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전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25250
전편: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25554
-----
목이 쉬도록 고래고래 고함친 다음에야 겨우 멈춰설 수 있었던 케시크는, 죽을 상을 짓고서 칸과 함께 대시 한 번 이 황량한 대평원을 내달렸다. 다행히 이번엔 칸이 그 고생을 한 케시크의 사정을 봐줘서인지 나란히 달리고 있었지만.
“흠, 몸은 괜찮나? 목은?”
“괜찮습니다, 켈록.”
기침은 좀 나지만 말이다. 두 번 다시 하고 싶진 않았다. 그걸 두 번 타다가 고꾸라지면 팔다리 부러지는 정도로는 안 끝날지도 모르니깐.
“......”
그래도, 그렇게 달리고 나니 이상하지만 뭔가 한결 기분이 편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저 소리만 목청껏 질렀을 뿐인데, 억눌린 무언가가 탁 트인 기분. 그 이유가 뭘까고 케시크가 혼자서 고민하던 새에 둘은 벌써 상당한 거리를 달려왔다.
“다 왔다. 여기가 목적지다.”
그녀들이 도착한 곳은 사막 한가운데 있는 자그마한 오아시스였다. 모래 사막이든 자갈 사막이든 오아시스는 귀중한 곳이다. 맑은 물이 고인 오아시스는 이 메마른 죽음의 땅 한가운데에 기적처럼 솟아난, 희귀하기 그지없는 생명의 땅이요 신의 은총과도 같은 쉼터였다.
다만 거기엔 먼저 선객(先客)이 와 있었지만.
“오! 벌써 왔어? 빠른데?”
“!? 사령관님?”
여기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존재가 웃기게 생긴 선글라스까지 끼고 반갑게 손을 휘휘 흔들자 케시크 쪽이 어이가 없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그녀에게 오히려 사령관이 툭, 핀잔을 던졌다.
“가만히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 줄래? 그늘막을 만들어야 해서.”
“이자들의 도움은 필요없다, 매지컬 젠틀맨! 내가 있지 않은가!”
기껏 찾아온 그녀들을 퉁명스럽게 대하는 - 마치 단둘이 데이트 하러 온 줄 알았는데 불청객이 끼어든 연인마냥 - 골타리온까지. 이 상황에 케시크는 황망하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다..다들 여기서 뭐 하세요?
“음? 내가 말 안 했던가?”
말 안 했다. 처음에 출발할 때도 칸은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지 않았던가. 아직도 상황을 이해 못 한 그녀에게 칸이 자신의 더플백을 툭툭, 두드려 보았다.
“우리 임무는 호위다”
“네?”
호드가 호위라니. 호짜가 같은 거 빼곤 별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앵거 오브 호드는 달리고 쳐서 빼앗는 공격부대니까, 뭔가를 지키는 임무와는 좀 거리가 있는 전투 스타일이다. 보통 사령관 같은 VIP의 호위는 거기에 더 특화된 다른 부대가 있지 않은가. 컴패니언이라든지, 배틀메이드라든지, 가디언 시리즈라든지. 그러나 칸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사령관이 캠핑을 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이곳을 추천했다. 여긴 전략적으로 무가치해서 철충도 올 일이 없고, 여타 위험요소도 없으니까. 조금 더운 걸 빼면 캠핑에 아주 그만인 곳이지.”
“그 더운 것도, 그늘만 마련하면 훨씬 나아진단 말씀이야”
사령관이 오아시스 물가에 높이 솟은 나무에 로프를 매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건조 기후는 햇빛을 차단하고 통풍만 확보하면 훨씬 시원해진다. 그러니 지금 그가 골타리온과 함꼐 낑낑대면서 그늘막을 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그럼, 대장님의 더플백에 들어 있는 건...”
“아이스박스에 들어있는 마실 물, 음료, 과일, 하루치 식재료, 군것질거리, 기타 등등이다.”
“아, 요리에 쓸 버너랑 사진 찍을 카메라는 내가 미리 가져왔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정확히는 내가 준비한 것이지 않은가, 매지컬 젠틀맨!”
뭐 사막에 설치할 감시장비나 탄약 같은 건 줄 알았는데! 그보다 그럼 이건 말이 호위지 그냥 사막에 텐트치고 노는 거잖아요! 하는 소리가 케시크의 입에서 절로 나올 뻔했다. 그건, 사령관의 옷차림만 봐도 명약관화했다. 대놓고 ‘나는 오늘 여기서 놀 거다’라는 의지가 충만하게 드러나는, 사막 레저 활동에 적합한 얇고 하늘거리는 펄럭펄럭한 옷에 챙이 넓은 사막 모자까지. 누가 봐도 이건 휴가였다. 선글라스 아래에서 사령관의 눈이 찡긋하며 그녀의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재확인했다.
