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시작과 끝의 프롤로그 (하편)
사회자 : 그럼, 조속 등장해 주십시오. 발명가, 닥터 나카바치입니다! 여러분, 성대한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 드문드문한 소리― 랄까 정말 몇 사람밖에 안 되는 박수와 함께, 나카바치가 나타났다. 회견장 안쪽에 설치된 단상으로 향한다. 벌써부터 상당히 찌푸려진 표정이다. 기분이 안 좋다고 온 몸에서 외치는 듯한 태도였다.
나카바치 : 닥터 나카바치다. 잘 부탁하네. 그럼, 여기에 모인 제군들에게 인류 역사에 남을 세기의 대발명, 타임머신에 대한 이론을 가르쳐 주도록 하지.
마유리 : 타임머신? 저 사람이 만든 거야―?
- 『메탈 우―파』에 이름을 다 쓰고 온 듯한 마유리가, 이제서야 그런 걸 물어보는 것이었다. 나카바치는 마이크를 한 손에 들고 자신 만만한 태도를 내뿜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청중은 나를 포함해 기껏해야 20명 정도다. 방금 전보다 조금 더 늘어났다. 하지만 역시나 기자나 카메라맨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세상 사람들이 가진 닥터 나카바치에 대한 주목도라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괴짜 발명가가 “타임머신을 발명했다”고 발표해 봤자, 세상 사람들은 “무슨 소릴 하는 거냐”면서 비웃을 뿐. 나도 이 남자의 이야기에 흥미는 있었지만 그다지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건 닥터 나카바치가 타임머신의 이론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실망이 되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분노로 바뀌었다.
린타로 : 다아아아악터어어어어!
- 기자 회견 중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린타로 : 바보 같은 소리에도 정도가 있지!
나카바치 : 누구냐, 넌!?
린타로 : 내가 누구인지는 상관없어! 그보다 방금 네가 말한 타임머신 이론은 도대체 뭐야!? 존 티토를 그대로 베낀 거잖아! 네가 그러고도 발명가냐!
나카바치 : 누, 누가 저 남자를 끌어내라.
린타로 : 끌려나가야 하는 건 너야, 닥터! 부끄러운 줄 알아라! 결단코, 넌 발명가라 할 자격이 없어!
나카바치 : 시끄러, 닥쳐라! 건방진 애송이가!
- 그때 뒤에서 내 손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날 끌어내려는 경비원인가 하고서 눈에 힘을 주고 기세 좋게 뒤돌아봤다.
린타로 : 놔, 라… 으응?
??? : ……
- 나하고 같은 나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덤벼들 듯한 싸늘한 눈초리. 정면에서, 겁도 없이 쏘아붙여 오는 그 시선에 난 기가 죽고 말았다. 이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전에, 어디서지…?
린타로 : 아…
- 마키세 크리스다. 만난 적은 없지만 얼굴은 알고 있다. 며칠 전, 내 친구인 통이― 하시다 이타루가 잡지를 보여줬다. 거기 기사에 “천재소녀가 아키바하바라에서 강연”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금년 봄에 불과 17세로 미국 대학을 월반해서 졸업하고, 연구 논문이 무려 미국의 학술 잡지 『사이언스』에 실렸다고 했었다. 기사에 마키세 크리스라고 소개된 천재 소녀. 게재된 사진에 찍혀 있던 얼굴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건방져 보이는 여자였다. 그 사진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불쾌함을 드러낸 얼굴이었던 것이 인상에 남아 있었다. 그런 천재가, 어째서 내게 말을 건 거지?
크리스 : 잠깐 이쪽으로 와 주시겠어요.
- 험악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주위에 재빨리 시선을 향하며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걸어 왔다. 뭐지, 이 태도는. 마키세 크리스가 회장 경비를 하고 있다곤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닥터 나카바치의 관계자일 리도 없다. 그렇다면… 설마…!
린타로 : 네, 네놈은 “기관”의 인간이냐!?
