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도 신이치가
검은 조직의 마지막 자산까지
털어먹는 부분이 나오는 동영상
쿠도 신이치의
모든 일이 끝난 뒤
그 카리스마 그룹 계열의 건설 계열사 연합이 짓고 있던
친환경 리조트를 위장한
스펙터의 정보 인터셉터 기지 내의
건설 총괄사무소에 모인
일본회의 소속의
스펙터 일본 지부 조직원들이
이르마 분트가 계획한 작전
(벨트리 특급 테러 계획)
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우울한 얼굴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중
누군가가
그들이 있던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짜증나는 눈빛으로
노크도 없이 들어온 몰상식한 놈이 누군가 쳐다보다가
그들 업무를 총괄하는
일본회의의 차석 비서실장이자
스펙터 일본 지부의 3인자인
나카도미 도시로 비서실장인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술잔을 기울이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카도미 실장은
들고 있던 테블릿을
옆의 소파에 던지듯이 놓은 뒤
"....자네들이 적극적으로 추천을 하기는 했어도
찜찜한데....."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모습으로
그들을 돌아보자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바티칸 은행.....과 직속 거래를 하고
바티칸 부동산 사업 부분을 총괄하기도 하는.......
그리고
그....
이탈리아 마피아 대부들조차도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던
그
'신의 은행가' 로 불린 로베르토 칼리가 있었던
이탈리아 암브로시아노 은행을 파산시킨
그...곳 (센터) 과 직접적인 커넥션이 있는
세계 굴지의 부동산 기업이자
유럽 최대의 건설, 농지개발, 부동산 기업인
인터네셔널 이모빌리아제 그룹의
대주주가
직접 이 곳으로 온다는 거야.
그것도
그냥 대주주가 아닌
바로
그 유럽 최고의 명문 가문 중 최고로 알려진
그 슈트라임 가문의 차기 당주라고 할 수 있는......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어둠의 귀족으로 알려진
발...발터 웰프 폰 슈...슈트라임 백작 본인이
직접 이곳으로 온다는 거지.
쉽게 설명하자면
그...유...유럽 왕실을 점령했던
유럽 최고의 명문가문이자
최대의 강력한 왕가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직..직계 혈통 가문이자
현재의 영국 왕실 직계 가문이기도 한
하..하노버
아니
윈저 왕가의 형이기도 하고,
프로이센의 군인 귀족 중에서도
가장 존경받았던........
그 슈트라임 가문이라고.
거기에
명목상이라고는 해도
현제
독일 작센 지방의 대영주인.......
어떻게 보자면
과거 일본 식으로 설명하자면
일본의 화족과 지방의 영주를 합친
진정한 융커 그 자체이기도 하고 말이지.
거기에다가
그 칼...칼 폰 클라우제비츠를 직접 가르친 스승의 가문이자
1,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군의 모든 장군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던
최고의 군사전략가 집..집안이기도 한
우리와는 차원이 틀린
진정한 푸른 피를 가진 귀족 중의 귀족이자
대부호이기도 하지
어떻게 보자면
야쿠자와 그...조직에 관련된 일본회의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카리스마 그룹 계열사인
우리와는 틀리게
진짜 깨끗한 사업가이자
진정한 귀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건실하면서도 존경받는 존재야.
뭐가 걱정인데?"
그 말에
나카도미 실장은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지......
그렇게 고귀한 귀족 중의 귀족이자
깨끗한 사업가가
왜 우리와 거래를 해?"
그 말에
카리스마 그룹 건설 계열사의 좌장을 맡은
이키 스지로
카리스마 건설 회장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부자는 없는 법이지."
그 말에
나카도미 실장은
"지금 그 쪽에서
이 리조트 부근의 낙후 지역과
주변 지역들을 사들이고 있는 거는 알고는 있어?
그것도.....
지주 회사를 이용해서......
딱 봐도
이 리조트 부근의 땅들은
다 쓸모없는 땅들인데
왜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건지.......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
왠지 찜찜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그 말에
이키 스지로 회장은
"어짜피 돈은 돈이야.
다를 바 없어,"
하는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자
나카도미 실장은
뭔가 더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입을 열려고 하다가
곧
당사자가 도착한다는 연락에
고개를 흔들면서
방을 나서고
얼마 뒤
나카도미 실장과
경호원들 앞에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유로콥터 최신 헬기기종인
민수용 타이거 헬기가 착륙한 뒤
그 헬기에서 내리는 인물을 본
나카도미 실장은
어이가 완전히 나간 멍한 얼굴을 했으니......
그 헬기에서 내린 인물은
평소에 입는
파란 양복이 빨간 나비넥타이를 맨 모습이 아닌
진짜 신사만이 입을 수 있는
맞춤 정장
그것도
일본의 긴자나
영국 셰빌로 가의 명품 양복점도 아닌
이탈리아
그것도
교황청의 교황 성하와
추기경
그리고
유럽 최고 귀족가문의 후예들만 게스트로 받아들인다는
이탈리아 아니
유럽 최고 양품점에서
직접 맞춘
검은 정장 차림에
짙은 어두운 색 와이셔츠에
그 정장과 와이셔츠에 잘 어울리는
휴고 보스 계열의
수제 넥타이를 맨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쿠도 신이치와
그를 호위하는 두 사람
그리고
어리둥절한 모습의
후루야 레이와 카자미 형사가 아닌가?
저 검은 정장 차림의 소년이
자신들이 기다리는 손님이었단 말인가 하는
황당한 얼굴로
신이치를 쳐다보던
나카도미 실장은
저 소년이
왠지 모르게
자신들이 속한 조직을 완전히 박살낸
그.....
일본 경찰의 구세주라 불리는
쿠도 신이치라는 고등학생 탐정과 너무 닮았다......
아니
본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곧
독일 아니
유럽의 고위급 귀족가문의 차기 당주이자
대부호가
어떻게 그런 평범한 일본의 고등학생 탐정이겠어?
하는 생각이 뒤이어 들면서
맨 처음 했던
생각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신이치 뒤에 서 있던
후루야 레이, 카자미 유우야 형사의 모습을 본 뒤
공안의
그것도
공안 경찰 최정예 요원들만이 모인다는
치요다 섹션의 최정예급 요원이 경호를 맡은 것을 보니
진짜 아까 전에
그들에게서 들은 대로
본인이 맞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곧바로
자신의 스마트폰에 올라온 내용을 본 뒤
진짜 믿을 수 없다는 모습으로
스마트폰에 올라온
이탈리아의
인터네셔널 이모빌리아레 건축, 농지개발, 부동산 그룹의 대주주 사진과
신이치의 모습을 비교한 뒤
둘이 동일인인 것을 확인하고는
긴가민가 하는
아까 전 과는 틀리게
정중한 모습으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간단히 둘러보시겠습니까?"