“가끔은 쉴 틈도 있어야지, 너도, 나도.”
사령관은 자타공인 중증 노답 하이퍼 일중독자지만 말이다. 그래도 일중독자라는 게 재밌는 일까지 마다한다는 건 아니다. 당장 그러니까 지난 몇 주간 골타리온이랑 페레그리누스랑 알프레드랑 넷이서 온갖 ‘남자의 바보짓’들을 하며 즐겁게 지낸 것 아닌가. 이것도 그 중 하나고.
‘이렇게 명분이 없으면 애들이 놔주질 않아서 말야’
안 그래도 요즘 골타리온과 노는 게 재밌던 차였다. 끝없이 쏟아지는 일 외에 다른 취미가 생긴 건가, 싶었다. 이 중2병 컨셉 로봇이 어디서 뭔 바람이 들어서 이런 재미난 걸 많이 들고 오는진 몰라도. 남자라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그래서 그와 한껏 친해진 차에 칸이 명분을 만들어 준 셈이다. 쉴 시간도 갖고, 그러면서도 쫒아오는 여자들(특히 아스널이라던가 아스널이라던가 아스널이라던가)에서도 잠시 해방될 기회를.
어찌 보면 칸의 상담은 사령관에게도 기회였던 셈이다. 일로부터도, 그리고 일이 없으면 시도 때도 없이 비밀의 방 문을 두드리는, ‘뜨밤’을 위해 눈에 불을 켠 여자들로부터도 잠시 벗어날 기회 말이다. 핑계가 필요했단 말이지, 핑계가. 이렇게 한적한 데 홀로 놀러 갈 핑계가 말이다. 힘들어하는 오르카 대원을 격려하고 치하하기 위한 사령관의 조치라고 임무계획서에 적어두면 좋은 포장이 될 것이다.
‘아 이런 기회는 못 참지’
그래도 사령관이 자기 혼자 놀 생각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케시크에게 쉴 기회, 마음을 추스를 여유를 주고 싶었던 건 진짜였다. 그러니까 그가 이렇게 굳이 케시크를 불러와서, 강제로라도 휴가를 주는 게 아닌가.
“자, 케시크, 임무를 주지. 아주 중요한 임무야.”
“사령관님?”
“오늘 하루는 쉬어라. 푹. 아. 대신 가끔 나랑 좀 놀아줘. 심심하니까.”
남자는 커서도 애라더니, 하는 표정으로 어이없어하는 케시크를 보고 사령관은 자신의 지론을 좀 말해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쉬는 것도, 일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 말이다. 도끼를 갈며 쉴 줄 모르는 나무꾼은 언젠가 쓰러진다. 제대로 쉴 줄 모르는 자는, 인생이라는 기나긴 여정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그게 몸의 피로든, 마음의 피로든 간에. 뭐라 항변하려는 그녀를 무시하고 사령관은 뒤편의 칸에게 곁눈질했다.
“그보다 칸, 언제까지 그 더플백 매고 있을 거야? 그거 내려놓고 천막 치는 거나 좀 도와줘. 아, 물도 좀 주고.”
...
오아시스의 호반(湖畔)에 쭈그려 앉은 채 케시크는 작게 탄식했다. 아니, 이게 뭐 탄식할 일은 아닌데. 뭔가 생각한 것과는 너무 다른 하루라서.
이른 아침에 출발했는데 어느 새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이제 곧 저녁식사 시간이 될 테니 준비하라고 말하는 듯, 그녀의 갈색 머리를 황금빛으로 흩고 지나갔다. 오늘 하루는 어땠더라, 하고 그녀는 머리칼을 쓸며 회상해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놀랍게도,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먼저 밥먹는 얘기부터 하자. 뭐니뭐니해도 먹는 게 사는 데 제일 중요하니까. 사령관이...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골타리온이 요리하고 사령관이 보조한 점심은 깜짝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그 AGS, 원래 요리용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닐 텐데’
그런데도 탄성이 나올 만큼 요리를 잘 해서 되려 케시크가 놀랄 정도였다. 늘 일정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칸조차 “의외군....”하면서 낮게 뇌까릴 정도면 말 다 했다 하리라. 들리는 말로는 요리를 배우기 위해 오르카 주방장에게 배웠다는데, 대체 뭘 위해 그 정도 집념을 가질 수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한편으로 케시크는 사령관이 직접 바베큐를 굽기 시작하자 송구스러워 죽을 노릇이 되었으나 정작 칸은 거기에 대해서는 무덤덤했다.
