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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데레주의)
“듀후훗~ 오늘도 천국이구나~.”
아그네스 디지털은 늘상 그러했듯, 수풀의 그림자에 숨어 쌍안경으로 터프의 우마무스메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거친 콧김과 거세게 펄럭이는 귀, 붉게 상기된 볼과 음흉하게 비틀어진 입꼬리. 모르는 사람이 봤다가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당해 연행될 법한 모양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의 기행은 트레센 내에서 너무도 유명했던 탓에, 그러한 불명예스러운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최소한 그 행동에 악의가 없고, 스스로 정해둔 일선만큼은 절대로 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생리적인 혐오감 탓에 멀찍이 돌아가는 우마무스메들도 종종 있었지만, 디지털에게 있어서는 그런 경멸조차 포상이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그네스 디지털 양, 안녕하세요?”
그런 디지털에게 밤색 생머리를 가진 우마무스메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우효옷?! 이거이거, 그래스 원더 양 아니십니까! 먼저 말을 걸어주시다니 이토록 감격스러울 데가!”
그 주인공은 그래스 원더. 온화하고 조신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터프 위에서만은 불꽃 같은 투지를 숨김없이 드러내며 폭풍처럼 내달리는 강자다. 예상치 못한 반가운 만남에 디지털의 귀가 쫑긋인다.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은 선호하지 않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시나리오 작성을 의뢰하고 싶어요.”
“...호오?”
그래스 원더가 그리 요청하자,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던 디지털의 표정이 순간 표변한다.
“일전에 나이스 네이쳐 선배가 디지털 양에게 ‘시나리오’를 받았다는 소식이… 우마무스메들 사이에 꽤나 유명하거든요. 이제는 거의 공공연한 비밀수준이죠.
네이쳐 선배와 담당 트레이너 님이 그 시나리오대로 뾰이를 하다가 테이블 여럿을 박살냈다는 이야기와, 그 이후로 더없이 돈독해졌다는 이야기도 함께 말이에요.”
그래스 원더가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마침 좋을 때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렇잖아도 망상이 폭주해 손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거든요.”
디지털은 그래스의 미소 속에 담긴 기대감을 알아차렸다. 나이스 네이쳐가 그러했듯, 자신의 시나리오를 통해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새기고 싶은 것이겠지.
“그래스 원더 양의 이상을, 제가 완벽하게 써내려 보이죠.”
디지털이 품 안에서 두꺼운 안경을 하나 꺼내 쓰니, 렌즈가 햇빛을 반사하며 눈부신 광채를 만들어낸다. 그녀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본 그래스 역시 따라 미소지었다.
“자, 그럼 제 아지트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이에요.”
“후후, 믿음직스럽네요. 기대되는걸요.”
두 사람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자리를 떴다. 기대감에 즐겁게 흔들리는 두 개의 꼬리가 작은 산들바람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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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0분이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디지털이 집필 활동을 하는 아지트에 도착해 마주앉았다.
“그건 그렇고, 제게 시나리오 의뢰를 하시다니 예상 외인걸요. 그래스 원더 양과 그 트레이너 님 사이에 깨가 쏟아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말이죠.”
디지털이 낡은 타자기를 꺼내 세팅하며 물었다.
“후후… 부끄럽지만, 트레이너 님께 차마 드러내지 못한 낯부끄러운 취향도 어느정도는 있는지라.”
그래스가 한손으로 입을 가리고 가벼운 웃음을 흘린다.
“흐음, 시나리오를 방패로 삼아 은밀한 욕망을 해방한다는 건가요. 딱히 특이한 일은 아니죠. 긴말할 것 없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디지털이 손목과 손가락을 가볍게 스트레칭한 뒤 타자기 위에 얹었다.
“우선… 제 트레이너 님이 바람을 피다가 제게 들통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음음, 그렇군요. 왕도적인 도입부죠.”
타닥, 타닥, 하는 타자기 소리가 창고의 벽면에 반향하며 울려퍼진다.
“분노한 제가 외도의 대가로 트레이너 님을 마구 뾰이하는 거에요.”