크리스 : 하아?
린타로 : 큭, 설마 여기까지 손을 뻗칠 줄이야… 내가 이런 실수를.
크리스 : 웃기는 소리 말고 잠깐만 와 주세요.
린타로 : ……
- 일단은 닥치고 따르기로 했다. 지금 나는 닥터 나카바치에게 싸움을 걸어서 명백히 주목을 받고 있었다. 랄까, 나카바치가 날 굉장한 기세로 째려보고 있기도 하지만. 나 같은 청년에게 지적을 당해서 분한 거겠지. 어쨌든 더 이상 주목 받는 건 좋지 않다. 난 광기의 매드 사이언티스트. “기관”에게 쫓기는 몸이다. 이대로 있으면 위험한 사태로 빠져들 듯한 예감이 든다. 마유리나 주위 청중을 그런 사태에 말려들게 할 순 없었다. 마키세 크리스는 얌전해진 내 손을 잡아 끌고 회장 밖으로 나왔다.
린타로 : 여기서 내가 무슨 짓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 들킬 거다. 그럼 네놈도 여러 가지로 위험할 텐데.
크리스 : 여러 가지가 뭔가요. 엄하게시리.
- 그러고선 노려봤다. 상당한 박력.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조금도 귀엽지 않았다. 냉혹무비한 미소녀 에이전트인가… 파란의 예감이 들었지만, 왠지 내 마음은 들떠 있었다. 역시 난 혼돈을 좋아하는 모양이군, 쿡쿡쿡.
크리스 : 전 당신한테 듣고 싶은 게 있을 뿐이에요.
린타로 : 거기에 답할 의무는 없다. “기관”의 방식은 알고 있으니까.
크리스 : 그러니까 “기관”이란 게 뭐죠?
- 그 질문은 무시한 채 핸드폰을 꺼내 들어 귀로 가져갔다.
린타로 : 나다. “기관”의 에이전트에게 붙잡혔다. …그래, 마키세 크리스다. 그 여자를 주의해라… 아니, 문제는 없어. 여기선 어떻게든 빠져나가―
크리스 : …..
- 갑자기 크리스는 내 핸드폰을 낚아챘다. 엄청난 손놀림이었다. 너무나도 화려한 기습 공격이었기 때문에 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린타로 : 큭, 무슨 짓이냐!
크리스 : 어라? 이 핸드폰, 전원이 꺼져 있네.
린타로 : ……
크리스 : …누구하고 이야기하고 있던 건가요?
-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다가오자, 나는 황급히 눈을 돌렸다. 이 녀석… 꽤 하는 걸. 내 아이덴티티를 혼란시켜 정신 붕괴를 유도할 셈인가. 정신차려. 난 이 정도로 동요하지 않아!
린타로 : 네, 네놈에게 대답해 줄 의무는 없지만 일단은 가르쳐 주지. 그건 나 이외의 사람이 만지면 자동적으로 전원이 꺼지는 특별한 핸드폰이닷. 후하하하!
- 그런 특별한 걸 가지고 있는 것도 모두 기밀 보호를 위하여. 가로채듯 핸드폰을 되찾은 후, 나는 이마에 난 식은땀을 닦았다. 훗, 큰일 날 뻔 했군.
크리스 : …그래요. 혼잣말이었군요.
린타로 : …윽.
- 이런. 마키세 크리스는 천재소녀라 하는 만큼 간단한 상대가 아니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내게 정신적 동요를 일으키고 있다! 큭, 여기선 일단 전략적 철수를 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어야…! 그때 표정을 굳힌 크리스가 갑자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근접한 거리에서 그 반짝반짝하는 커다른 눈동자가 정면에서 나를 바라본다. 이 얼마나 강한 의지에 가득 차서 빛나는 눈이란 말인가. 나는 무심결에 빤히 바라보고 말았다. 이 정도로 곧바르고 순수한 눈동자를 가진 자가, 정말로 “기관”의 에이전트란 말인가…?