라고 정중하게 요청하자
신이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그들은
그 리조트 단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 제국 국기
어기[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장
문장[2]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문장
가문의 문장[3]
언어별 명칭
독일어
Haus Habsburg
기타 언어별 명칭
1. 개요
2. 역사
2.1. 시골의 백작 가문에서 제국의 황실로
2.2. 권토중래
2.3. 최전성기
2.4. 합스부르크 제국의 출범
2.5. 중흥기
2.6. 군주제 폐지 및 제위 박탈
3. 스페인 압스부르고(구 본가)
4. 특기할 사항
4.1. 근친혼에 따른 흥망성쇠
4.2. 가풍
4.3. 근황
5. 기타
5.1. 장례 의식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라틴어) Bella gerant alii, tu felix austria, nube!
(독일어) Kriege führen mögen andere, du, glückliches Österreich, heirate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4]
A.E.I.O.U.[5]
볼드체는 핵심 작위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독일왕 (1273~1292, 1298~1308, 1438~1806)
오스트리아 황제 (1804~1918)
오스트리아 대공 (1453~1918)[6], 오스트리아 공작 (1278~1453)
슈바벤 공작 (1268 ~ 1313)
슈타이어마르크 공작 (1278~1918)
케른텐 공작 (1335~1918)
크라인 공작 (1364~1918)
티롤 백작 (1363~1918)
괴르츠 백작 (1500~1918)
보헤미아의 왕 (1306~1307, 1438~1439, 1453~1457, 1526~1918)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 (1437~1439, 1440~1457, 1526~1918)
스페인의 왕 (1516~1700)
포르투갈의 왕 (1581~1640)
에르데이 공작 및 대공 (1690~1867)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의 왕 (1772~1918)
부코비나 공작 (1775~1918)
달마티아의 왕 (1815~1918)
롬바르디아-베네치아의 왕 (1815~1866)
독일 연방 의장 (1815~1866)
일리리아의 왕 (1816~1849)
멕시코 황제 (1864~1867)
Habsburgkaiser
▲ 1910년에 그려진 합스부르크 및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가 배출한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중부유럽의 패권을 휘어잡았던 가문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세습하면서 근세 유럽의 얼마 안되는 황제 가문으로서 최고의 권위와 영예를 누렸다.[7][8]
합스부르크 황실이 지배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 동맹국으로 참전했다가 패전함으로 인해 제국이 해체되고 본거지인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합스부르크가 지배했던 모든 나라들이 군주제와 귀족제를 폐지함으로써 모든 제위와 왕위를 상실하고 특권이 소멸했지만,[9] 여전히 유럽인의 향수를 자극하는 선망의 명문가이다.
2. 역사[편집]
합스부르크 스위스
가문의 발상지인 스위스 북부 아르가우의 합스부르크 성채
2.1. 시골의 백작 가문에서 제국의 황실로[편집]
지금이야 영세 중립국이지만 당시 스위스는 독립된 구심점을 갖지 못하고, 몇몇 유력 가문들이 세력권을 다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까지만 해도 알프스 산맥 언저리에 웅거하던 시골 귀족 가문이었다.호족 더 정확히 말하자면, 10세기에는 '합스부르크 가'라는 이름 자체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근본도 없는 가문은 아니었으며, 애초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7세기경부터 알자스 일대에 터를 잡으며, 교황을 배출한 적도 있는 대귀족인 에티호넨 가문의 방계 가문이어서 어느 정도 나름의 명예는 있었다.
이 중 브라이스가우 백작 군트람에게 아들 로첼린이 있었다. 1020년경 로첼린의 장남으로, 합스부르크 가의 시조인 라트보트(Radbot)가 오늘날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 하비히츠부르크에 기반을 잡고, 성을 쌓은 이후 백작 노릇을 하면서 비로소 합스부르크 가문이 시작되었다. 이 합스부르크 성(Schloss Habsburg)이 바로 가문명의 유래이다.
정확히 라트보트의 작위명은 클레트가우(Klettgau) 백작이었다. 훗날 그의 손자인 오토가 처음으로 합스부르크 백작을 칭했다.
이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위스 아르가우 주를 벗어나 유럽의 패자로 급부상할 계기가 마련된 것은 13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대공위 시대(1254~1273)였다. 강력한 위세를 지닌 교황이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잇달아 파문을 날려 버리는 상황 속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후사가 끊겨버렸다. 이후 강력한 교황권 및 제후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약 20년간 황제가 선출되지 못하며 대공위 시대의 혼란한 상황이 이어졌다.
대공위 시대가 이어지며 독일의 정세가 혼란해지자 이제는 교황이 제발 누구든 황제가 되어달라고 애걸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나, 선거권을 가진 제후들은 내가 황제를 하기는 싫지만 남의 세력이 커지는 것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타협책으로 일부러 한미한 가문의 가주를 바지사장 삼아 황제로 옹립하려 했는데, 이때 포착된 것이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백작은 루돌프 4세였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내에서 세력이 큰 가문이 아니었기에 황제 가문으로 고려되지 않았다. 하지만 루돌프 1세에겐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대자'라는 배경이 있었다.
황제 선거가 난항을 겪자 마인츠 대주교와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의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3세[10]가 합스부르크 가문을 밀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황제 자리를 생각치도 않았던 루돌프 4세는 자신에게도 기회가 생기자 기민하게 독일 주요 가문들과 재빨리 혼인 동맹을 맺었다. 그 결과 1273년, 루돌프 4세는 독일왕으로 선출되었고,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러 루돌프 1세로 즉위하여 대공위 시대가 종식되었다.
생각지도 않게 아르가우 주의 일개 백작에서 독일왕이 된 루돌프 1세는 주어진 기회를 이용할 줄 아는 야심가였다. 왕위에 오른 루돌프 1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가문의 영지를 적극적으로 확장했다. 협소한 스위스 산골짜기를 벗어나 평야지대로 확장을 모색했던 루돌프 1세에게 포착된 것이 바로 옆동네 오스트리아 공국이었다. 때마침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 공국에서 분리독립한 이래 오스트리아를 통치해왔던 바벤베르크 가문이 단절되어 공위 시대(1243~1278)의 혼란기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제 루돌프 1세는 독일왕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라이벌인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의 오타카르 2세를 찍어눌러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승리하고, 1278년 마침내 오스트리아 공국과 그 형제국인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차지하여 맏아들인 알브레히트에게 주었다.[11]
한편 루돌프 1세가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사이, 1291년 스위스 4개 주가 스위스 동맹을 결성하여 반란(독립 투쟁)을 일으켰다. 결국 1315년 스위스가 독립에 성공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는 오스트리아가 되었다.[12] 그나마 중세에는 스위스 서부의 아르가우나 합스부르크 성 영지, 상속받은 다른 영지들은 루돌프 1세의 사촌들에게 분봉되는데, 여기는 본가하고는 또 다른 길을 걷다가 1400년대 후반쯤에 단절되었다.
