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컴 딜리버런스(이하 킹덤컴)은 믿을 수 없게도 인디 게임인 모양이다. 나는 광고에 돈을 바른 메이저 게임을 주로 즐기는 얄팍한 게이머라 물정에 어두워, 인디 게임의 개념에 대해서도 이 게임의 상세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글화된 기념으로 PSN 게임 리스트에 이 게임이 돌연 등록되었을 때에도 나는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내가 이 게임을 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스카이림 이후로 쓸만한 중세 배경 오픈 월드 RPG가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실은 이 게임 완전판의 부제가 로열 에디션이었기 때문이다. 제작진에게 무척 무례한 접근이었을 텐데, 어쨌든 나는 이 게임을 구매했다. 그리고 이후 1년 넘게 간접적으로나마 킹덤컴을 홍보하고 있었으므로, 내 조촐한 영업을 통해 킹덤컴을 구매한 사람이 감히 확신할 수는 없겠으나 한 명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걸로 좀 봐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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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유럽 권왕 쿠네쉬 라 하면 감히 모르는 자가 없었다
인디 게임이라고는 믿기 힘든 미려한 그래픽으로 표현된 킹덤컴의 세계는 15세기 유럽의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므로 용도 마법도 허락하지 않는다. 주인공 헨리는 대장장이의 아들로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중세 잉여 인간이다. 매일 동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일은 하지 않고 글자를 모르며 (이 시대에는 영주조차 문맹인 경우가 더러 있다) 떠돌이에게 홀려 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헨리가 아버지의 심부름을 받으며 게임이 시작된다. 그리고 마을에서 은거하고 있는 권왕拳王 쿠네쉬를 만난다. 만취 상태에서도 헨리의 잽을 마지막 까지 보고 피하는 일촌간파는 물론이고 서브 미션과 초근접 박투에도 능한 인간 흉기! 어째서 이런 촌구석에서 썩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초인적인 싸움꾼! 권왕과 손을 섞은 플레이어의 멘탈은 빠르게 바스러질 뿐이니 피투성이가 된 헨리는 어머니에게 달려가고 플레이어는 출혈 시 붕대를 감는 법에 대해 배우게 된다. 모르면 맞아야지 어쩔 테냐.
그렇게 헨리는 많은 것을 배운다. 맥주는 차갑게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아버지에게서 시간 제한 퀘스트를, 주정뱅이 권왕에게서 주먹질하는 법을, 떠돌이 용병에게서 검의 기초를 배운다. 이에 더해 흥정하는 법, 못된 친구들과 나쁜 짓 하는 법, 심지어 저장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인생의 쓴 맛에 대해 알게 되는 과정에서 말을 타는 방법, 배가 고플 때에는 밥을 먹어야 하며 졸릴 땐 자야 하는데 이 때에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당연한 예절도 배운다. 과연 자잘하고 농밀해 불편할 지경이다.
