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GS] 판타지안 네오 디멘션, 아버지가 직접 만든 뉴트로 클래식 ‘파판’
살짝 고색창연해도 ‘전설의~’란 표현은 듣는 이를 가슴 뛰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전설의 검, 전설의 나라, 전설의 게임 개발자 등등. 비교적 젊은 산업인 비디오 게임계서 감히 전설이란 칭호를 붙여 마땅한 인물이 하나 있다면 그건 사카구치 히로노부 아닐까. 초대 ‘파이널 판타지’부터 6편까지 사령탑으로서 JRPG의 상징이자 대표격 시리즈를 창조했으니. 물론 키타세 요시노리와 노무라 테츠야, 요시다 나오키 같은 후대 개발자들의 기여도 무시할 수 없겠으나 ‘파이널 판타지’의 원점은 역시 사카구치P다.
하지만 제아무리 명망 높은 인물이라도 늘 홀로서기에 성공하는 건 아니더라. 잠시 머릿속을 스치는 이름들이 있을 텐데, 독립에 관해선 사카구치P가 그보다 선배다. 영화 ‘더 스피릿 위딘’의 실패를 책임지고 스퀘어에닉스서 물러난 게 20년도 더 전이니까. 이후 설립한 미스트워커도 나름 괜찮은 게임을 내놨으나 ‘파이널 판타지’ 아버지의 이름값에는 미치지 못했다. 결국 스스로 옛 대표작을 넘어서지 못한 채 흘러간 전설이 되어가던 그가 은퇴에 앞서 마지막이란 각오로 전력한 결과가 2021년 ‘판타지안’이다.
[인터뷰] ‘파이널 판타지’ 아버지의 졸업 여행, 판타지안 네오 디멘션
'파이널 판타지'의 아버지, 사카구치 히로노부의 신작 '판타지안'
스퀘어에닉스와 함께 완전판 '네오 디멘션'을 오는 12월 5일 출시한다
‘파판’ 아버지의 은퇴작, 더 넓은 플랫폼으로
디오라마 특유의 심미성이 고스란히 담긴 그래픽, 준수한 스토리와 나름대로 클래식 JRPG의 단점을 해결하려 한 디멘션 시스템, 거장 우에마츠 노부오가 작곡한 OST까지. 확실히 ‘판타지안’은 미스트워커 설립 이래 사카구치P가 관여한 게임 중 최고라 하겠다. 실제로 당시 메타크리틱 및 앱스토어 평가도 나무랄 데 없었다. 문제는 접근성이 썩 좋다고 보기 어려운 애플 아케이드 독점 배포였던지라. 스퀘어에닉스 자체 시장 조사에 따르면 애플 왕국 일본서조차 ‘판타지안’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고.
이에 여느 애플 아케이드 출시작과 마찬가지로 ‘판타지안’ 역시 독점 계약이 종료됨과 함께 새로운 둥지를 찾아 떠났다. 여기서 사카구치P의 제안을 통해 친정 회사인 스퀘어에닉스가 합류, PC 및 거치형 콘솔에 맞춰 다듬은 완전판이 바로 ‘판타지안 네오 디멘션’이다. 애플 아케이드서 출시 후 진행된 업데이트가 모두 반영됨은 물론 신규 콘텐츠도 넣었고, 우치다 유우마와 스와 아야카 등 인기 성우진의 풀 보이스 및 4K 해상도를 지원한다. 다만 가장 중요한 걸 빼먹었으니 아쉽게도 공식 한국어화는 지원치 않는다.
애플 아니었으면 나오지도 못했겠지만, 또 거기에 발목 잡히기도 한 셈
'네오 디멘션'은 특유의 디오라마 비주얼을 4K로 감상할 수 있게 됐다
당초 애플 아케이드 독점, 즉 모바일 게임이었으니 그래픽이 우려스러울지 모르겠다. ‘판타지안’의 특징적인 비주얼은 우선 디오라마를 제작한 뒤 360° 촬영해 게임에 적용하는 식이다. 따라서 실제 촬영 결과는 굉장히 고품질이나 모바일 용량에 맞춰 되려 해상도를 떨어뜨렸다. 용량이나 사양이 훨씬 여유로운 PC 및 거치형 콘솔서 디오라마 본연의 아름다움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터. 3D 모델링 쪽은 그보다 좀 아쉬울 수 있는데, 대다수 장면이 원경으로 보이므로 컷신 줌인 때 외에는 거슬릴 일이 없다.
게임 자체는 클래식 JRPG에 살짝 현대적인 조정이 이루어진 느낌. 메인 스토리를 좇아 이 지역서 저 지역으로 옮겨 다니며 점차 거대한 사건에 휘말린다. 필드 역시 샛길로 빠지면 보물상자나 하나쯤 놓였을 뿐인 선형 구조다. 대신 상당히 아기자기하고 흥미로운 서브 퀘스트가 많더라. 몇몇 캐릭터와 콘텐츠가 대놓고 ‘파이널 판타지’를 연상시키는데, 사카구치P가 관여치 않은 7편 이후-7편까진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지만- 요소까지 보인다. 그걸 또 스퀘어에닉스가 유통하게 됐으니 참 재미있는 노릇이다.