2.2. 권토중래[편집]
대공위시대 직후 루돌프 1세와 알브레히트 1세가 제위를 차지했지만 알브레히트 1세가 조카 요한[13]에게 암살당하고 제위를 룩셈부르크 가문이 차지한 이후 14~15세기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유력 가문인 룩셈부르크 가문과 비텔스바흐 가문이 양분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위에서 한동안 배제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그 인근에서의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져가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특한 전략인 결혼 동맹을 통해 점차적으로 세력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다른 유럽 각국도 결혼 동맹을 세력 강화의 기본 전략으로 활용했지만 합스부르크는 특히 그것을 잘 활용한 편에 속한다.
특히 1335년에 케른텐 공국과 크라인 공국[14]이 합스부르크의 직할령으로 반환되면서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다. 기존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에다가 케른텐, 크라인 공국이 더해졌고 1363년에는 티롤 제후백국까지 획득하면서 현대 오스트리아 영토의 근간이 완성되었다.[15]
이로써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비롯한 독일 남동부 일대가 합스부르크의 기반으로 자리잡았다. 이제 합스부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막강한 제후 세력으로 도약했다. 1335년 이후 막시밀리안 1세 때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략 이 상황을 유지했다.
143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보헤미아 국왕 겸 헝가리 국왕이었던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가 대를 잇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황제의 사위였던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가 모든 왕위를 계승하여[16] 1438년 황제위에 오르면서 비로소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알브레히트 2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 제위를 유지한다.[17]
2.3. 최전성기[편집]
16세기 카를 5세(제위: 1519년 ~ 1556년) 대에 마침내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패자로 등극했다.
그 기반을 만든 것은 선황 막시밀리안 1세였다. 막시밀리안 1세는 스스로 최초의 '선출황제'임을 선언하면서 황제 선출에 있어 교황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하였다. 안정된 황권을 바탕으로 막시밀리안 1세는 적극적인 결혼 정책을 펼쳤다.
저지대를 보유하게 된 부르고뉴 공국, 이제 막 레콩키스타를 완수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한 연합 스페인 왕국, 그리고 동유럽에서 헝가리 왕국과 그 동군연합인 크로아티아 왕국, 슐레지엔을 포함한 보헤미아 왕국 등 막대한 영토를 보유한 야기에우워 왕조와의 혼인을 차례로 성사시켰다.
이런 혼인 동맹 후에 합스부르크 가문에 기적 같은 행운이 일어났는데 이들 가문이 모두 대가 끊기면서[18] 그 가문들의 영토를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대로 인수했다.
15세기 중반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다시 차지하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은 쾰른 등의 라인강 유역과 특히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알자스 등지에서 팽창 정책을 펼치던 부르고뉴와 적대적인 관계에 놓였었다. 그러나 부르고뉴 공작이었던 용담공 샤를이 외동딸 마리 드 부르고뉴(Marie de Bourgogne)를 남긴 채 낭시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부르고뉴와 같은 발루아 가문이자 명목상의 종주국이었던 프랑스가 유럽 내에서도 손꼽히게 부유했던 부르고뉴를 향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19]
이로 인해 부친의 급사 이후 부르고뉴의 여공작이 된 마리 드 부르고뉴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부르고뉴를 지켜줄 힘을 가지고 있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과 결혼했다. 이를 통해 프랑스가 그토록 군침을 흘리며 노리던 북해 연안 17주, 특히 플랑드르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을 장악하는 기틀을 닦았다고 평가받는 명군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가 브르타뉴 공국으로 손을 뻗자 브르타뉴 공녀 안과의 정략 결혼을 추진해 다시 발루아 가문의 프랑스에 빅엿을 먹일 시도를 하는 등[20] 서쪽 국경의 판도를 계속 넓혀나갔다.
막시밀리안 1세는 무엇보다도 결혼 동맹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장남 필리프를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의 왕녀 후아나와 결혼시켰고, 딸인 마르가레테는 왕세자 후안과 결혼시키면서 스페인과의 결혼 동맹을 결성하였다. 스페인은 필리프와 후아나의 아들인 카를 5세가 물려받았다.
또 막시밀리안 1세는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야기에우워 왕조와의 껄끄러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오랜시간 공을 들여 결혼 동맹을 성사시켰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348년 룩셈부르크 가문이 단절되었을 때, 신성 로마 제국 제위와 함께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도 일시적으로 차지하였으나 당시 두 나라의 지방 귀족이 실권을 쥐고 있어 제대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약 2년만에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를 상실했다.[21]
이후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는 야기에우워 왕가가 차지하게 되었는데, 결혼동맹의 대가 막시밀리안 1세는 이 야기에우워 왕가의 왕녀 안나와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를, 러요시 2세와 손녀딸 마리아[22]를 결혼시켰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러요시 2세가 전사하여 헝가리-크로아티아-보헤미아의 야기에우워 왕가가 갑작스레 단절되었고, 두 나라의 왕위는 페르디난트 1세를 통해 사실상 합스부르크의 세습 지위가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이자 스페인[23] 이사벨 1세의 손자인 카를 5세는 부모와 조상의 후광, 특히 할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막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 시대의 합스부르크는 외형상 최전성기를 맞는다. 카를 5세가 통치하게 된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막 통일을 이루고 대서양 무역을 장악하고 신대륙까지 접수에 들어간 강대국으로, 합스부르크는 유럽의 강대국을 둘이나 가지게 되었다.
이 카를 5세 치하의 제국은 이를 저지하려던 발루아 가문의 프랑스와 맞붙어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이탈리아 반도를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시켰다. 오스트리아-스페인에 의해 처참하게 박살난 프랑스는 30년 전쟁으로 화려한 부활을 선언할 때까지 100년 동안 유럽 구석에서 버로우하게 된다.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필요에 따라 양측에 적절히 붙고 배신하면서 자국의 안정을 도모했지만 카를 5세는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 허가조차 좌지우지할 만큼 권력이 막강했다.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던 합스부르크의 패권을 새로 위협하기 시작한 두 개의 변수는 바로 종교개혁과 오스만 제국이었다. 특히 북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짓밟기 위해 스페인군을 독일로 데려온 것이 정치적 패착이 되었다. 독일인이 주류인 신성 로마 제국의 일에, 동군연합이라는 합스부르크의 사적인 혈연으로 연결되었을지언정 결국은 외국 군대인 스페인군을 개입시킴으로써 독일어권 세력들 간의 연대의식을 방해했음은 물론, 암묵의 룰을 깼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독일의 제후들은 종교와는 별개로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짙은 불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가 30년 전쟁, 그 후 신성 로마 제국의 콩가루화다.