크리스 : 방금 전에 저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건가요?
- …방금 전?
린타로 : 방금 전이라는 건 언제 이야기지?
크리스 : 한 15분쯤 전이요. 회견이 시작되기 전에.
- 이 무슨 바보 같은. 내가 이 녀석하고 만난 건 지금이 처음인데. 15분 전에는 마유리하고 『우―파』의 캡슐 토이 앞에서 법석을 떨고 있었다.
크리스 : 제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죠? 정말로 슬픈 듯한 표정을 하고서.
- 함정인가? 그야말로 지저분한 “기관”의 수법인 것도 같은데. 하지만 이 소녀가 그런 수법을 쓰는 사람인 걸까.
크리스 : 마치 그대로 울어 버릴 것 같이, 정말로 괴로운 것 같았어요. …어째서죠? 제가 전에 당신하고 만난 적이 있나요?
- 마키세 크리스는 농담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지만 난 이 여자의 정체를 알 수 없다. 그래, 얼굴에 속지 마라! 이 녀석은 냉혹무비한 에이전트.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진다…!
크리스 : 그러고 보니 어째서 제 이름을 알고 있는 건가요?
린타로 : 난 뭐든지 다 꿰뚫어 보거든.
- 누가 뭐래도 난 매드 사이언티스트니까.
린타로 : 천재 소녀여. 다음에 만날 땐 서로 적이 되겠구나!
크리스 : 하아…?
린타로 : 작별이다, 후하하하!
- 나는 그 자리에서 180도 유턴을 한 뒤, 상쾌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마키세 크리스가 부르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적이 하는 말을 들을 순 없는 거였다.
린타로 : 기, “기관” 놈들, 저 정도의 에이전트를 보내 올 줄은, 드디어 진심으로 날 상대할 모양이군…!
- 한 번에 4층까지 뛰어내려와서 뒤를 돌아보고, 마키세 크리스가 쫓아오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은 후에 나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고 심호흡을 했다.
린타로 : 하, 하지만, 난 아직 놈들에게 잡힐 순 없어…
-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당초 목적이었던 닥터 나카바치의 회견 내용은 단순히 베낀 것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다. 그런 내게 회장에 돌아갈 의미는, 이미 없다. 얼른 돌아가자. 그게 가장 좋은 선택이다. 거기서 문득,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린 걸 눈치챘다. 음, 그게 뭐였더라 하고 생각해 본다.
린타로 : 칫! 마유리를 놓고 왔군…!
- 걸리적거리는 녀석 같으니.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그 녀석의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방심한 것 같군. 일단 핸드폰으로 전화해 보자. 경우에 따라선 여기로 불러 오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내 핸드폰을 꺼냈다. 전원을 넣는다. 그러자 곧장 착신음이 울렸다.
린타로 : 음…? 메일인가?
- 7/28 12:26. from: sg-epk@jtk93.x29.jp
- 이건 일반적인 메일이 아니라 동영상이 첨부된 무비 메일이다. 보낸 사람은 본 적 없는 주소. 수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동영상을 재생해 본다.
린타로 : …?
- 노이즈 같은 소리와 영상이 계속해서 흘러나올 뿐이었다. 설마 장난질인가? 아니면 마키세 크리스가 하는 무언가의 공격인가? 이 노이즈는 사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괴음파라든가. …아니, 그 여자한테 주소를 가르쳐 준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건 기분 탓이겠지. 생각 없이 재생해 버린 게 멍청했다고 느껴져 혀를 찼다. 그보다 이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무비 메일의 재생을 중단하고, 주소록에서 마유리의 핸드폰을 불러냈다.
린타로 : 큭, 마유리. 어째서 받지 않는 거지.
- 이렇게 된 이상 회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거기서 다시 마키세 크리스하고 마주치면 귀찮아진다.
린타로 : 핫, 설마 마키세 크리스, 마유리를 납치한 건가…! 이 노옴, 그게 “기관”의 수법인가…!
