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레일과의 관련성 추측 - 지식의 역함수를 중심으로
스타레일을 플레이하지 않더라도 이미 많은 분들이 스타레일 내에 원신의 바람의 날개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이스터 에그일 가능성도 있겠으나, 호요버스 게임들이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만큼 원신 세계 역시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하기도 합니다.
우주정거장 헤르타 내부에 장식된 바람의 날개
그렇다면 원신 세계가 왜 이토록 다른 세계와는 달리 폐쇄적인지 한 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타레일 작중에 등장하는 야릴로-Ⅵ는 본디 여타 문명권과 동등한 수준의 기술력을 갖고 있었으나 맹렬한 외부의 침입으로 인해 멸망의 기로에 선 상태에서 등장하며, 이미 문명 자체가 중세수준까지 퇴보하여 외부 세계와의 연락, 연결 수단을 모두 잃은 상태로 밝혀집니다.
그리고 문명이 퇴보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외부의 침입을 막고자 특수한 힘을 이용하여 행성 전체를 얼려버린 야릴로의 지도층 스스로가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심연의 침입을 막고자 거짓된 하늘로 티바트를 격리시킨 원신 세계의 상황과 유사함을 엿볼 수 있죠.

중세시대를 방불케하는 야릴로의 도시 전경
다만 야릴로는 심연과는 유사하지만, 그렇더라도 심연과는 명백히 구분되는 세력의 침입이 계기였습니다.
반물질 군단으로 불리며 우주 전체를 파멸로 이끌고자 하는, 심연 보다는 심연 '교단' 에 가까운 세력의 침입이었죠.
원신으로 비유하면 이들 역시 심연의 힘을 빌리며 무수한 머릿수로 침입을 시도하기는 하나, 결국은 물리적인 전투력에 기반하는 만큼 이들에 대한 대처는 각 세계에서 적절히 이루어지고 있고, 야릴로와 같은 고립된 세계가 아닌 이상에야 세계 그 자체의 존망을 흔들 정도의 위협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결국 야릴로는 주인공 세력의 활약으로 외부 세계와 또 다시 연결되고, 비록 문명 격차로 인해 극복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 같이 남았으나 당장의 생존 위협을 뿌리치는데에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원신과 매우 유사한 세계관으로 언급되는 엠포리어스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이 시사됩니다.
다만 저는 앰포리어스와 원신 세계관의 공통점 보다는, 우주 전체를 파멸로 이끄는 세력들이 숭배하는 파멸의 신, 나누크의 주목을 받고있는 기계장치의 신 아이언툼과, 아이언툼이 만들어내는 '지식의 역함수'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합니다.

