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 AAA급 콘솔 무협 액션의 로망은 실현될까, 팬텀 블레이드 제로
사람은 누구나 초능력에 대한 로망을 품기 마련이고 그걸 실현하는 쉽고도 즐거운 방법이 게임이다. ‘마블 스파이더맨’ 덕분에 우리가 뉴욕 마천루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보는 것 아니겠나. 어디 아메리칸 슈퍼 히어로뿐일까. 인법으로 신출귀몰 활개치는 닌자, 각종 절기와 경공에 정통한 무협 고수도 현실 기준에선 다 초능력자다. 그래서 요즘 세대가 MCU에 열광하듯 소싯적 극장가는 무협 영화로 뜨거웠고 책 대여점도 판타지 대신 무협지가 빼곡했다.
그런데 어째 게임만은 유독 무협 콘텐츠를 접하기가 힘들다. 간혹 있더라도 거의 중국 내수에 그치지 않나. 필자가 중국발 신작 가운데 유독 ‘검은 신화: 오공’, ‘연운십육성’ 그리고 ‘팬텀 블레이드 제로(影之刃零, 영지인령)’를 기대하는 까닭도 결국 그 소재 때문이다. 이제껏 다른 게임서 느껴보지 못한 본고장 무협을 구현했을 듯해서. 특히 ‘팬텀 블레이드 제로는 작년 PS 쇼케이스서 그야말로 무협 로망이 무엇인가 제대로 보여주며 좌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작년 PS 쇼케이스 이후 기대작으로 급부상한 '팬텀 블레이드 제로'
당나라 ‘서유기’를 원전으로 삼는 ‘검은 신화: 오공’이나 오대십국 배경인 ‘연운십육성’과 달리 본작은 팬텀 월드라는 가상의 세계관을 내세웠다. ‘절대쌍교’, ‘유성호접검’, ‘천애명월도’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작가 고룡으로부터 크게 영향 받았다고. 이래 봬도 RPG 메이커로 만든 ‘혈우’를 시작으로 나름 유서가 깊은 ‘영지인’ 시리즈의 최신작이다. 먼저 나온 모바일 ARPG ‘팬텀 블레이드: 익스큐셔너’는 국내 앱마켓에 올라와 있으니 흥미가 동한다면 내려 받아보자.
본작의 부제가 ‘제로’라 프리퀄이지 싶지만 아쉽게도 스토리 관련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어쨌든 주인공 혼(魂)이 크나큰 궁지에 몰렸고 홀로 악전고투를 벌이는 상황임은 분명하다. 시연이 시작되면 어둑한 골짜기서 살수들과 맞서는데, 그 와중에 자연스레 기본적인 전투 시스템을 알려준다. 듀얼센스 기준, 방향키 버튼으로 무기를 교체하고 □와 △ 연계로 콤보 액션을 펼친다. □>△>△나 □>□>△>△ 같은 식으로 무기에 따라 콤보 구성, 속도, 사거리가 달라진다.
두 버튼의 조합으로 콤보가 달라지는 대중적인 액션 메커니즘을 따랐다
원거리 무기인 활과 타이거 캐논은 콤보가 없는 대신 한껏 힘을 모아서 쏠 수 있다. 활은 단일 대상에 대한 피해량이 크고 타이거 캐논은 범위 공격이 장점일 듯한데, 아무래도 시연 환경상 엄밀히 비교하긴 어려웠다. 후술하겠으나 보스전이 먼저 자세를 무너뜨려 딜타임을 버는 구조라 원거리 무기만으로 진행하는 기행은 불가능하다. 앞서 대표 인터뷰서 30종 넘는 무기가 존재한다고 호언했으니 또 모르는 일이지만. 현재로서 견제 정도의 쓸모로 보인다.
칼을 휘두르고 대포를 쏠 때마다 스태미나의 일종인 살기(Sha-Chi)가 감소한다. 단순한 기술 자원이 아니라 공격 당하면 깎이고 바닥날 경우 무방비에 처하는 중요한 수치다. ‘세키로’를 안다면 그냥 체간이라 여겨도 좋다. 잡졸이야 대충 베어버려도 그만이나 보스전은 사실상 살기를 깎느냐 마느냐 싸움이다. 수세에 몰려 살기가 사라진 적은 근접하여 참(斬)할 수 있다. 적과 아군 모두에게 적용되는 시스템이므로 우선 자기 자신의 살기부터 잘 관리하자.