- 마유리를 두고 간다는 선택지는, 내겐 없었다. 과보호라고 생각하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여동생 같은 존재는 놓아 뒤면 멋대로 설렁설렁 어디론가 거 버리고 말 것 같은 위태로움이 있다. 어디론가는 말 그대로, 여기가 아닌 어딘가. 옛날부터 마유리는 그런 구석이 있었다. …내가 호오인 쿄마가 된 것도, 그런 마유리의 “위태로움”이 원인이기도 했다.
린타로 : 돌아갈 수밖에 없나…
- 또다시 8층까지 계단을 올라갈 생각을 하니, 기운이 빠졌다.
- 회장으로 돌아오자, 닥터 나카바치의 회견이 막 끝난 참이었다. 단상에는 아무도 없고, 이미 사이비 발명가는 퇴석한 뒤였다. 20명 정도 있던 청중도 슬슬 돌아갈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마유리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회장 구석에서 혼자서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납치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가까이에 마키세 크리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이건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었다.
린타로 : 큭큭큭, 그 여자, 나한테 겁먹은 건가. 좋아. 오늘은 봐 주도록 하지.
- 이런 식으로 주위를 경계하며 마유리한테로 다가갔다.
린타로 : 마유리, 왜 전화를 받지 않은 거야. 슬슬 돌아가자.
마유리 : 아, 오카린. 『메탈 우―파』가 없어져 버렸어.
- 풀이 죽은 얼굴로 나한테 매달려 왔다.
린타로 : 없어졌다구? 스스로 움직인 건가. 그건 그야말로 판타지로군.
마유리 : 떨어뜨린 것 같아…
- 그런가, 그래서 찾고 있던 건가. 사실 어찌되든 상관 없는 일이다.
린타로 : 안 보인다면 포기해. 또 뽑으면 되는 거지.
마유리 : 뽑힐 리가 없어. 왜냐면 『메탈 우―파』는 옥션 사이트에서 1만엔 가까이 프리미엄이 붙어 있는 걸.
린타로 : 뭐… 라…?
- 그, 그런 가격이, 그 작은 장난감에…?
린타로 : 마유리여, 도대체 어디서 떨어뜨린 거지!?
마유리 : 그걸 모르겠어서 찾고 있는 거야… 그리고 찾는다고 해도 안 팔 거야―
린타로 : 후하하! 그 1만 엔, 이 내가 연구자금으로 써 주겠다.
마유리 : 그러니까 안 판 다니까― 마유시―의 이름도 적어 놨고.
- 이리하여 눈에 불을 켜고 『메탈 우―파』를 찾게 되었다.
마유리 : ㅤㄸㅜㅅ뚜루―♪ 우―파야, 우―파야, 나오세요―
- 마유리가 그런 식으로 불러 보고 있지만, 나올 리가 없다. 참고로 “ㅤㄸㅜㅅ뚜루―♪”라는 건 마유리가 좋아하는 말버릇으로,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한다. 의미는… 들은 적이 없다. 『메탈 우―파』는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라는 건 떨어뜨린 데가 회장 안이 아니라 캡슐 토이가 놓여져 있는 7층 층계참 쪽인 걸까. 아니면 『메탈 우―파』를 주운 인물이 프리미엄 가격이 탐이 나서 가져가 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걸 상상하자 난 분함에 몸을 떨었다.
린타로 : 이런 돈 밖에 흥미가 없는 천박한 놈들. 부끄러운 줄 알아라…!
마유리 : 오카린도 마찬가지면서―
- 큭. 마유리가 딴지를 걸어 올 줄이야.
??? :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린타로 : !?
- 뭐, 뭐지, 지금 그 소리는?
마유리 : 비명… 인가?