결과적으로 16세기 마르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영방을 산산조각내며 분열시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전성기를 맞은 쉴레이만 1세 치하의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왕국을 무너뜨리고 동쪽 국경을 엄습했다. 내전과 1529년의 1차 빈 포위로 말미암아 합스부르크는 광대한 영토 전면에 걸쳐 전선을 확장시켜야 했다.
가히 호사다마라 할 수 있는 최악의 위기였지만 군제개혁을 통한 전술상의 성공과 신대륙에서 쏟아져 나오는 부, 그리고 그간 다져온 많은 조력자들의 도움을 등에 업고 카를 5세는 겨우 제국을 지켜내어 후계로 넘겨주는 데 성공한다. 다만 막시밀리안 1세 이래로 추진되어온 합스부르크의 절대왕정 수립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 영방 체제가 계속되었다.
2.4. 합스부르크 제국의 출범[편집]
유럽 전역을 석권했던 카를 5세 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와 스페인계 합스부르크로 분열되었다. 카를 5세가 광대한 영지 중 오스트리아 대공위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24]에게, 스페인+네덜란드 저지대+아메리카 대륙+필리핀 등 나머지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각각 나누어 양위했기 때문. 물론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제위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했으나, 당시 독일 제후들의 반발로 동생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내막은 카를 5세 문서 참조.
카를 5세의 뒤를 이은 페르디난트 1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부유한 저지대와 식민지를 물려줬지만, 형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물려받은 페르디난트 1세는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추진했던 결혼 덕분에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25]라는 막대한 영토를 획득하게 되었다. 때문에 페르디난트 1세 이후 오스트리아는 중부유럽의 최강자로 거듭났다.
한편 저지대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에 귀속되었으나 펠리페 2세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북부 7주인 네덜란드가 1648년 완전히 독립하였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18세기에 오늘날의 벨기에 지역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라는 이름으로 약 1세기간 차지하기도 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를 지키기 위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얻어야 했기 때문에 종교 문제에는 비교적 관대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갈수록 종교 문제에 완고하게 대처했다. 결국 합스부르크 황제들의 비타협적인 종교관은 30년 전쟁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 독일은 인구가 2/3로 급감하고 국토가 황폐화되는 치명상을 입었고, 종전 조약인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합스부르크는 북독일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라는 지위는 사실상 명목상의 작위로 전락하였다.
2.5. 중흥기[편집]
합스부르크의 중흥은 18세기에 찾아왔다. 1683년 오스만 제국이 대규모로 침공해와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레오폴트 1세는 독일의 영방 제후들과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우군으로 끌어들여 빈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낸 후 퇴각하는 오스만 제국군을 곧장 추격하여 대 튀르크 전쟁을 일으켰다. 사부아 공자 외젠의 맹활약으로 카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오스만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을 탈환했고 이후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동유럽을 잠식해 들어갔다. 대튀르크 전쟁으로 자신감을 얻은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후에도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과의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을 통해 동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제2차 빈 공방전에서 도움을 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분할해 냠냠하기도 했다.
한편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스페인 왕위를 두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부르봉 가문이 서로 왕위를 주장하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년~1714년)이 일어났다. 13년에 걸친 전쟁 끝에 부르봉 가문은 스페인 왕위를 따내는 것은 성공했지만 프랑스와 스페인을 영원히 합칠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과거 한때 스페인령이었던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의 이탈리아 영토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획득했다. 반면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는 이후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는 1세기간의 길고 느린 쇠퇴 국면에 접어들었다.
대 튀르크 전쟁의 후속전으로 치뤄진 제6차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1716년 ~ 1718년)에서도 오스만 제국에 승리를 거두어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북부 등을 획득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렇게 18세기 전반기에 다시 중흥을 맞이하게 되었만 얘기치 못한 것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상기된 두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카를 6세가 아들을 낳지 못하여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카를 6세는 살리카 법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문을 물려주기 위해 국사조칙을 공표했다. 그러나 주변 세력들은 살리카 법을 근거로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이 때문에 카를 6세는 주변국에게 많은 이권을 떼주거나 영토를 양보해야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 프랑스와 접하고 있던 로트링겐(로렌)의 공작 프랑수아 에티엔이었기 때문에 특히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반발이 심했고, 결국 카를 6세는 1736년 로트링겐(로렌) 공국을 신성 로마 제국에서 분리시켜 프랑스로 넘겨주었다. 또 1734년 일어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체결된 빈 조약(1738년)에서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위해 주변국들에게 상당 부분을 양보했고 그 결과 토스카나 대공국과 파르마 공국을 획득하는 대신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내주었다.
카를 6세가 이렇게 여러 조치를 취해 두었지만, 그가 사망하자 프로이센 왕국 등 주변 여러 세력들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계승을 반대하며 달려들면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 바이에른 선제후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7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카를 7세가 오래지 않아 사망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 이후 왕조는 정식으로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라 칭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합스부르크 가문이라고 불렀다. (로렌, 즉 로트링겐을 프랑스에게 줘버렸으니,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라고 부를 때마다 로트링겐 없는 로트링겐 가문이라는 조롱 + 로트링겐을 되찾자! 하는 호전적 발언이 되어버린다...)
한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알짜배기 땅이던 슐레지엔을 신흥세력 프로이센에게 빼았기고 말았다.[26] 이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동맹의 역전이라는 초강수까지 동원하여 노력하였으나 7년 전쟁에서 패배하여 독일 내에서의 패권을 잃었다. 대신 마리아 테레지아의 치세 동안에는 보헤미아와 헝가리 등 반항적이었던 영지를 평정하고 북쪽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프로이센, 러시아와 함께 분할, 획득하였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프랑스 혁명이 터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합스부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실로 혁명 전파를 두려워한 여러 왕정 국가들과 같이 대프랑스 전쟁을 일으켰으나, 혁명 프랑스군의 놀라운 전투력과 때마침 등장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탈탈 털리고 벨기에와 이탈리아마저 뺏겨버렸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자 위기에 처한 프란츠 2세는 그동안 동군연합 상태를 유지하던 합스부르크의 영지를 하나로 통합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우고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과 손잡으며 공동 전선을 결성했으나 치명타를 입고 1806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자체가 와해당했다.
이어지는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까지 깨지면서 유일한 해안 지역인 달마티아를 뺏기고 황제의 딸 마리 루이즈를 강제로 나폴레옹에게 시집을 보내는 등 굴욕을 맛보던 시기, 나폴레옹이 극적으로 러시아 원정을 거쳐 몰락하면서 상황은 또 반전된다. 재반격에 나서 프랑스를 핀치로 몰아붙인 합스부르크는 잃었던 영토의 상당수를 회복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인 독일 연방의 의장국이자 빈 체제를 주도하였다.
