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웹툰 칼부림
1618년 음력 4월 21일 누르하치는 요동총병 장승윤이 이끄는 명나라의 추격부대를 상대로 공격을 가하여 승리했다. 해당 전투는 누르하치에게 불리한 요소들이 많았으나 누르하치는 당시 전장에 분 바람을 이용하여 명군의 방어를 돌파했고, 이후 전열이 붕괴된 명군 대부분을 패사시켰다. 해당 전투에서는 명나라의 주장이었던 장승윤은 물론이고 부장이었던 요양부총병 파정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지휘관급이 전사했다.
누르하치는 빛나는 승리를 거둔 이후 노획물을 정리하고 논공행상을 진행한 후 허투 알라로 복귀를 시작했다. 누르하치는 23일 시여리 들판에서 숙영했고 25일에는 톸소 나루에 이르렀다. 톸소 나루는 1593년 음력 9월에 있었던 구국지전 시기에도 누르하치가 출병로로 이용했던 곳이었는데 이번의 누르하치 역시 이 길을 통해 복귀했다. 그 곳에서 자신의 부인들로부터 승전의 축하를 받은 누르하치는 음력 4월 26일에 마침내 허투 알라로 완전히 복귀하였다.1
누르하치는 허투 알라에 도착한 뒤 군법을 어긴 병사들과 지휘관들에 대한 처벌을 행했다. 누르하치는 출정하기 전 군법을 지엄히 세웠고 그를 어기면 처벌을 각오하라고 공지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논공행상은 전장에서 행한 것에 비해 군법 처리는 전투가 끝나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 허투 알라에서 진행한 것은 병사들의 공을 치하하며 한참 사기를 드높일 시기에 처벌까지 함께 진행하면 효과가 반감될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때 함부로 부대를 이탈하여 약탈을 하다가 부대에 피해를 입힌 탓으로 능지형을 당한 인물도 있었으며, 명령을 따르지 않고 미적대다가 상해형을 받은 인물도 있었다. 군법을 어긴 지휘관들은 대부분 전공으로서 얻은 상물을 깎이거나, 직책을 박탈당했다.2
한편 누르하치는 무순과 동주, 마근단 일대에서 포로로 잡은 이들에 대한 처리 역시 단행했다. 그는 포로로 잡힌 1천여호 가량의 한족 백성들을 자신에게 항복한 이영방에게 관리하게 했다. 그러면서 생산활동 및 소득활동에 필요한 가축, 옷, 식량과 이불등을 지급하여 후금에 정착하게 했다.
이는 포로들, 그것도 여진인이 아니라 한족 포로들에 대한 대접 치고는 무척이나 후한 대접이라고 할 수 있었다.3 이러한 후한 대우가 이루어진 까닭은, 인도적 차원을 통해 이루어진 대우라기보다는 그들에게 후한 대우를 함으로서 누르하치 역시 이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을 후하게 대함으로서 누르하치는 선전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후금에 항복한 명나라 백성들에게 후한 대우를 한다면, 향후 명나라에 대한 추가적인 원정을 진행할 시 그러한 기존에 잡힌 포로들에 대한 후금의 후한 대우를 선전함으로서 항복설득의 효과를 더욱 키울 수 있었다.
또한 누르하치는 이들을 후하게 대하여 이들의 충성심을 보장받음으로서 본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새로운 병역 및 노동자원을 확보, 운용할 수 있었다. 후금의 경우 군대의 역량이 강하긴 하나 그 수가 명나라에 비해 제한되고 노동력 역시도 마찬가지로 역량이 제한되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로서 1천여호에 달하는 새로운 백성의 합류는 의미가 깊었다.
비록 그들이 여진인이 아니라 한인이라고는 하나, 그렇다고 병력 및 노동력으로 쓸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의 경우 억지로 세력에 합류한 데다가 근본적으로 그들이 '오랑캐'라고 부르던 나라에 합류하게 된 탓에 초기 불만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누르하치는 이들을 후하게 대하고 한족 관리로 하여금 그들을 관리케 함으로서 이들의 불만을 제거하고 충성심을 도모, 이들의 완전무구한 후금 정착을 꾀하여 국가 기반으로 삼으려 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이들의 경우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처음으로 공격했을 때 누르하치에게 항복한 '역사적인' 첫 사례자들이니만큼 누르하치로서도 본인의 권위를 생각하여 각별히 대우할 필요가 있었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누르하치의 명나라에 대한 승리의 상징이나 다름 없으므로 누르하치로서는 그들이 후금에서 불편함 없이 살도록 확실히 보장함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항복한 군병들 역시도 이영방의 휘하로 배치하여 독립적인 부대로 편성했다. 이렇게 구성된 이영방 휘하 부대의 초기 병력은 대략 1천여명 정도로 판단되는데, 이는 무순에서 항복한 병사들과 동주, 마근단 등지에서 항복한 병사들을 모두 더한 것에 더하여 그 수가 확실히 파악되지 않는 시여리 근교 전투에서의 항복 예상자들을 합산한 수치이다.4
누르하치 역시 후에 조선에 보낸 서한을 통해 해당 군병의 수효가 대략 1천여명쯤 된다고 알리기도 했으므로 이 수치는 대략적으로 실제와 거의 차이가 없을 듯 하다.5이들은 후금의 팔기 조직에는 포함되지 않는 독립 조직으로서 운용되었다. 또한 무순과 동주, 마근단을 공략하면서 얻은 총포 및 시여리 근교 전투에서 노획한 총포를 운용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통해 후금군은 빈약했던 화기전력을 조금이나마 보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의 경우 후한 대접을 보장받긴 하였으나 이들의 최고 관리자이자 지휘관인 이영방을 포함하여 모두가 여진인과 같이 변발을 해야 했다.6 이는 명나라 출신의 한인들이 전쟁에 의해 후금에 편입된 이후 최초로 단행된 변발사례였다.
사진 출처 : 영화 <남한산성> 중의 조선 출신 통역관 정명수/굴마훈. 여기서는 각색에 의해 변발을 하지 않고 상투를 틀었으나, 후금/청에 투항하거나 내속된 이들 대부분은 변발을 해야 했고 정명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 이전에도 물론 누르하치의 휘하에서 일하는 한인들은 모두 변발을 해야 했던 것으로 판단되나, 이렇게 대규모로 편입된 한인들에 대한 일률적인 변발 시행은 최초의 사례였다. 이 이후에도 누르하치는 후금에 편입된 한인들에 대해 그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변발을 적용하여 여진의 풍속을 정착시켰다. 이는 한인들에 대해 누르하치대보다 상대적으로 유화책을 펼쳤던 홍타이지대에도 바뀌지 않는 정책이었으며, 청나라가 입관한 뒤에도 가장 주요한 대한인(對漢人)정책으로 자리잡는 정책이었다.
1.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4월 26일
2.무순 전역 이후의 군법위반자 목록과 처벌에 대해서는 추후 다룸.
3.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4월
4. 『명신종실록』 만력 46년 음력 6월 22일 · 진첩선, 누르하치 : 청제국의 건설자, 홍순도 역, 돌베게, 2015, 188쪽. · 마크 C 엘리엇, 만주족의 청제국, 이훈·김선민 역, 2009, 137쪽등
5.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중초본 광해군 10년 음력 5월 29일
6.. 조선왕조실록 위와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