- 여간 일이 아냐. 아직 회장에 남아 있는 사람은 사회자나 몇 사람 안 되는 경비원 정도로 손에 꼽을 수 있는 수였다. 회견을 보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가 버렸고, 나하고 마유리를 포함해 반 정도 밖에 안 남았다. 그 모든 사람이 지금 비명을 듣고서 몸을 움츠렸다. 불안해 하며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또한 나 역시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비명을 듣고서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또 무슨 일이…? 좀 전의 폭발 소동에 이어 또다시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마유리가 내 손을 꼭 쥐었다.
린타로 : 마유리, 여기 있어.
- 나는 크게 한 번 숨을 삼키고, 각오를 굳히고 목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 계단 쪽이 아니라 좀 더 안쪽으로 이어지는 통로. 전기는 꺼져 있어서 어두웠다. 그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몸을 숙이고 주위를 경계하며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코너를 돌자 곧바로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통로 안쪽. 무언가가 엎어져 있었다. 누군가가 엎어져 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복장을 본 기억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누구인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린타로 : 힉…
- 마키세 크리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틀림없다. 한 10분 정도 전에 나한테 덤벼들었던 그 건방진 천재 소녀가, 선명할 정도로 새빨간, 피로 된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다. 죽어 있다…
린타로 : 어, 어, 어째서…?
- 정신이 들자 난 덜덜 떨고 있었다. 어쩌지. 도망쳐라. 도망치고 싶어. 쓸데없이 보러 오는 게 아니었어. 이건 정말 기괴해. 상식을 벗어났어. 마키세 크리스는 틀림없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거야. 누구한테―?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회자 : 우, 우와아아…!
- 깜짝 놀라 뒤돌아봤다. 나뿐만이 아니라 몇 사람의 남자들이 날 따라와 있었다. 모두 창백한 얼굴을 하고 크리스의 시체를 보고 있었다.
사회자 : 경찰을 불러!
- 떨리는 목소리로 외친 건, 방금 회견에서 사회를 보던 남자였다. 그 목소리와 함께 모두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그들 뒤를 따랐다. 여기에 남아 있을 이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마키세 크리스에 대한 동정보다도 “도망치고 싶다” “무섭다”라는 감정이 강했다.
- 회장에 돌아오자 마유리가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마유리 : 오카린, 무슨 일이야…?
린타로 : 나, 나가자.
- 마유리의 손을 붙잡고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기로 했다. 계단을 달려 내려가면서, 필사적으로 방금 본 크리스의 시체 모습을 뇌리에서 지워 내려 애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시체보다도, 그녀의 몸 아래에 퍼져 있었던 새빨간 피가 눈에 새겨져서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의 시체라는 걸, 처음 봤다. 다행히 나는 지금까지 육친의 죽음에 마주한 적이 없었으니까. 누군가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도 없었으니까. 시체를 본 건, 처음이고, 공포― 라기보다, 기분이 나빠서 등줄기에 오한이 일었지만, 그 정도의 감상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상의 감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하고 마키세 크리스의 관계는 어차피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린타로 : 하아, 하아…
- 중앙 거리까지 나와서 난 멈춰 섰다. 전속력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와서 숨이 끊어질 듯 괴로웠다.
마유리 : 저기 말야, 무슨 일이 있었어―? 안색이 엄청 나쁜데…
- 마유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현장을 보지 않았으니 그렇겠지. 그렇다곤 해도 숨을 몰아쉬지도 않다니. 이 녀석은 둔해 보여도 실은 운동신경이 좋다니까.
린타로 : 사람이… 죽어 있었어.
마유리 : 어…
- 몇 번 정도 심호흡. 아직 뇌리에 그 피 빛깔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상당히 차분해졌다. 마키세 크리스는 살해당했다. 누가 범인인지는 모른다.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걸 보니 이제 곧 구급차가 오겠지. 그 뒤에 경찰도 몰려와서 여긴 소란스러워질 거다. 하지만 아직은 한 여름의 아키하바라를 걷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모르고 있다. 모두 여느 때나 다름없이 걷고 있었다. 가전제품, 모에, 에로 등을 찾아서 걸어다니고 있었다. 여느 때나 다름없는 아키하바라다. 나는 불현듯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별달리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 그래. 마키세 크리스에 대해 가르쳐 준 통이에게, 방금 내가 본 놀라운 사건을 알려 주자. 그렇게 생각했다.