이후 민족주의의 물결이 유럽을 뒤덮으며, 독일 통일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게 되었고 아울러 그동안 합스부르크 제국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보호자로 여겼던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들이 민족의식에 대해 눈 뜨기 시작했다.[27]
이러한 민족주의의 물결 속에서도 오스트리아 제국은 한동안 건재하게 버텼으나 1866년 독일 통일을 두고 벌어진 보오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동안 자타가 인정하는 독일 내 최강의 나라였던 오스트리아의 위신은 무너졌으며, 통일 독일에서 강제로 배제되었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결과로 사르데냐 왕국에게 롬바르디아와 베네토 지역을 상실하고, 분가가 통치하던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레조 공국도 멸망하면서[28]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영향력도 사실상 상실했다. 뿐만 아니라 패배의 여파로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합스부르크는 제국 내에서 독일인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던 헝가리인들과 타협하여 새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했다.
2.6. 군주제 폐지 및 제위 박탈[편집]
독일 통일에서 배제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의 수립으로 서쪽으로의 진출이 막히자 대신 남쪽 발칸 반도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환자로 전락하면서 발칸 반도의 수많은 민족들이 독립을 외치는 가운데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를 세력을 확장할 기회로 보았다.
우선 보오전쟁으로 일시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었던 독일과 우호관계를 다진 뒤 보스니아를 확보하며 남방 진출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역시 남쪽으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며 달려들면서 발칸 반도의 판세는 더욱 복잡하게 돌아갔다. 결국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제위 계승자가 암살당하면서 이전에 쌓이고 쌓인 수많은 갈등이 폭발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카를 1세가 퇴위하며 길었던 합스부르크의 시대가 막을 내렸고, 오스트리아-헝가리도 해체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중장 출신인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헝가리 왕국을 복원하며 헝가리 왕위는 남아있긴 했지만, 명목상 복원시켰을 뿐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 입국을 거부하는 등 섭정 지위로 1인 독재 체제를 유지하였고 이마저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헝가리에 사회주의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군림하는 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일세를 풍미한 이름 높은 가문으로 대접받으며, 근대 유럽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웅변하는 산 증인이다.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으로 전환한지 100년이 넘어가고 있음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주는 비록 이름 뿐이지만 아직 오스트리아 황제, 헝가리 국왕, 보헤미아 국왕 등의 작위를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군주제의 폐지나 불합리한 승계과정으로 인해 왕위를 빼앗겼다고 주장하거나, 만약 그 왕조가 이어져 왔다면 지금은 누가 왕일까 설정놀이를 하기도 하는데, 그 대상자를 왕위요구자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이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지금은 명예상의 문제에 불과하고 진지하게 군주로서의 실권을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오스트리아도 그렇고 생각이 있는 왕위요구자들은 실권이 없는 입헌군주제로라도 왕정복고를 원하지만 그것조차 원만하지 않은게 현실. 사실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딱히 잘못한 것도 아니고, 전쟁 자체도 아무 잘못도 없는 황위 후계자가 암살당해서 일어난 거라 말이 전범국의 황실이라지만 정상참작이 충분히 됨에도 불구하고 공화주의 정권의 황실배척이 이례적으로 강해서 제정복고의 길이 다른 동유럽보다도 요원한 것이다.
3. 스페인 압스부르고(구 본가)[편집]
카를 5세가 스페인 왕 자리를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면서 스페인 왕위와 신성 로마 제국 제위는 분리되었다. 단절되기 전까진 이쪽이 본가였다. 이에 대해서는 압스부르고 왕조 참조.
4. 특기할 사항[편집]
4.1. 근친혼에 따른 흥망성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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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스페인 합스부르크는 다른 왕조들처럼 혁명이나 외부의 침입 등으로 단절된게 아니라 수십~수백 년간 반복된 근친혼의 폐해 때문에 무너졌다. 위의 그림과 같은 근친혼으로 인한 악성 인자의 누적 탓인지 뒤로 갈수록 무능한 왕이 등장했으며, 결국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2세기만에 단절되었다.
카를로스 2세에 이르면 유전자 결함으로 정신적으로 상당히 심약한 것은 물론이고 주걱턱이 거의 질병 수준이라 음식을 제대로 씹어 삼키지도 못했다. 게다가 말도 제대로 발음할 수 없을 정도로 중증이 되었으며, 생김새도 흉측했다. 뿐만 아니라 불임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대가 끊기면서 카를로스 2세의 유언대로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이 계승할 것인지 아니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승할 것인지를 놓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선대 왕들과는 다르게[30] 성실하고 선량한 인물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결혼을 통해 동맹을 다져서 전쟁을 피하는 방식으로 가문을 번영시켰다.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 라는 라틴어 시구가 유명했을 정도. 이런 혼인 관계 때문에 합스부르크의 핏줄이 오만 곳으로 퍼졌는데, 이렇게 온 유럽에 합스부르크 피가 흐르는 귀족이 없는 데가 없는 경지에 이른다.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등의 개족보 관계가 계속 잇따르면서 유전적 결함이 중첩되어 유전병을 가진 후손들이 대거 태어났고, 외모적 특성인 합스부르크의 주걱턱이 계속 나타나게 된다. 주걱턱의 별칭이 합스부르크 턱(Habsburg jaw or lip)인 게 괜한 말이 아닐 정도로 주걱턱이 가문의 심볼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도 합스부르크의 피가 섞인 왕가에서는 주걱턱인 사람이 많다. 대표적으로 오토 폰 합스부르크. 스페인계보다 근친혼이 비교적 적었던 오스트리아계고, 오스트리아계는 그가 태어나기 전 이미 근친혼이 많이 희석되었는데도 주걱턱이었다. 그의 손녀도 굉장한 미모를 뽐내지만 역시 주걱턱의 늪에서 빠져나올 순 없었다.