결국 스태미나의 일종인 살기 깎기 싸움, 겹쳐 보이는 작품이 몇 있을 터
기본 방어는 L1 꾹- 누르면 되고 R1 + 방향키로 살짝 피할 수 있다. 여기서 큰 공격에 대응하는 방법이 둘로 나뉘는데, 먼저 묵직한 브루탈 무브는 푸른빛이 번뜩거릴 때 L1으로 쳐낸다. 패리가 성공하면 그 즉시 고스탭(Ghostep)을 통해 적 배후를 잡는 게 가능하다. 반면 날카로운 킬러 무브는 막아봐야 뚫리니 붉은빛이 번뜩거릴 때 R1으로 회피한다. 성공 시 마찬가지로 고스탭을 이어가는 흐름. 요컨대 푸른빛 → 쳐내기와 붉은빛 → 피하기, 이것도 낯익은 방식이다.
물론 소위 ‘더러운’ 보스를 구현하는 데 꼭 복잡한 전투 시스템이 수반되진 않는다. 간단명료한 공방만으로 창졸간 육두문자가 튀어나오게 만드는 게임도 적잖다. 트레일러서 남다른 존재감을 뽐낸 황싱(Huangxing)이 대저 그러한데, 방패이자 철퇴를 도저히 예측하기 힘든 궤도와 속도로 날린다. 어찌저찌 근접하더라도 추 운동의 박자가 영 제멋대로고. 계속 싸우다 보니 멀리서 철퇴로 내려찍는 패턴이 킬러 무브라 회피 후 재빨리 고스탭으로 붙는 게 정석인 듯했다.
환불 수문장 등극이 유력한 황싱(Huangxing, the Sunken Pillar of Kunlun)
만약 추 운동 탓에 난감하더라도 몇 대쯤 맞으며 감 잡을 여유는 있다. 철퇴 한 방에 머리가 바스러질 정도까진 아니다. 인터뷰서 량 치웨이 대표가 답했듯 ‘팬텀 블레이드 제로’는 여러 웰메이드 액션 게임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그 가운데 당연히 프롬 소프트웨어 작품도 들어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울라이크를 자처하진 않는다. 적의 일격이 얼마나 아픈가, 유효한 대응 수단은 충분한가 등 제반 조건에 따라 같은 패턴의 보스라도 난이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법이다.
맛보기에 불과한 시연임을 감안해야겠으나 일단 ‘팬텀 블레이드 제로’의 첫인상은 기대보다 평범하다. 적과 나의 살기를 확인하며 쇄도하다 패턴 신호에 맞춰 적절히 막고 쳐내고 회피하는 공방은 퍽 익숙하다. 그 와중에 딱히 어려운 조작 없이도 현란한 무협 영화의 한 장면이 펼쳐지는 건 칭찬할 만하지만. 공세든 수세든 날쌔고 호쾌한 비무는 확실히 여느 중세 판타지 게임과 차별화된 눈요기를 선사한다. 감상을 정리하면 분명 준수한 만듦새다. 충분히 잘 만들었는데…
트레일러에 멋진 장면이 많은데, 너무 심심한 구간을 시연하는 건 아닌가 싶고
그런데 왜 이렇게 아쉬운 마음이 들까. 작년 PS 쇼케이스 영상을 돌이켜보라. 뭔가 다르다. 살수 여럿이 덤벼들자 칼은 좌로, 다리는 우로 뻗으며 번개처럼 반격하는 장면은 어떻게 재현할까. 폭주하는 수레 위에서 기병들과 칼부림 벌이는 장면은? 몇몇은 아직 해금되지 않은 스킬일 테고 일부 컷신도 섞였을 터다. 보스전에서 경공으로 벽을 타며 허를 찌르는 구간은 실제로 가보면 기둥에 X 버튼이 뜬다. 아예 거짓도 아닌데 그렇다고 썩 개운치 못한 연출이다.
사실 영화나 게임을 홍보할 때 최대한 하이라이트가 응집된 영상으로 화제몰이에 나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저 PS 쇼케이스서 영화 같은 연출을 과시하다 시연은 또 초반의 민낯을 가감 없이 보여주니 괴리감이 들 수밖에. 너무 치솟아버린 기대를 잠시 내려놓고 평하자면 ‘팬텀 블레이드 제로’는 여전히 AAA급 콘솔 무협 게임이란 로망에 가장 가까운 작품이다. 당장 올해 출시되진 않을 모양이니 모쪼록 비장의 절기 두어 개쯤 더 갈고 닦길 바란다.
플레이를 정하고 무협을 씌우는 게 아니라, 무협을 위한 플레이를 고안해야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