아이언툼
앰포리어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어떤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우주를 흔들기 위한 목적으로 거대한 시뮬레이터를 이용하여 문명을 무수히 만들고 리셋을 반복하는 일종의 가상 실험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매드 사이언티스트는 지금의 우주가 정해진 범위 내에서만의 발전을 허용하는 점에 답답함을 느끼고, 그같은 한계를 설정하는 지식의 신을 지배하에 두기 위한 수단으로 신을 제어 할 장치, 아이언툼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을 지배수단으로 두기 위한 대규모의 시뮬레이션은 여러 신들의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중 하나는 당연하게도 파멸의 신 나누크이며, 아이언툼은 미완성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나누크의 사도(좀 강력한 추종자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로 인정받게 됩니다.
아이언툼은 앞서 언급한 지식의 역함수를 이용하여 모든 문명을 파멸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식의 역함수란, 해당 문명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되돌리는 힘으로서, 그 작동원리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무기물과 유기물을 가리지 않고 감염시켜 파멸로 이끄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유기물에 한하여, 그 감염 정도가 낮을 때에는 이를 예방하는 백신이 효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는 지금까지 아이언툼의 복제판을 이용하여 그 위력을 실험하고 있었지만,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아이언툼은 완성형이 이르렀고 이는 전우주 규모의 전쟁이 시작되는 발단을 제공하게 됩니다. 지식의 역함수에 대항하기 위하여 주민의 대피, 백신의 개발, 그리고 아이언툼의 타도를 모든 세력들이 협력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스타레일 작중에서도 유일무이한 대규모의 작전이 시작되고, 결국 성공에 이르릅니다.
이미 지식의 역함수의 영향권에 들어선 은하계들
지식의 역함수를 돌이켜보면, 심연의 힘과 유사한 점이 많아 보입니다.
심연 역시 무기물과 유기물을 가리지 않고 영향을 미치며, 감염된 이는 폭력적인 성향을 띄며 이를 제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매드 사이언티스트는 아이언툼이 완성되기 이전부터 우주 각지에서 그 힘을 시험하고 있었던 만큼, 원신 세계는 이러한 위협에 직면한 하나의 세계이며, 이에 대항하고자 티바트를 외부 우주와 격리시켰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강림자인 주인공이 심연을 정화시킬 수 있는 까닭은 바로 백신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식의 역함수에 대항하는 백신은 그 감염 정도가 경미한 상태에 한하여 피해를 완전히 막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원신의 주인공 또한 심연의 침식 정도가 심하지 않은 상대에 한하여 그 정도를 완화시킬 수 있다는 표현은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어쩌면, 주인공 남매의 여행 목적 자체가, 단순한 모험이 아닌 각 성계를 돌아다니며 심연/지식의 역함수 감염 상황을 파악하는 것에 있지 않나 싶기도 하군요.
위를 전제한다면 아스모데이가 말하는 '오만' 이 어떠한 뜻인지 명확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원신 세계가 심연의 침식을 막고자 외부 세계와 고립을 시켜왔던 자신들의 노력을 무시하고 단순히 과학력/백신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생각은 충분히 오만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실제 주인공 남매가 그리 생각하였는가는 차치하고).
알기 쉬운 비유를 들자면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만연한 시대에, 어느 개발도상국에서 마땅한 방역 정책이 전무하여 쇄국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 어느 외국인이 '나는 백신 맞았다. 너네도 맞춰줄게' 하면서 쇄국을 무시하고 나돌아다니면 미움받을만도 하지요.
백신을 맞는 바바라와 의료진들
어쩌면 좀 더 파고들면 종교적/제국주의적인 배경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백신을 개발한 스타레일의 '스타피스 컴퍼니' 는 사실상 유일무이한 전우주적 기업이며, 그 위상은 현실의 UN을 넘어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스타피스 컴퍼니는 보존의 신 클리포트를 숭상하고 있으며, 애초에 스타피스 컴퍼니 자체가 보존의 신에게 각 세계를 지키기 위한 물리적 자재를 헌납하는 조직에서 출발하였다고 합니다(다만 클리포트는 이 자재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스타피스 컴퍼니는 어디까지나 기업인 만큼, 보존의 신을 숭상하는 것과는 별개로 상당히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장 앞서 언급한 야릴로는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되찾음과 동시에 오랜시간 누적된 스타피스 컴퍼니의 천문학적인 빚의 상환을 요구받게되고, 행성 그 자체가 노예로 전락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주인공 세력이 중재에 들어가게 됩니다. 야릴로외에도, 여러 세계에서 스타피스 컴퍼니는 마찰을 빚고 있으며 개별 등장인물을 제외하고 기업 자체는 결코 선역으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스타피스 컴퍼니는 자신들이 숭배하는 보존의 신, 클리포트를 심리적인 방패로 각 성계를 위협하는 선교사/교회와 비슷한 측면을 갖습니다.즉, 위상으로는 제국주의 시절 영국과 비슷한 것인데요, 물론 이들이 결코 클리포트 숭배를 강요하지는 않으나, 이들의 신념(=오만)이 보존의 정신에서 비롯된 만큼, 그리고 이들의 영향권에 들어선 약소 성계 주민들은 출세를 위해 스타피스 컴퍼니에 입사할 수 밖에 없는 만큼 제국주의 시절 선교사와 빼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스타피스 컴퍼니의 사례를 고려해보면, 아스모데이를 위시한 네 그림자들은, 단순히 여행자 남매가 오만하다는 점을 거슬려한 것이 아닌, 심연의 위협을 뿌리친 그 뒤의 정치적 상황까지 고려한 것이 아닐까 싶군요.
비록 심연을 박멸하더라도 중세 수준의 기술력에 머물러 있는 원신 세계가 외부 세계와의 연결을 갖는 순간, 스타피스 컴퍼니 같은 거대 세력의 노예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약간 메타적인 설명을 하자면, 아편전쟁으로 열강들에게 꿇어야만 했던 중국의 역사관이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스타레일에서는 이것을 확실히 엿볼 수 있는데, 중국을 본딴 지역 선주에서는 스타피스 컴퍼니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전통을 잃어버린 지역(선주 요청)이나, 무역권을 둘러싸고 다툼이 이어지는 지역(선주 나부)등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은 원신에서도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죠.

선주 나부를 뒤흔든(?) 스타피스 컴퍼니의 책임자, 스코트
원신 세계가 시뮬레이션 세계인지, 아니면 물리적인 존재를 갖는 세계인지는 아직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전자에 더 가까워보이기는 합니다만, 호요버스 세계관에서 시뮬레이션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이미 등장했기 때문에 사실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기도 합니다. 따라서 원신 세계가 어떤 형태이건, 외부의 침식을 막고자 격리를 유지하는 상황 자체는 '비교적 일반적' 인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죠.
다만 심연의 위협을 모두 쫒아낸 그 이후에도 과연 이러한 격리가 계속될지 어떨지는, 보다 게임 내부의 정치적인 이슈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인단이 획책하는 한겨울 계획은 과연 무엇이며, 여행자 남매가 숨기고 있는 진정한 목적은 대체 무엇이며, 집정관들이 원신 세계를 수호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앞으로도 스토리에 주목할 필요성을 느끼는 바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