벨라스케스의 걸작인 (시녀들)라는 그림의 모델로 유명한 마르가리타 테레사 스페인 공주[31]의 연작 초상화를 봐도 성장하면 할수록 도드라지는 주걱턱 때문에 항상 고개를 살짝 돌려서 최대한 턱이 드러나지 않게 그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카를로스 2세까지 가면 근친혼의 끝이 얼마나 처참한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한편 페르디난트 1세로부터 시작되는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는 근친혼이 스페인보다는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32] 이러한 일은 눈에 띄게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 16세의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조차 주걱턱이었으며[33], 카를 대공이나 페르디난트 1세는 뇌전증에 시달렸다고 하니 근친혼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다.[34]
중고등학교나 교양서에서 배우는 세계사에서 오스트리아의 비중이 낮은 것도 혼인으로 번성했던 가문의 역사와 연관 지을 수 있다. 세계사에서 가르치는 교양이나 교육 목적은 민주 시민의 양성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중세 봉건주의적 제도를 극한으로 활용했던 오스트리아보다는 봉건적 질서를 극복하고 근대적 세계를 수립한 영국, 미국, 그리고 프랑스에 비중을 둘 수 밖에 없다. 현존하는 독재국가들의 세계사 과목에서 상대적으로 오스트리아에 큰 비중을 두는 것과는 대조적이다.[35]
또한 현대 세계는 영국, 미국, 그리고 낮은 비중으로 프랑스가 세운 체계 아래에서 움직이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흔적은 동유럽 및 중부유럽 일부밖에 남아 있지 않으며 이들은 국력이 바닥이라 영향력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일부 왕조 호사가들 이외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4.2. 가풍[편집]
중세 이래 현대까지 수백년 동안 지속된 가문이기 때문에 가풍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쉽지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면과 진보적, 실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면이 공존하고 있다. 특히 종교에 있어서는 다소 보수적이었지만, 정치와 문화에서는 실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특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스페인 압스부르고가 갈라진 후 상대적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서는 실리적인 면모가 부각되었다. 이는 가문의 분할 당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시조가 된 페르디난트 1세와 스페인 압스부르고로 적통이 이어진 카를 5세 형제의 성향 차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종교적 측면에서 보수적인 면모를 보일 때도 있었지만[36] 이를 제외하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체적으로 동시대의 다른 가문에 비해 현실적,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면모를 보일 때가 많았다. 이러한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면모는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스페인 압스부르고는 오스트리아계에 비해서는 보수적인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웃 프랑스 부르봉 가문에 비해서는 매우 관용적인 정치를 펼쳤다. 사실 스페인은 국가 자체가 레콩키스타로 탄생했기 때문에, 종교가 갖는 영향력이 오스트리아보다 훨씬 강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오스만에게 수도 빈이 포위된 게 2번이고, 스페인은 통째로 이슬람에게 탈환한 다음에도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에서 맞부딪쳤으니 종교색을 안 띄는게 불가능한 지형이기도 했다.
16세기 이래 합스부르크 가문은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정책이 대성공을 거두어 유럽 각지에 걸친 다민족의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합스부르크는 이웃 프랑스 왕국과는 달리 합병된 소수민족 영토를 일방적으로 찍어누르는 대신 해당 지역의 문화, 언어를 상당히 존중해 주는 관용적인 통치를 펼쳤다.
이런 민족적 관용 정책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몰락하는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합스부르크는 1848년 혁명 이후에도 무작정 헝가리의 혁명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을 탄압하지 않고 대타협으로 해결하는 유연함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사라예보 사건 때문에 빛을 못 보았으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 계획'도 합스부르크식 유연함을 잘 보여준다.
이런 합스부르크의 민족적 관용 정신은 시대를 앞서 나간 것이었는데, 덕분에 다민족 국가인 합스부르크 제국이 꽤 오랜 동안 별 잡음 없이 굴러갈 수 있었다. 오늘날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합스부르크 제국 하에서 비독일계 민족들의 불만은 크지 않았고 오히려 대체로 그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긍정하고 그들의 지배를 환영했다.[37] 합스부르크 가문은 형식상 지배자라는 타이틀만 가져갔을 뿐 그들의 고유 문화와 제도에 거의 터치하지 않았고,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했다.
헝가리 왕국과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들이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원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오스만 제국의 위협 때문이었다. 동유럽인들은 언제 있을지 모를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항상 두려워했고, 합스부르크를 그들을 지켜줄 구원자로 여기기까지 했다. 게다가 독일계가 아니라고 해도 본토 오스트리아인에 비해 딱히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는 독일계와 헝가리인을 포함한 여러 민족이 다양하게 활동했다.
이런 민족적, 문화적 관용은 오스트리아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스페인 압스부르고에서조차도 나타나는데, 일례로 카탈루냐에 대해서 압스부르고는 상당한 정도의 자치를 허용해줬다. 압스부르고 왕조가 단절되고 프랑스계 보르본 왕조가 들어서자 카탈루냐의 자치권은 완전히 박탈되었다. 현재 카탈루냐가 스페인에 합병되었다고 말하는 1714년이 바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고 보르본 왕조의 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다. 이말은 역으로 그전 합스부르크 시절에는 카탈루냐가 거의 독립국 수준의 자치를 누렸음을 뜻한다. 물론 스페인 압스부르고의 관용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만큼 전면적인 것은 아니어서 네덜란드의 독립 운동을 야기하기도 했다.
합스부르크의 온건한 성향은 봉건주의가 마지막까지 건재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프랑스 등 다른 봉건국가들이 차례차례 내부의 개혁-혁명 압력에 붕괴되거나 굴복할 때, 합스부르크는 건재했다는 것 자체가 피지배 계층의 지지-동의를 받았다는 걸 뜻한다. 결국 합스부르크는 자본주의, 민족주의, 공화주의, 산업혁명 등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이를 무너뜨리려면 세계대전의 패배가 필요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경우도 그렇고, 스페인도 사실 종교개혁, 교파화 (confessionalization)시대 유럽 열강 정치판의 중심에 있어서 종교적인 면에서 워낙 독선적이었던 것이지, 종교를 뺀 세속 정치문화면에선 상당히 관용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스페인 본토의 경우만 하더라도 전임 가톨릭 부부왕의 문화, 교육 진흥 정책을 이어받아 인문주의에 기반한 대학 설립을 통한 관리, 공무원, 법률 전문계층 양성을 통해 드넒은 스페인 제국을 성공적으로 통치했고, 당장 안방인 카스티야의 1520년 코무네로스 봉기부터 강제 개종당한 그라나다 왕국의 무어인 봉기, 17세기 중반 포르투갈과 카탈루냐의 쌍방울 반란 등을 겪으면서도 역시 종교문제가 걸려 대학살과 무어인 추방으로 끝난 무어인 문제만 빼곤 대부분 패배한 반란 세력을 주동자 몇몇만 처형하고, 압류된 재산이나 작위도 한세대 뒤에 복권시켜주는 등 관대한 처분을 통해 국내 안정을 이루었다.
신대륙 정복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참극의 역사속에서, 사실 톨레도, 세비야, 마드리드에 소재한 본토 왕실과 정부는 1512년 부르고스 칙령, 1542년 원주민 신법안, 1550년 바야돌리드 논쟁 등을 통해 엄연한 스페인 왕실의 신하로서 원주민들에게 일정한 권리와 자치권을 부여하고, 콩키스타도르와 엔코미엔다 지주들로부터 나름 보호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 시기 벌어진 신대륙 원주민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은 대부분 현지 콩키스타도르, 엔코미엔데로(Encomiendero, 말그대로 엔코미엔다를 소유한 지주)들의 사적 탐욕 등에 의해 벌어졌고, 원주민들이 어마어마한 숫자로 죽어나긴 했으나 이건 구대륙과의 접촉으로 인한 전염병 문제가 훨씬 더 컸고, 원주민들을 절멸이 아니라 개종, 노동력 징발의 대상으로 보았던 스페인 당국은 오히려 선교사들을 통한 구호 활동을 통해 토착민 숫자를 보전하려고 했다.