- 사령관이 자기가 해주겠다고 하고, 자기가 하고 싶어한다. 거부할 이유가 무엇이지?
- 그..그래도 최고명령권자이자 최고 상관이신데 직접 이러시는 건...
- 사령관이 별나게 이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케시크.
- 네?
- 지금은 멸망 전이 아니다.
그 때와 지금은 다르다는 얘기지만, 그래도 이래도 되나 싶었다. 물론 멸망 전과 지금은 다르다. 그건 아직 멸망 후의 경험보다 멸망 전의 기억이 더 익숙한 케시크에게도 절절이 느껴졌다. 멸망 전의 세상은 바이오로이드들에게 그렇게 친절한 세상이 아니었다. 아니, 그건, 바이오로이드들을 마구 도살하는 철충이 나도는 지금도 그렇지만, 적어도 바이오로이드를 개 취급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인간인 사령관은 바이오로이드를 친구 보듯이 하고. 여담이지만, 사령관이 구운 고기도 맛있었다. 도대체 뭔 고긴지는 말 안 해줬지만.
그렇지만...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더 향상되어야 하는데. 오르카의 모두에게 도움이 되려면 더 노력하고 정진해야 하는데, 여기서 이렇게 죽치고 시간만 때우고 있어서 되는가란 생각이 들었다. 시간 낭비 아닐까.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조금이라도 더 물자분류를 연습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조급해졌다. 이, 한가롭기 그지없는 오아시스의 풍경에 걸맞지 않게.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거 같아’
초조한 생각에, 괜히 자신이 여기에 더 오래 머무르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여길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케시크는 이곳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니까.
“여기 있었군”
자박자박, 하는 발소리에 돌아보니 칸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 역시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외골격도 벗고 가볍고 편한 차림으로 오아시스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산책하던 모양이었다. 한 손에 골타리온이 만들어 준 스무디를 들고, 사령관이 준 그 괴상한 선글라스를 끼고서 빨대를 쭉쭉 빨고 있는 걸로 봐서는 그녀도 어지간히 즐기는 게 분명했다. 하기야, 그녀는 처음부터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까.
“즐거워 보이시네요, 대장님.”
“그럼 즐겨야지 않은가. 상관의 명령을 거역할 건가?”
느긋한 대답에 케시크는 쭈그려 앉은 채로 자신의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모처럼 사령관이 준 휴가인 건 알지만, 모르겠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여긴 철충이 없다. 만에 하나 문제가 터져도 골타리온이 있지. 우리가 대응할 시간은 주어진다”
“그게 아니라요.”
“?”
칸 쪽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돌아보고 있었지만...정말 모르는 걸까, 정말로? 케시크는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서 이럴 자격이 될까요?”
“자격이라니?”
“저..전 아직 실력도 부족하고...잘난 것도 없고...아직 오르카에 특출하게 뛰어난 기여를 하지도 않았는데”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케시크의 그 말에는, 앞으로 시간이 지나도 자신이 더 이상은 나아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다른 벽에 마주쳤을지도 모른다는, 자격이 없다는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더 노력하지 않으면...더 유능해지지 않으면...저는...”
칸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 케시크가 살짝 시선을 아래로 회피했다. 물론 특이개체인 칸처럼 될 수 없다는 건 안다. 칸은 절망적인 확률을 뚫고 태어난데다 개조까지 받은, 신형 모델이다. 케시크에서 파생된 모델이긴 하지만 별개의 모델이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닮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빠르며, 누구보다도 앞서 나가서, 그 누구도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수 있는.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여기서 제가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도, 자격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재밌지 않나.”
“예?”
“멸망 전에는 우리가 이런 걸 해볼 수 있었겠나.”
칸의 대꾸에 케시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건 그렇다. 조금 전, 칸이 그녀를 안내했던 와디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들은 전쟁 기계였다. 멸망 전의 세상이 그녀들에게 바란 것은 전쟁의 부품으로서 기능하는 것 뿐, 그 이상의 것은 요구하지도 베풀지도 않았다. 전쟁 소모품인 자신이,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자신이, 전쟁과는 무관한 오아시스에서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 멸망 전에는 생경한 일이었으리라. 갑자기 복잡한 심경이 된 그녀에게 칸이 재차 말을 이었다.