클래식 JRPG다운 선형 구조로 진행된다, 샛길에 보물상자나 놓아둔 정도
대놓고 '파이널 판타지'스러운 요소가 보이는 건 역시 아버지의 특권일까
에이밍과 디멘션, 클래식 JRPG를 넘어서 가라
‘판타지안’ 전투는 최대 3인이 동시 출전하며 화면 좌측 텐션 게이지에 따라 차례가 돌아오는 일종의 ATB(Active Time Battle) 방식을 택했다. 파티 총원은 그 배 이상인 8인이라 싸우는 도중에 교체도 가능하다. 특기할 점은 스킬 대부분이 원형 또는 선형 범위의 논타겟팅 발동이란 것. 즉 대충 500원 동전만 한 원형 범위 스킬을 쓸 때 적 두셋이 맞을지, 너덧이 맞을지는 본인이 잘 겨냥하기 나름이다. 선형 범위 스킬은 한술 더 떠서 아날로그 스틱을 기울여 발동 경로가 마치 활처럼 휘도록 조절할 수 있다.
막 자리를 옮겨 다니며 싸우지 않지만 매번 적 배치가 조금씩 다르고 사이사이 죽어 나가며 직선 공격의 효율이 떨어지기도 하니까. 커브볼마냥 얼마나 각을 줘야 최대한 많이 맞출지 날카롭게 겨냥하는 것. 그래서 이른바 에이밍 시스템으로 부른다. 사실 이건 애플 아케이드 시절, 스크린 터치의 손맛과 전략성을 결부시키려 한 기획이라 명백히 컨트롤러에 최적화된 조작은 아니다. 아날로그 스틱으로도 되긴 된다는 정도. 사카구치P 왈, PC로 즐길 거라면 컨트롤러 물리지 말고 마우스로 하는 편이 더 재미있다고.
여덟 명 중 셋이 출전하여 텐션을 통한 일종의 ATB 시스템으로 싸운다
대다수 스킬이 원형 혹은 선형 범위로 발동하므로 겨냥(Aiming)이 핵심
다음으로 본작의 부제이기도 한 디멘션 시스템은 필드서 조우하는 적들을 최대 30체까지 모아다 단숨에 소탕하는 편의 기능이다. 소탕이라 해봐야 몰아서 처치할 뿐이지만 앞서 소개한 에이밍 시스템 특성상 적들이 몰리면 몰릴수록 유리하기 때문. 거기다 전장에 무작위 형성되는 버프 아이콘을 부숴 일시적인 능력치 상승이나 추가 행동의 기회를 누린다. 즉 똑같은 적 30체라도 디멘션 배틀로 쓸어버리는 쪽이 여러모로 손쉽다. 대신(?) 전장이 웬 구정물 넘쳐흐른 모양새라 원한다면 시스템 자체를 꺼버릴 수 있다.
이들 두 시스템 모두 사카구치P 본인의 장기인 클래식 JRPG를 보완하려는 시도다. 먼저 에이밍 시스템은 접근 방식이 스크린 터치일 뿐 기저에 깔린 문제의식은 턴제 전투가 너무 정적이라 지루하다는 거다. 디멘션 시스템 역시 겨우 몇 걸음 뗄 때마다 적들이 고개를 디미는 심볼 인카운터의 피로감을 줄여보자는 취지고. 적당히 왕년 대표작과 비슷하게 꾸며낸 추억팔이 같아도 ‘과거에 이랬다면 좋았을 텐데’란 거장의 고뇌가 제대로 담겨있다. 디오라마 또한… 아니, 그건 애플 돈으로 덕질한 게 맞는 듯하다.
심볼 인카운터의 피로감을 해소하고자 기획된 디멘션 시스템, 일종의 리볼빙
최신 게임이지만 예스럽고, 그러면서도 새로운 시도가 보이는 독특함이란
JRPG 팬이라면 한 번쯤 경험할 가치가 있다
근래 인디신의 도드라진 경향 중 하나가 뉴트로(New+Retro)다. 개발자기 앞서 게이머라면 누구나 소싯적 신세를 진 고전 명작에 마음의 빚이 있기 마련이니. 혹자는 추억에 압도되어 그저 그런 카피캣으로 남고 다른 누구는 재해석이 지나쳐 사도 취급을 받는다. 필자에게 ‘판타지안’은 꼭 사카구치P가 손수 제작한 클래식 ‘파이널 판타지’의 뉴트로 버전처럼 느껴진다. 에이밍이든 디멘션이든 뭘 가져다 붙여도 못내 구년묵이스러운 거야 어쩌겠나. 대신 그 취향이 맞을 경우 이만한 뉴트로 JRPG가 달리 없을 터다.
누군가 ‘파이널 판타지’의, JRPG의 미래를 묻는다면 ‘파이널 판타지 16’이나 ‘파이널 판타지 7 리버스’가 답이 될 터다. 그러나 거기에 흔하디 흔한 액션 게임으로 퇴락했다며 불만을 표하는 올드팬도 존재한다. ‘판타지안’은 클래식 JRPG의 정체성을 지키며 다음 세대로 나아가고픈 거장의 야심 찬 도전이다. 물론 결과가 아주 성공적이었다면 지금쯤 애플 아케이드 구독자가 훨씬 많았겠지만. 어쨌든 한때 JRPG에 빠져 살았고 여전히 흠모하는 뭇 게이머에게 한 번쯤 플레이를 추천하는 작품임은 분명하다.
요컨대 초기 '파이널 판타지'풍 뉴트로 게임, 그런데 원작자가 직접 만든
클래식 JRPG, 특히 '파이널 판타지' 초기작을 좋아했다면 필히 즐겨야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