“징벌뾰이인가요. 그 주제로 이미 20편은 써 보았으니 퀄리티는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징벌뾰이라 함은 마치 국밥과도 같이 무난하고 대중적인 테이스트의 장르. 흔한 취향이니만큼 디지털의 집필 경험도 많다.
“그리고… 조금 더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아하, 역시 여기서 끝일리가 없죠! 뭐든 말씀해 주세요!”
하지만 무난하다는 것은 덜 흥미롭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디지털이 그래스의 요청을 기쁘게 반긴 것은 그래서였다.
“트레이너 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 흔적을 남기고 싶어요. 아주 깊고 진하게. 도저히 떨쳐낼 수 없을 정도로.”
그래스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고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수많은 이상성욕을 마주하며 단련한 디지털마저 순간 전율할 정도의 기백이었다.
“...흔적을 남긴다 하심은, 어떤 방식으로?”
하지만 디지털은 마음 속에 떠오른 동요를 능숙하게 숨겼다. 섣불리 그러한 감정을 드러냈다간, 상대가 애써 드러낸 욕망을 감춰버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다행히도 그래스는 디지털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했다.
“흐음, 글쎄요. 선택지가 많아서 오히려 선택하기 힘드네요.
몸 곳곳을 힘껏 깨물어 잇자국을 내고도 싶고, 손톱으로 할퀴어 아파하게 만들고도 싶어요. 꼬집어 진한 멍자국을 남기거나… 제 체모로 엮은 실로 문신을 새기는 것도 좋겠죠.”
그래스는 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이리저리 골몰하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었다.
“...!!”
이번만큼은 디지털마저도 의연하게 넘기지 못했다. 디지털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몸이 잘게 떨린다. 디지털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양 손을 의식적으로 한 번 꽉 쥐었다가 폈다.
“…하지만, 이번은 어디까지나 ‘놀이’니까요. 트레이너 님을 아프게 해서는 안되겠죠. 실제로 바람을 피우신 것도 아니고.”
그런 디지털의 반응을 알아챈 것일까. 그래스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니 적당히… 제 체액으로 온몸을 마킹해 향기가 짙게 배도록 하는 정도로 하죠.”
“그, 그렇군요. 그 정도야 뭐….”
디지털은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채찍질하여 집필을 서둘렀다.
“아, 다만 한 가지.”
그런 디지털의 손놀림을 멈춰세우는 그래스.
“시나리오 상의 트레이너 님의 외도 상대는… 실존 인물을 연상시키지 않도록 써주세요.
아무리 허구라는 것을 알아도, 무심코 보복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는 산뜻한 미소와 함께 살벌한 말을 툭 내뱉는다. 디지털의 입꼬리가 파르르 경련하기 시작했다.
“네에…. 물론이지요…. 문제 생길 일 없게 신경쓰겠습니다….”
식은땀 한줄기가 디지털의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린다.
-타닥, 타다닥.
그로부터 한동안,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않았다. 디지털이 바삐 타자기를 두드리는 소리만 조용히 울려퍼질 뿐이었다.
‘그래스 원더 양… 이 정도일 줄이야! 나 따위는 한낱 범부일 뿐이었어!’
디지털은 마음 속으로 그리 되뇌었다. 사실, 상대를 고통스럽게 한다거나 흔적을 새기는 플레이는 딱히 드문 취향이 아니다. 우마무스메들은 기본적으로 히토미미와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의 정복욕과 독점욕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디지털이 공포를 느낀 이유는, 그래스가 그러한 행위를 입에 담으면서 일말의 망설임조차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령 가상의 시나리오라는 것을 알아도, 설령 두 사람만이 간직할 비밀이라 할지라도, 입 밖으로 끄집어내 표현할 때는 아주 조금이나마 꺼려하는 기색을 보여야 정상이다. 그것이 일반적인 사회통념을 크게 거스른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조금 전의 그래스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잔 사먹는 것만큼이나 평온했다. 누군가 그 태도를 지적해도, 되려 무엇이 문제냐고 되물을 정도로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은 그런 그래스의 심리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두려웠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심연이 그녀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눈치챘기 때문이리라.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집필하는데 참고하기 위해서입니다만… 만약 실제로 트레이너 님이 외도를 하시면… 어떻게 하실거죠?”