“케시크, 네가 맨 처음 나와 만났을 때 내가 뭐라고 했지?”
“네?”
“‘너는 병사다. 대국을 볼 필요는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조금은 풀죽을 만한 이야기였다. 결국, 자기 가치란 일개 사병에 불과하단 거....
“그건, 네가 일개 초라한 병사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
고개를 쳐드는 케시크에게, 칸이 한 발짝 더 다가갔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오아시스의 수면을 응시하며.
“너는 내가 아니다. 너는 칸이 아니다. 나처럼 되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다.”
아니, 필요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게 칸이 그녀에게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그녀는, 지난 시대 아래 망가져버린 잔해니까.
멸망 전의 세상은 잔혹했다. 인간들은 오만에 빠졌고, 탐욕스러웠으며, 선민사상과 우월에 무들었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분노하고 증오했다. 죄악이 죄악을 낳고 폭력이 폭력을 덮었으며 경멸과 혐오가 뒤섞였다. 빈부격차와 갈등이, 착취와 반발이, 파괴와 퇴폐가 이어졌다. 인류 문명은, 꼬이고 꼬인 문제의 매듭을 풀지 못해 갈 때까지 갔다.
칸은, 아니, 케시크였던 그녀는, 그, 한계에 이를대로 이른 인류 문명의 끝자락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오만과 탐욕의 딸이요 분노와 증오의 결과물이자 인류가 죄악을 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태어났고.....
.....또한 그 시대의 무게 아래 으스러져 버렸다. 짓밟히고 으깨졌다. 바스라지고 짓부수어졌다. 그러고 나서, 오직, 잔해만이 남았다.
‘그래도, 나는 행운아지’
그렇게, 잔해만 남은 것이라도 행운이라고 자조할 수 있을 만큼, 칸과 함께했던 다른 모든 이들은 그 잔인한 시대의 무게 아래, 가차없는 시간의 칼날 아래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모순과 불의가 가득했던, 경련하는 시체와 같던 인류문명과 함께.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이제 흩어졌다.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 마냥.
지금은 새로운 세계다. 케시크는, 그녀는, 칸처럼 ‘망가질’ 필요가 없다. 부스러진 잔해가 될 필요가 없다.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니, 진실로, 칸은 보고 싶었다. 고백하자면, 그녀가 케시크의 상태가 신경쓰여, 따로 사령관과 상담까지 한 것은, 단순히 케시크가 걱정되어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아니, 나였던 것은.’
그, 죄악과 폭력과 불의로 얼룩진 시대를 거치지 않았더라면. 그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그 모든 것이 흩어져 무로 돌아가버린, 지금의 시대라면, 그 때의 그 얼타던 아이는,
‘...다른 길을 갈 수 있었을까.’
알고 싶었다. 바이오로이드는 물론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에 따라 몸과 마음이 조율되어 세상에 나선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 멸망 후의, 세상에서는, 바이오로이드들에게도 여지가 있다. 완벽하진 않아도 자유가 있다. 그리고 유일한 인간인 사령관은 그걸 막지 않는다. 그러니, 알고 싶었다. 아니, 보고 싶었다. 새로운 시대 앞에서,
케시크가 다르게 성장하기를.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를.
케시크는 케시크다. 칸이 아니다. 닮은 구석은 있을지 몰라도, 같지도 않고 같을 수도 없으며 같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자신과 같은 ‘망가져버린 잔해’가 된다니, 그러고 싶어한다니, 아니 될 말이다.
“저어...대장님?”
상념에 빠진 칸은 케시크의 부름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직도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한 바이오로이드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그 옛날, 말라붙은 와디 아래서 오들오들 떨던 자신을 닮은 아이가.
그녀와는, 다른 길을 달릴 수 있는 아이가.
그러니 말해주어야 한다.
“케시크, 너는 이미 잘 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전...”
“너는 1차 연합전쟁 시절, 케시크였던 나보다 빠르다. 그 시절의 나보다 얼타지도 않지. 물자 보급과 분배를 실수하지도 않고.”
“.....”
“너는, 그 때의 나보다 낫다.”
케시크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어떻게 감히 대장님보다....”
“너는 칸이 아니라고 했다.”
“.....”
“칸이 할 일을 네가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칸의 능력도 역할도 네 것이 아니다.”
그러니 말한 거다. 칸인 그녀와 케시크인 그녀는 다르다고. 또한 그러니 말한 거다. 케시크인 그녀가 케시크였던 그녀보다 낫다고.
지금도, 계속, 계속 나아지고 있는 그녀가.