킹덤컴의 세계가 편집증적으로 중세를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중세 초원과 농장, 숲, 마을. 서민들의 생활. 나는 킹덤컴을 통해 중세의 퇴폐적인 목욕 문화, 대장장이와 사냥꾼의 역할, 성직자들의 부폐와 되다 만 종교관, 마녀의 발생과 이단심문관의 숭고한 임무, 그리고 중세 사람들의 부조리하고 혹독한 삶에 대해 배웠다. 심지어 나는 이 게임을 통해 중세 수도원 생활을 통달하였다. 나는 중세에 떨어지더라도 결코 수도원에 가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게임이 불편하고 어렵다는 이야기다. 고난과 봉사에 익숙한 기독교인이 아니면 견뎌내기 힘들 것이니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주기도문을 외워 신앙심을 닦아두길 바란다. 요약하자면 완전 미친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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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저 닭 대가리를 고소하고 말 것이다
헨리가 태동하는 시기, 보헤미아 왕국의 프라하는 전쟁 중이라 전역에 도적이 들끓고 고삐 풀린 용병들이 날뛰고 있으니 홀로 여행하는 것이 여의치 않다. 도적 한 명을 쓰러뜨리는 것도 쉽지 않고 두 명과 상대하면 낭패감을 느끼게 되며 셋과 겨루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화면 중앙에 표시되는 조준점은 활을 장착하는 순간 사라지므로 시위는 오로지 감으로 놓아야 하므로 수십 발을 쏴도 토끼 한 마리를 잡기 어렵다. 레벨이 낮은 초보자 시절 활을 쏘면 활줄이 팔을 때리기 때문에 오히려 타격을 입는 혹독함이 의아하다. 밤에 횃불을 들고 다니지 않으면 경비병이 수상하게 여기며 그들의 경고를 무시하면 벌금을 내거나 감옥에 갇힌다. 거 참 더러워서 살 수가 없다. 먹고 사는 것이 지극히 어렵다. 그러므로 게임은 자연스럽게 도둑질을 종용하지만 소매치기도 열쇠 따기도 만만치 않다. 은신은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기절도 시킬 수 있으나 중세 사람들은 게임을 하지 않고 책도 읽지 않아 다들 매의 눈을 가지고 있으므로 들키지 않고 일을 도모하는 일에 많은 수고가 들어간다. 모든 것이 어렵다.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지 않으면 안된다. 초반에는 살아남는 것만 생각해도 벅찬 까닭이다. 헨리는 종일 약초를 채집하기도 한다. 무릎을 굽혀 풀을 뜯는 행위는 근력 운동이므로 힘을 키울 수 있을 뿐더러, 순서에 맞게 다려 탕약을 만들면 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헨리는 또한 대자연을 뛰어다니며 건강을 가꿀 수 있으니 곧 상한 음식도 소화시킬 수 있게 된다. 여행 중 산길에서 용병이나 도적이 경비병과 싸우고 있는 걸 발견하면 만용을 부려서는 안된다. 즉시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몸을 숨겨 어느 한 쪽이 죽어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맞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 찬스가 온다. 예로부터 시체의 소지품은 귀중한 자금원이다. 헨리는 곧 피에 젖은 부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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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물질적...인 걸 위해 싸우고 싶습니다."
배가 부르고 등도 따시고 빚까지 갚고서 홀가분해진 사내는 곧 입신양명을 꿈꾸기 마련이다. 귀족을 섬기고 검에 통달해야 하는 것이다. 믿을 수 없게도 헨리는 불세출의 천재였던 모양이다. 기사대장의 오의를 10분 만에 깨우쳐 완벽 방어와 달인의 반격기를 배운 것이다. 그렇다. 이야기 도입부에서 저 불신자 쿠만놈들로부터 도망쳐야 했던 것도, 도적들에게 힘도 못쓰고 아버지의 검을 빼앗겼던 것도 내가 검술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 있게 도적에게 도전하면 이제는 검술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도 새롭다. 그리고 나는 저 무지랭이 도적이 달인의 반격기를 나보다 더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개뿔 천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도적놈이 동료를 부르니 순식간에 도적놈들이 된다. 정면 승부로는 이길 수 없다. 그러나 헨리의 무기는 장검 뿐만이 아니다. 밤을 기다려 도둑놈들이 느슨해져 있을 때 잠입할 수 있다면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숨어서 몰래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지는 늘 좋은 오픈 월드 RPG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곤 했다. 그리고 킹덤컴은 좋은 오픈 월드 RPG임에 틀림없다. 시스템은 헨리가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헨리는 빗속에서 발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이며, 정찰견이 헨리를 발견하더라도 울지 않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하여 사특한 살인자는 도적 한 놈 한 놈의 멱을 차례대로 딸 수도 있고, 그럼에도 적이 너무 많아 부담되면 식사나 포도주에 독을 탈 수도 있다. 이 때 맹독을 섞을 수 있다면 효과가 더욱 좋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피에 절은 생활을 겪고 나면 곧 헨리는 살인마가 된다. 다대일 싸움을 일대일 싸움으로 유도하는 방법을 습득하기 시작하면 그 어렵던 전투가 꿈결 같이 즐거워 진다. 생각보다 적의 공격 양식이 단순하다는 점을 인지하면 이야기가 빨라진다. 실질적으로 대규모 전투에서 비롯되는 대부분의 위기는 뒤로 물러서기만 해도 해소된다. 적은 적극적으로 헨리를 둘러싸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격 타이밍은 잡기 어렵지만 방어는 수월하다. 그 사이 틈이 보이면 한번 씩 쑤셔주기만 해도 어떻게든 버텨나갈 수 있다. 처음 지옥처럼 어려웠던 걸 상기한다면 생각보다 쉽게 대규모 전투에 익숙해질 수 있다. 걱정할 것 없다. 이십 시간만 대충 삽질하면 된다.