스페인의 식민지 행정 체계 수립 노력도 16세기 후반쯤 되면 제대로 된 성과를 발휘, 현지 부왕령에서 직접 다스리는 식민 거점 도시들을 제외한 농촌과 밀림의 원주민들은 공물과 노동 징발 대신 현지 자치를 인정 받는 원주민 영방 (República de indios) 체제가 자리잡았다.
현실 정치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대 통치자들은 매우 현실적, 실리적 면모를 보일 때가 많았는데, 합스부르크의 황제들은 새로운 제도와 문물을 앞서 수용하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실리적인 면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서 더욱 부각된다. 초장기 합스부르크 가문은 푸거 가문으로부터 자금을 융통하여 신성 로마 제국 제위의 세습을 굳히는 등 가문을 확장하는데 적극 이용하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 경제사학계에서도 금융의 선진화를 앞당긴 사례로 평가받기도 한다.
다른 가문이 영토를 넓히기 위해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막시밀리안 1세 등 합스부르크의 군주들은 결혼 정책을 통해 손쉽게 가문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는데, 이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실리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물론 합스부르크의 이런 결혼 정책도 공짜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자존심을 굽히고 수십년 동안 타가문과 유대관계를 지속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합스부르크에서 고지식했던 통치자에 속했던 카를 5세도 화승총 부대를 도입하여 유럽 전쟁사에서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다.
근대에는 계몽군주인 요제프 2세가 나타나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하며 신기술과 제도를 도입하는데 앞장섰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이후 오스트리아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를 취했으나, 사회문화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시대를 앞서나가는 굉장히 리버럴한 분위기의 나라였다. 빈 체제로 인해 보수주의자로 평가되는 프란츠 2세는 비록 정치체제와 종교에서는 보수적이었지만, 과학과 예술을 적극 후원했고 신기술도 적극 도입해 도나우 강에 증기선을 띄우고 철도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합스부르크의 문화 덕분에 19세기 빈은 유럽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예술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파리에 비해 화려함은 조금 떨어졌지만 시대를 앞서나가는 진보적인 예술 풍토를 특징으로 했다.
반면 보수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 보수적인 측면이 나타난다. 이는 종교개혁기의 카를 5세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카를 5세 등 합스부르크의 군주들은 속권의 문제에서 교황과 멱살은 잡았을지언정 교권에서는 교황과의 관계가 좋았으며, 사코 디 로마로 유명한 카를 5세 역시도 교권에서는 교황에게 추호의 적의도 품지 않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38] 그의 아들 펠리페 2세 역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아버지와 성향이 비슷한 점이 많았다. 당대 유럽 왕실들과 비교할 때 합스부르크의 군주들은 (상대적으로) 성생활도 깔끔하고 사생활 스캔들도 적은 편이였다.[39]
다만 이러한 신념형 보수주의 정책은 그만큼이나 호불호도 많이 갈려서,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교회의 보호자'로 칭송되었으나, 프로테스탄트들에게는 악의 축 취급을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40] 다만 이런 신념형 보수주의는 합스부르크 가문 역사 전체에서 볼 때 그렇게 두드러진 특징은 아니며 고지식했던 카를 5세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징이었다.
빈 체제를 들면서 정치 체제에 대한 보수성을 얘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시 유럽의 세습 지배 가문 중에 정치체제적으로 보수적이지 않았던 가문은 없었다. 오히려 합스부르크는 동시대의 타 가문에 비해서 정치적으로도 상대적으로 관용적이고 리버럴한 편이었다. 동시대의 영국이나 프랑스의 근대사가 중세 질서에서 벗어나 민주적 국가를 수립하는 길을 걸었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은 봉건 영주 간의 혈연 관계와 작위에서 인위적으로 탄생한 나라였기 때문에 국가 자체가 태생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띌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통성은 오스트리아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역사적, 민족적 경험이라기보다는 합스부르크 군주가 갖고 있는 작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구상했었던 동등한 민족들의 연방 국가라는 비전이 현실화됐다면 민족국가보다도 더욱 진보적인 나라가 탄생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라 자체가 망해버렸기 때문에 어떻게 됐을지는 알 수 없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이되 제도와 기술에서는 실리적인 통치로 요약할 수 있다.
참고로 역사학자 Peter Marshall은 그의 저서 「종교개혁」에서17세기 후반 유럽이 종교개혁의 '교파화' 시대가 끝났다는 예시로, 합스부르크를 거론했다.
17세기 후반에 국내외 정치에서 헌신적인 신앙의 역할이 줄어들고 종교 전쟁의 시대, 종교개혁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이 견해는 어느 정도 참이다. 일례로 당대의 정치적 거물인 프랑스의 루이 14세(제위 1656~175)가 팽창주의 야망을 드러내자 지난날 신념 정치의 기수였던 가톨릭권 오스트리아는 그에 맞서 연합한 신교 국가들과 동맹을 맺었다.
Peter Marshall, 「종교개혁」 中
4.3. 근황[편집]
(상술했다시피) 프랑스의 발루아/부르봉 가문과는 몇 세기에 걸친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21세기 합스부르크 가문은 차지하고 있는 왕위가 없는 데에 비해 부르봉 가문은 스페인 왕위와 룩셈부르크 대공위를 가지고 있다. 정작 본가인 프랑스[41]에서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철저하게 축출당했기에 20세기까지 제위를 유지한 합스부르크보다 사정이 딱히 낫다고 보긴 힘들지만 말이다.
2010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 관련의 뉴스가 나왔다. 현재 오스트리아에서는 전현직 통치자 가족이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손은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기 때문에 오토 폰 합스부르크(최후의 황태자)의 조카 울리히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
1989년 3월 14일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부르봉파르마의 공녀 지타가 96세의 일기로, 2011년 7월 4일에는 마지막 황태자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이 98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제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스스로 '공화국 시민'으로 자처하며 세간의 존경을 받았던 오토 대공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누리던 시절을 경험한 마지막 인물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영상의 의식에 대해선 후술. 초를 들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신을 안장하는 카푸친 교회의 수도자들이다. 카를 1세의 자녀들은 모두 사망했지만, 배우자 자격으로 황실 봉안당에 안장될 수 있는 인물은 아직 있다.
현재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은 오토 대공과 레기나 폰 작센마이닝겐의 아들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며, 프란체스카 폰 티센보르네미서[42]와의 사이에서 총 1남 2녀(총 3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 중 둘째이자 유일한 아들이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다. 참고로 이 사람은 포뮬러 3 드라이버이다. 페르디난트 대공의 누나인 엘레오노르 여대공은 2010년에 포뮬러 1에서 뛴 제롬 담브로시오와 약혼한 상태인데 유럽의 탑엔드 레이싱이 얼마나 귀족 스포츠에 가까운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2018년부터 페르디난트는 유튜브를 시작했다. 2021년에는 WEC에서 LMP2 부문 우승을 차지하였고, 현재는 프레마 레이싱과 리얼팀 레이싱에서 활동중이다.