“케시크는 케시크로서 할 일을 해라.”
그리고 케시크와 칸이 달려가야 할 길이 다르다면,
“나를 뒤따르지 마라. 너의 길을 달려라.”
그렇다면 케시크가 칸의 뒤꽁무니를 쫒느라 애쓸 필요가 없다.
아니, 사실은 처음부터 아무도 그녀 앞을 달리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케시크가 칸이 아닌 케시크인 이상, 그녀는 따라가야 할 존재란 게 없다. 그녀는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그녀는 자기 삶의 최선두요 또 최후미에 서 있다.
그저, 멈춰있지만 않으면 된다. 그거면 된다. 그거면.
그러니, 초조해하지 말기를.
그저, 앞으로 나아가고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오로지, 차근차근히, 느리더라도 확실하게, 자신만의 걸음을 옮기기를.
“그게 내 바램이다만.”
“.....”
자신의 지휘관기, 그리고 과거에는 그녀와 같았던 자. 담담한 칸의 말에 케시크는 답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가만히, 칸을 따라 오아시스의 푸른 물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칸도 입을 다물고 그저 이, 오아시스의 여유를 천천히 음미했다. 어차피 할 말은 다 했고, 케시크의 반박이나 소감을 기다린 건 아니었으므로.
“어어이! 너희들! 언제까지 거기서 폼 잡고 있을 것이냐! 이몸의 특제 문어찜이 식는단 말이다!”
오아시스 저편에서, 여전히 사령관과의 단둘의 시간을 빼앗겨 뾰루퉁한 게 분명한, 골타리온의 투박한 음성이 울러펴졌다.
읏차, 하고, 칸이 여전히 말이 없는 케시크를 돌아보며 기지개를 켰다.
“골타리온이 부르는군. 저녁식사가 준비된 모양이다. 가자.”
<계속: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26222 >
-----
0. 출처에 대한 이야기
삽입된 곡은 보아(BOA)의 아틀란티스 소녀입니다. 보아의 노래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죠. 이번 편의 분위기와 잘 맞으면 좋겠군요.
1. 본편에 대한 이야기
- 골타리온과 (페레그리누스와 알프레드까지) 사령관이 신나게 덕질하며 잘 놀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번 골타리온 외전 편을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 사령관이 일중독자라는 것 역시 공식 설정으로, 지난 이벤트...어...제가 제대로 기억하나 모르겠는데 기억의 방주 이벤트에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일하려고 해킹까지 할 정도로....
- 병사가 어쩌고 대국이 어쩌고 한 이야기는 실제 이벤트에서 칸이 한 말입니다.
제가 요즘에 딴 걸 하고 있어서 글이 많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과 추천은 고마운 응원이 되어요.
....그래도 그림은 그려주세요
사실 저도 그래요. 대학원생 생활 하다보면 자존감이 바닥을 치죠 ㅎㅎㅎ 그래도, 주눅들지 마시고, 부디 회복되시어 자신감을 되찾으셨으면 합니다.
그것도 스마조 작가팀이 써먹을 소재라고 생각해요. 과연 케시크는 스승이자 아버지 포지션인 칸의 뒤를 따라 갈 것인가(닮아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을 것인가. 칸이 완벽에 가까운 캐릭터인 만큼 어느 쪽이든 좋지요.
케시크가 주눅들고 있는 걸 보면, 뭔가 이제까지의 제가 떠오릅니다. 전 케시크보다 더 주눅들었지만요(웃음)
사실 저도 그래요. 대학원생 생활 하다보면 자존감이 바닥을 치죠 ㅎㅎㅎ 그래도, 주눅들지 마시고, 부디 회복되시어 자신감을 되찾으셨으면 합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페스나 에미야 시로와 아처 생각나네요. 망가진 미래라는 점에서. https://bbs.ruliweb.com/mobile/board/184992/read/122880 서약 대사 비교를 해보면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은만큼, 케시크는 여러모로 칸답게 바뀌기는 하는거같습니다ㅎㅎ 이러다 연적이 되버릴지도...?
그것도 스마조 작가팀이 써먹을 소재라고 생각해요. 과연 케시크는 스승이자 아버지 포지션인 칸의 뒤를 따라 갈 것인가(닮아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을 것인가. 칸이 완벽에 가까운 캐릭터인 만큼 어느 쪽이든 좋지요.
너의 길을 달려라 호드다운 문장이면서 짦으면서도 강렬한 멘트군요
음 좋은 표현 건졌다고 생각합니다(뿌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