리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일에는 '탈여행'의 요소가 크게 차지한다. 물론 같이 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요리를 나누며 신나게 호들갑을 떠는 부분은 역시 '같이 여행'을 하는 일일 것이다.
아내는 나보다 좋아하고 할 줄 아는 것들이 훨씬 많아서 내가 직접 하지는 않지만 그의 곁에서 경험을 지켜볼 수 있는 탈여행을 많이 한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라탄 공예를 하고, 집을 가꾸고, 뜨개질을 하고, 자수를 하고, 재봉질을 하고, 목공을 한다. 그리고 그는 많은 풀들을 길러낸다.
이것은 태어나기 전 '초록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나의 사랑스러운 아내가 초록들을 늘려가는 것을 지켜보는 나의 탈여행기이다.
봄, 이전해 트레이더 조에서 사 온 바질들을 잘 기르고 꽃 피워 받아낸 씨앗으로 아내가 새로운 바질 농사를 섬세하게 시작하는 모습이다. 바질을 비롯한 다양한 식물들의 씨, 발아하여 (욕이 아니다, 아마.) 그 작은 파란, 아니 초란 첫 잎이 흙 위로 올라올 때엔 언제나 감동스럽다.
아내가 식물을 키우는 것을 보면서 식물의 생명력에 대해 언제나 놀란다. 그냥 흙, 혹은 젖은 솜에 묻어 놓았을 뿐인데,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이파리를 틔운다. 정말 이상한 데에서도 어쩌다 보면 뭔가 초란 것이 자라고 있다. 고양이보다도 말도 못 하고 약한 이 녀석들이 이렇게 자라나는 모습에 큰 힘을 얻는다. 물론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하는 녀석들을 보면 속이 상한다. 토마토, 아주 많은 토마토, 바질, 아주 많은 바질, 상추, 고수, 루꼴라, 히아신스 등등, 우리 정원의 초기 식구들.
정원은 거의 언제나 아내의 담당이다. 나는 같이 가끔 너서리 (nursery)에 가서 씨앗이나 묘목을 구해오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 물론 나도 풀, 열매, 꽃, 나무를 정말 좋아한다.
한여름, 팽팽하게 펴진 바질 잎이 너무나 탐스럽다. 예전 한국에 있었을 때는 건조된 바질 가루도 접하기 어려웠는데, 처음으로 생 바질 잎을 먹었을 때의 감각을 잊을 수 없다. 그 여린 질감과 향긋한 맛에 벌레들도 많이 꼬여서 잘 관리를 해 주어야만 한다. 신나게 바질을 쳐먹고 잎 아래 뚱뚱하게 자고 있는 벌레들을 처음 보았을 때는 깜짝 놀랐지만 이제는 신나게 잡는다. 물론 너네도 너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지만 우리도 우리가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란다.
잔뜩 수확한 바질 잎들. 파스타와 곁들여 먹을 생 바질 잎들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바질 페스토로 만들어 냉동해 두었다. 거의 2년 정도 열심히 먹을 수 있는 양의 페스토였다. 우리 입맛에 맞는 페스토를 만들었기 때문이겠지만, 이보다 향긋한 페스토를 아직 먹어 본 적이 없다.
남은 바질 줄기들은 마저 꽃이 지기를 기다린다. 그러면 씨앗들을 채종 할 수 있게 된다.
풍족하게 향긋함을 주고 내년을 위한 씨앗까지 한가득 남겨준 바질.
한여름, 푸르름이 가득하다. 벨페퍼, 로즈마리, 장미, 부추, 타임, 파슬리, 민트, 루꼴라, 시금치, 깻잎.
모든 것이 그렇지만 길러낸 깻잎은 사 먹는 것보다 훨씬 맛이 깊고 짙어 늘 감탄하게 된다.