이 긴장감,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킹덤컴은 태생적으로 느긋한 게임이기 때문에 이 정도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전투적 긴장감이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것은 감히 예측하기 힘든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일인칭 시점이고 등 뒤는 보이지 않아 무작정 뒤로 후퇴하면 얼마 안 가 나무에 막히거나 개울에 빠지거나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한 방만 잘 못 맞아도 사방에서 뚝배기를 후리기 때문에 시점이 널뛰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다. 킹덤컴에서 든든한 방어막 역할을 하는 스태미너가 다 떨어진 뒤 공격을 허용하면 생명력과 스태미너의 총량이 함께 떨어지므로 점점 약해진다.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큰일이다. 전투 중에는 물약을 마실 수 없고 붕대도 감을 수 없으니 피도 잘 멈추지 않는다. 헨리는 강제적으로 등 뒤에 무엇이 있을지 신경을 곤두세운 채 욕심을 부리지 않고 조심스레 공격하는 법을 익힌다. 치명적인 공격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10분 이상을 싸워야 한다면 누구나 움직임에 조심스러워지는 법이다.
헨리가 성장하고 싸움에 익숙해질 수록 적들의 장비도 출중해지는 것이 또한 게임적으로는 자연스럽지만 불합리하다. 한낱 도둑놈들이 한 벌에 억은 넘을 것 같은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나오는데 과연 감당하기 어렵다. 헨리와는 달리 적들은 완벽 방어에서 달인의 일격을 매끄럽게 연결하기 때문에 그 와중에 불리하다. 결과적으로 전투가 마지막까지 무척 살 떨리고 두렵고 긴장된다. 설마 서양 RPG의 근접전에서 감탄하게 될 줄이야. 서양 RPG 제작사는 이런 놈들이 아니었다. 스카이림도 위쳐3도 전투가 장점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킹덤컴은 다르다. 명백히 전투가 장점인 게임이다. 페인트로 적의 방어를 무너뜨려 뚝배기를 깰 수도 있고, 드러난 얼굴을 찔러 일격사를 노릴 수도 있다. 한글화 버그로 컴보 매뉴얼이 사라지는 어려움을 극복하면 남 부럽지 않은 연속 공격을 펼칠 수도 있다.
닭 하나 못 잡던 청년이 이렇게 컸습니다
그리고 나는 1인칭 시점이 주는 박력에 대해 언급해야만 한다. 킹덤컴이 강요하는 1인칭 시점의 불편함은 플레이어를 과몰입시키는 양념과도 같다. 고즈넉한 숲을 거닐며 뛰놀고 있는 토끼와 매복중인 인간을 사냥하고 있노라면 과연 좁은 시야가 초래하는 그 모든 불편함이 계산된 장치이므로, 이 게임에는 3인칭 시점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활을 들면 사라지는 조준점 문제도 마찬가지다. 처음에야 분노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고개를 세로 저을 수 밖에 없다. 적이 반응하기 전에 화살을 박아 넣을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 전투가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화살 만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숙달하고 나면 조준점이 없는 혹독함이 과연 킹덤컴 답다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미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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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빨이 자못 눈부시니 과연 아가리에 성령이 임한 듯 하다
수려한 서양 RPG에서 서브 퀘스트는 전투 이상으로 아름다운 꽃이니 이는 킹덤컴에서도 그렇다. 여러가지 결말이 준비되어 있는 양질의 퀘스트가 즐비한데, 이 퀘스트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게임이 제공하는 넉넉한 자유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암살자로 의심되는 자의 뒤를 끈기 있게 밟아 진실을 밝힐 수도 있고, 그 놈이 혼자 있을 때 아무도 모르게 죽여버릴 수도 있다. 암살자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알고서도 방치하면 퀘스트를 실패하게 되는 만듦새는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공정하다. 헨리는 사회에 불만 밖에 없는 못난 친구들에게 동조해 마음에 안드는 이웃집 벽에 똥을 바를 수 있고 그 친구들을 교수대에 메달아 버릴 수도 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퀘스트에 투신했지만 헨리가 그 과정에서 죽이는 자가 꼭 악인이란 법은 없다. 문제 될 것도 없다. 헨리가 조금 강아지가 될 뿐이다.