- 통이
- 나쁜 짓이긴 했다. 난 흥분한 상태였다. 머리에 피가 몰린 상태였을 수도 있다. 그런 사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뒤라 냉정하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인간 따윈 어차피 그러한 것. 그렇게 고상한 존재 따윈 아니다. 그래, 알고 있어. 사실상― 진흙이나 다름없는 더러운 육체로 이루어졌고, 자궁 속에서 썩어가는 정액과도 같은 더러운 정신이 깃든, 그게 인간인 거야. …같이 약간의 감상에 젖으며 핸드폰에 문자를 입력한다.
- 『마키세 크리스가 남자한테 찔린 모양이야. 남자가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위험할 것 같아. 괜찮을까나』
- 범인이 남자인지 어떤진 모른다. 그냥 생각해 보면 여자보다는 남자 쪽이 현실적이지, 라는 느낌이 들었을 뿐, 단순히 내 억측일 뿐이다. 거기에다가 찔려서 죽은 건지 어떤 건지도 상상. 총성도 나지 않았고, 그 정도의 피가 나왔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것뿐이다. 그런 한 편 명확하게 『살해당했다』라고 쓰는 것도 관뒀다. 어째서인지 그 이유는 나 자신도 확실하진 않았다. 구태여 말하자면 쓰는 것으로 그것이 “확정”되어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정도일까나. 무척이나 찔리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별달리 내가 죽인 것도 아닌데 말야. 그런 나 자신의 기묘한 심리 상태를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방금 전에 한 사람의 인간이 죽은 것을 보았으면서도 몇 분 후에는 웃을 수 있다. 이런 나는 잔혹하고 차가운 인간일 걸까. 악마적이며 광기에 물든 매드 사이언티스트한텐 잘 어울리는군. 엄지 손가락을 핸드폰의 보내기 버튼에 가져다 댄다.
- 나는,
- 그 손가락에,
- 가볍게 힘을 주어,
- 메일을 송신했다―
- 그, 직후―
린타로 : ―윽.
- 뭐지, 지금 그 감각은…? 아니, 그런 것보다…!
린타로 : 사라졌다…
- 여름 방학. 정오. 아키하바라. 역에서 도보 1분 거리인 중앙 거리.
- 거기에서―
- 한 순간에―
- 몇 천 명이나 되는 통행인이―
- 내 시야에서―
- 일제히―
- 소실했다.
- 이건 꿈인가? 환상이라도 보고 있는 건가?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라진 거다. 그 순간을 확실히 보았다. 나는 그대로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져서, 무인이 된 아키하바라에서 홀로, 멍하니 서 있었다. 혼란에 빠져 문득 올려다 보자,
- 라디오 회관 빌딩에― 우리가 방금 전까지 있던 8층 근처에― 인공위성이 쳐박혀 있었다.
// 1장 시간 도약의 파라노이아 (1)편에서 계속
잘봤습니다~
제일 하고싶은 게임들 중 하나 근데 카오스헤드 히로인도 나온다는데 누가 나오나요?
잘 보고 갑니다.. 쥔공 뭐하는 친구죠..ㅎㅎ
번역은 제가 하고 있지 않고, 홈페이지의 Ledman님이 해주시고 계십니다. 다시한번 감사(넙쭉) 카오스헤드의 애들은...배경의 TV같은데 스쳐서 나오긴 합니다;
주인공에 대해서는 http://nex32.net/dokuwiki/%EC%BA%90%EB%A6%AD%ED%84%B0:%EC%98%A4%EC%B9%B4%EB%B2%A0_%EB%A6%B0%ED%83%80%EB%A1%9C 홈페이지의 위키에 정리해놓았으니 읽어봐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