찬란한 오후, 무럭무럭 자라던 다이콘드라. 식물의 생명력은 정말 위대하지만, 이들이 갑자기 시들어갈 때면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물이 과해도 부족해도, 영양분이 과해도 부족해도, 햇빛이 과해도 부족해도 식물이 죽을 때가 있다. 그런 식물들을 보며 속상해하는 아내를 보며 나 또한 속상해지곤 한다. 어두침침한 내 청소년 시절 아주 좋아하던 마찬가지로 어두우나 따뜻한 노래를 하던 디어클라우드의 임이랑 보컬이자 작가가 써낸 <아무튼, 식물>에서 식물은 많이 죽여보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에 대해 알게 된다는 말에 내가 괜히 위안을 얻곤 했다.
우리는 둘 다 수국을 아주 좋아한다. 이름도 예쁘고, 독특한 색깔과 뭉실뭉실하게 뭉쳐서 피어나는 꽃들이 참으로 예쁘다. 마찬가지로 트레이더 조에서 사 온 수국 화분이 한 해를 잘 버텨주었다.
이듬해에도 그 수국은 꽃을 잘 피워내었다. 흙이 염기성이었는지 붉은 색깔로 바뀌어서. 그러던 녀석이 갑자기 시들기 시작하더니 지금 우리에겐 수국이 없다. 조만간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식물을 돌봐주고 있는 나의 아내. 가끔씩 영문도 모른 채 시드는 식물도 있으나, 그의 손길과 정성을 받고, 그리고 햇빛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녀석들이 대부분이다.
작년에 데려왔던 방울이. 내가 화분을 한 번 엎어 큰 고생을 한 녀석. 아내가 이 녀석과 이 화분을 많이 아꼈기에 나는 더욱더 미안하다. 다시 잘 자라주어서 고마울 따름이다.
추운 날들엔 집안에 풀들을 들인다.
우리 집 시금치에 자라고 있던 작은 달팽이 하나. 다시 풀숲에 놓아주었는데 어디로 갔을까.
토마토, 처음에는 애지중지 하던 존재였으나 토마토처럼 잘 자라는 식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다 흙에 묻어 두었더니 어느새 자란 아가 감자들. 맛있게 먹었다.
지금 아내의 정원. 많이 늘었다. 싱고니움, 방울이, 보송이, 새로 사 온 Silver Ragwort, 다시 시작한 다이콘드라, 딜, 칠전팔기 애플민트 , 트레이더조에서 공짜로 받은 사랑초, 대파, 올리브 나무.
새로 시작한 모종들, 그리고 몇 년째 아주 천천히, 그러나 튼튼하게 자라나고 있는 부추.
시원하게 물을 준다. 올해의 깻잎들.
베란다에서 일을 할 때마다 알짱거리는 고양이들.
새 식구가 된, 하얀 빛깔이 예쁜 Silver Ragwort, 아직 이름이 없다.
한 때 고비가 있었다가 회복하고 있는 라벤더, 그리고 꾸준히, 예쁘게 자라는 아이비.
아내는 여전히 열심히 풀을 가꾸고, 나는 그 옆에서 맥주나 한 캔 마시며 글을 쓴다. 우리의 초록이 계속 늘어만 간다.
와 글이랑 사진이 너무 좋아요. 사진 찍는 곳ㅇ디 온도가 느껴지는것 같아요.금손 부부시네요^^
말씀 고맙습니다! 정원에서 늘 따스함을 느낍니다.
와 정원이 너무 멋지네요. 글도 너무 감성적으로 잘쓰셨어요 바질 페스토 얼려서 쓰면 향이나 텍스쳐가 어느정도 유지 되는지 궁금합니다? 파스타기준으로요.
말씀 고맙습니다. 이렇게 얼려둔 페스토로 파스타 많이 해 먹는데, 매번 정말 향긋하다고 느낍니다. 질감도 처음 빻았을 때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 것 같구요.
따뜻한 온도가 느껴지는 글이라서 너무 좋았습니다. 부럽습니당!
한참 전에 남긴 글인데도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