여러분 행운을 빕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이 뿐만이 아니다. 킹덤컴의 NPC는 특정 장소의 위치를 설명할 때 장황하게 느껴질 정도로 정성들여 묘사한다. 장소를 탐색함에 있어서 킹덤컴은 스카이림과는 달리 퀘스트 마커를 핀포인트로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NPC의 설명이 무척 중요하며, NPC의 설명을 잘 떠올리면 길을 찾는 시간이 대폭 단축되는 식이다. 스크린 샷을 찍어두거나 메모를 해두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데, 이 오소독스함이 아주 신비롭다. 예를 들어 채석장과 습지대를 따라 걸어 개울을 찾는 것이다. 잘 찾았다면 그 NPC가 개울가에서 넘어지며 떨어뜨렸다던 모자를 습득할 수 있으리라. 그 곳에서 산길과 만나는 곳에 버려진 정착지가 여럿 있는데, 보물은 그중 하나에 숨겨져 있다. 정착지는 사람이 다니는 길로 연결되어 있으니, 이는 흐릿하지만 구분할 수 있다. 끈기를 가지고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 정착지에서 비밀 임무로 여행 중이었던 에이전트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는 식이다. 훌륭한 구성이다.
결과적으로 킹덤컴은 퀘스트 마커 없이 게임을 진행할 수 있는 귀중한 게임으로 완성되어 있다. 횃불을 깜빡한 헨리는 밤에 숲에서 길을 잃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니기에 자연스럽게 발생한 오솔길을 찾아 이를 따라가면 마을이 나온다는 생활 속의 지혜를 모르고 있다면 헨리는 이대로 굶어 죽을 수도 있다. 숨을 쉬는 것처럼 장엄한 오픈 월드 RPG를 제작해내는 베데스다조차 이런 구성을 시도하지 못했다. AAA 게임 특유의 어른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인디 게임으로써 넉넉하게 투자금을 확보한 킹덤컴이 아니고서야 시도할 수 없었던 구성인 셈이다. 오래된 전설적인 서양 RPG들은 다들 이런 식이었을까? 나로써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킹덤컴이 특이하고 비범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살인자의 눈이다. 그야 그럴 수 밖에
이 모든 과정이 즐거운 것은 죄인 헨리가 타고난 지옥의 혓바닥 덕분이기도 하다. 술을 쳐먹고 제 정신이 아닐 때 성직자를 압도하는 입담. 평생을 사기꾼으로 살아온 거짓 선지자조차 뒷걸음치는 무구하고 공포스러운 악의 성정. 약자에게 위협, 강자에게 재롱. 수 틀리면 거리낌없이 무력을 사용하는 유연한 대응. 헨리는 참지 않는다. 달변도 완력도 세계 수준이다. 속이고 빼앗는다. 평민도 귀족도 기분 나쁘면 죽인다. 게임이 비행을 종용한다. 퀘스트가 재미있을 밖에 없다. 비인간적 행위는 늘 흥분되기 때문이다. 나는 선량한 사람이지만 게임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나를 아무도 비난할 수 없다.