때문에, 더듬더듬거리며,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척 묻는 것이 디지털로서는 최선이었다.
“으음, 글쎄요…. 아마 날이 잘 선 단도를 쥐어주고 배를 가르라고 하지 않을까요?”
“....”
디지털이 그대로 굳는다. 혹여 자신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은 아닐까? 들춰선 안되는 비밀을 들쑤신 것은 아닐까? 쥐도새도 모르게 [배를 가르세요] 당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후후, 농담이랍니다. 아무리 그래도 트레이너 님을 죽게 하지는 않죠.”
“아… 아핫하… 역시 농담이셨군요….”
그래스는 잔뜩 긴장해 얼어붙은 디지털을 바라보다가, 웃음과 함께 안심시켰다.
“외도 상대라면 무심코 베어버릴지도 모르지만요.”
“....”
디지털이 다시 한 번 얼어붙는다. 그래스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디지털은 그래스의 음성에 담긴 살기에 눈물마저 흘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겁먹으실 필요 없어요. 저라고 아무나 베어버리는 살육광은 아니니까요. 어디까지나, 잘못한 사람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뿐이에요.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는다. 당연한 이야기잖아요?”
그래스가 담담하게 디지털을 안심시킨다. 그녀의 말인즉슨, 선을 넘은 자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뿐 다른 어떠한 목적으로 누군가를 다치거나 죽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래스 양이 이 정도로 미쳐있었을 줄이야…. 의외의 일면이야.’
하지만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런 미친 발언을 하는 모습이 오히려 디지털의 공포를 더욱 부채질했다.
‘대가로 죽인다는 말을 한다는 것부터 이미 정상이 아닌데요…! 절대로 당연하지 않은데요!! 그래스 양의 나기나타에 베여 죽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포상이겠지만!’
그래스의 미친 논리에 반박할 수많은 단어들이 디지털의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하지만 디지털은 사력을 다해 그 모든 이야기를 다시 삼켰다. 말대답을 하는 것이 그래스에게 있어 얼마나 큰 죄인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지금 이곳에서 죽기에는 아직 보지못한 우마무스메들이 많다.
‘시나리오가 마음에 안 든다고 베어버리지는 않으시겠지? 설마 아닐거야. 아니겠지. 아니어야 해….’
디지털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서둘러 집필을 마무리했다.
“흐음, 이런 흐름인가요. 음, 음…. 아! 이 장면 좋네요.”
다행히도, 그래스는 시나리오가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디지털은 마음 속으로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디지털 양. 나중에 뭐라도 답례를 해드려야겠는걸요.”
“아아아아닙니다! 답례라니요! 제가 좋아서 한 걸요! 하하하하하하핫! 살펴가십쇼!”
그래스의 제안에 손사래를 치며, 허리를 90도로 꺾어 그래스를 배웅하는 디지털. 그녀는 그래스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약 10분이 지나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엘 콘도르 파사 양…. 목숨이 서른 개 정도는 되셨던 건가요? 저런 기백을 앞에 두고서 그렇게나 대담한 짓을 할 수 있다니.”
그래스에게 숨쉬듯 장난을 치는 엘 콘도르 파사가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장난으로 보였던 그것은 사실 목숨을 건 투쟁이었던 것이다.
“후우… 하지만, 귀여운 우마무스메짱에게 베여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언젠가 이 세상의 우마무스메들을 충분히 만끽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그래스 원더의 나기나타에 베여 생을 하직하는 것도 퍽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기나타에 베여 죽기 위해 외도를 저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적절한 합의점을 찾아야겠지.
디지털은 타자기에 덮개를 씌운 뒤 창고 문을 잠그고 기숙사로 향했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등허리가 바람에 식어 싸늘한 감촉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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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문서 최적화 말딸 그래스원더
그리고 배를 가르세요 머신보다 미쳐있는 아그네스 디지털
쓰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2편에 사용할 소재는 아닌 것 같지만 어떻게든 되겠죠!
무서운 암컷이다
이 말딸 독점력이 어마무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