이처럼 킹덤컴의 매력에 빠지고 나면 킹덤컴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을 긍정하게 된다. 심지어 이 게임에는 긍정적인 캐릭터가 많다. 게임이 혹독하기에 캐릭터까지 혹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헨리의 절친은 뇌가 없는 대신 귀족답지 않아 친근하고, 헨리의 무례함을 교수형으로 되돌려 주지 않으므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착한 놈이다. 어른들은 믿음직하고 헨리를 진심으로 아끼며 그들과 어깨를 함께 하는 것만으로 어벤져스의 일원이 된 것 같다. 어쨌든 이 게임에서 으뜸가는 ㅆㅂ놈은 단연 헨리로, 헨리가 다른 캐릭터에게 모진 일을 당하는 일은 별로 없으니 안심하고 개차반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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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쳐 테레사! 헨리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남자가 아니야!
물론 킹덤컴은 완벽하지 않다. 태생적으로 인디 게임이기에 AAA 게임 수준의 퀄리티 콘트롤은 가능하지 않았던 탓이다. 나와는 크게 상관이 없지만 발매 초기 무수한 버그로 고통 받았던 플레이어를 위해 우선 기도를 하고 시작하도록 한다. 완벽해 보이던 전투 시스템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적의 반격기가 너무도 매서워 어설픈 연속 공격이 독이 된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정확한 타이밍과 방향 조작을 요구하기에 컴보를 쓰는 것 자체가 어려운 편인데 쓸모까지 없는 것이다. 공략을 보지 않는 플레이어가 킹덤컴의 전투를 전부 익히기 위해서는 모르긴 해도 백시간은 걸릴 것이다. 상찬을 받아 마땅한 서브 퀘스트. 이를 풀어나가는 자유도가 높고 예기치 못한 결말이 플레이어를 미소짓게 하지만, 메인 시나리오에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스킬은 쓸모없는 게 절반이다. 조작감이 무겁고 시점 판정이 미묘해 약초를 캐기 어렵다. 적이 전혀 대응하지 못하는 마상 전투의 완성도가 미묘하다. 요구하는 사양이 높아 기껏 준비해둔 미려한 그래픽을 누리기 어렵다. 최소한 PS5로 플레이하는 편이 좋다. 그렇다. 대수로운 단점들이 아니다. 킹덤컴이 최고의 서양 RPG 중 하나인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마지막 단점 만큼은 치명적이다. 이제야 겨우 헨리의 모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찰나에 게임이 끝난다는 점이 그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헨리는 반 강제적으로 여정을 시작하며 처음 목적으로 삼았던 것 중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한다. 생명의 은인의 아내와 간통하는 것도 모자라 사이비 성직자와 주먹질로 친해지고 작당하여 술을 쳐먹고 행정관을 패고 신성모독에 이어 간음의 죄를 지어놓고 여자 친구의 친구와 깊은 사이가 되고 영주의 아들과 절친을 맺고 온갖 삽질과 살인과 약탈을 자제하지 아니하다가 출생의 비밀이 밝혀질 때까지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지만 아무튼 스토리는 조금도 진행되지 않았다. 사람을 아무리 죽여도 헨리의 갈증은 가실 길 없으니 이는 아직 복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게임 표지에 헨리가 감싸 안고 있는 장검이 여전히 그의 손에 없기 때문이다. 제작사 워호스는 당초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펀딩을 받았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반전과 사기에도 불구하고 게임도 스테디 셀러로써 무척 많이 팔렸다. 이제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은 명징하고 한정되어 있다. 조속히 후속작을 발매해야만 한다. 이미 시간을 낭비하여 수많은 팬들의 갈망을 유린하였으므로 그 죄가 커 감히 헤아릴 수 없으니, 워호스는 뉘우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헨리의 이야기를 마무리할 지어다.
아니 이렇게 열심히 쓰신 글에 리플이 없다니.. 잘 봤습니다!
아니 이렇게 열심히 쓰신 글에 리플이 없다니.. 잘 봤습니다!
킹덤컴 만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