2020년 12월에 주 프랑스 헝가리 대사에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차남 게오르크가 임명되었다.
5. 기타[편집]
국내에서는 세계사 자체가 등한시되는데다 앞서 언급했듯, 그나마도 배우는 세계사 교과에서도 비중이 적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했던 빈, 프라하, 부다페스트, 브라티슬라바 등으로 여행가서 알게되는 사람들도 적지않다. 브뤼셀이나 이탈리아 베네치아, 밀라노, 심지어는 폴란드 크라쿠프나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도 등장하는데에 놀라는 사람들도 있다.
만화 봉신연의의 극중극인 '국립 앙뉘 학원'의 주인공도 뜬금없지만 합스부르크 출신이다.
미국 드라마 30 Rock에도 한 에피소드에 이 가문의 후손이 등장한다. 잭 도너기의 소개로 리즈 레몬과 제나 마로니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손이라는 공작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게 되었는데, 제나 마로니는 동화속 왕자님을 상상하며 그를 유혹하여 팔자를 고칠 생각이 부풀었지만 막상 만나보니 휠체어에 앉아 있고 그 외에도 몸 여기저기 성한 데가 없고 정신지체까지 있는 심각한 수준의 장애인이었다(합스부르크가의 유전병을 풍자한 것으로 추정…).[43] 그래도 굴하지 않고 제나 마로니는 공작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하며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생일 축하 노래와 함께 상태가 별로 안 좋았던 공작은 사망해버리고, 그의 옆에서 시중을 들던 집사가 공작이 사망하여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끝났다고 선언하며 제나의 꿈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백작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의 신성 그리핀 제국의 전신인 신성 팰컨 제국이 건국된 후부터 황가와 6개의 대공가가 중첩적인 혼인관계를 맺어 사촌 이상의 근친혼 관계가 되었다는 설정이 있는데 모티브가 된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패러독스사의 게임들에도 등장한다.
크루세이더 킹즈 2, 크루세이더 킹즈 3: 1066년 시나리오 기준으로 알프스 아래 아르가우 백작령 하나만 점유하고 있는 애처로운 합스부르크를 발견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가문이라 몰입하기도 좋고 봉신플레이와 신롬 특유의 시스템을 익힐 겸 해보기도 괜찮다. 크킹 3 에서는 오스트리아 지역 공작령들을 장악하고 플레이어나 같은 가문이 신롬 황제이면 오스트리아 공작령들을 왕작위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묶을 수 있다. 역사적인 흐름도 따라갈 수 있고 장자상속제를 훨씬 빨리 얻을 수 있는 성능적으로도 훌륭한 결단이니 목표로 삼기 적합하다. 아니면 카페 왕조를 몰락시키고 프랑스의 왕위를 찬탈하거나 북독일로 진출해 북방 십자군을 주도하며 프로이센 지역에 자리를 잡는 흥미로운 대체역사를 써내려가도 상관없다.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 초기 시나리오에서는 오스트리아 대공위, 중기 시나리오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 왕인 카를 5세가 등장한다. 하지만 99%의 유저는 초반부 시나리오를 선택하며, 오스트리아는 강국이긴 하지만 매우매우매우 복잡한 외교능력을 필요로 하기에, 초보자에게는 어렵다.
빅토리아 2, 빅토리아 3: 오스트리아 제국이 등장하지만, 빅토 2는 캐릭터들을 아예 배제시킨 철저한 국가 중심 게임이므로 사실상 공기에 가깝다. 빅토 3의 경우 크킹 3의 3d 포트레잇을 도입하고 캐릭터들에게 이해 집단이나 성격 같은 개성을 줘서 정부 정통성[44]이나 국가 포인트[45]에 영향을 줘서 이전 작들에 비해서는 비중이 있다.
하츠 오브 아이언 4: Death or Dishonor DLC가 있고 헝가리로 플레이할 때 합스부르크 복귀 루트로 진행하면 오토가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하고 오헝제국을 다시 세울 수 있다. 그리고 Waiking the Tiger DLC를 가지고 있으면 나치 독일로 시작한 플레이어가 제정 복고시킨 다음일 때[46] '제국의 정서를 통한 화해'를 통해 오스트리아 중심으로 오헝제국을 재수립시킬 수 있다. 이로써 아예 미래 우주 시대라 배경인 Stellaris를 제외하고 모든 패러독스 역사 게임에 합스부르크가 등장했다. 그리고 스텔라리스에서도 커스텀 국가를 만들 때 인간형 이름의 3,4번째 목록을 고르고 랜덤으로 이름을 돌리면 지도자의 성으로 합스부르크가 나올 때가 있다.
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로트링겐 공작가일 시절의 조상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가 있어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핏줄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에 이어지고 있다. 안드로니코스 2세의 4남 테오도로 팔레올로고[47]가 이탈리아 북부의 몬페라토를 다스리던 알레라미치 가문 출신의 어머니 이레네[48]로부터 몬페라토 변경백 작위를 물려받았는데, 그의 후손이 만토바 공국의 곤차가 가문에 시집을 갔고, 곤차가의 후손이 로트링겐 공작 가문에 시집을 가서 이어진 후손인 프란츠 1세가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함으로서 비록 직계는 아니긴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합스부르크 가문에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49]
5.1. 장례 의식[편집]
가문의 장례식이 유명한데, 카푸친 교회에서 특유의 봉안 의식을 거침으로써 마무리된다.
첫 번째로 장례 행렬의 선두가 장례식장의 문을 두드리고 고인이 황족으로서 가지고 있던 작명들을 말하지만 교회 관계자는 "우린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며 문을 열어주지 않고, 2번째로 문을 두드리고 고인이 가지고 있던 직업과 공훈들을 말하지만[50] 역시 똑같은 말을 하며 문을 열어주지 않고,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리고는 "[고인의 이름], 한낱 죄 많은 자입니다."라고 말하면 그제서야 문을 열어준다.링크
불교 문화권에서도 비슷한 선문답이 있다.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 옛 친구인 고명한 스님을 보러 절에 찾아가, 시중 드는 동자에게 "이러이러한 관직의 아무개가 스님을 뵙고자 한다고 전해라"고 하자 그 말을 전해 들은 스님은 "나는 그런 사람 모른다"고 대답할 뿐 얼굴도 내밀지 않는다. 그 대답에 관리가 이번엔 자기소개에서 관직을 빼고 "그냥 아무개가 찾아왔다고 다시 한번 전해다오"라고 말하면 그제서야 스님이 "오, 나도 그 친구가 한번 보고 싶었지"라며 반겨준다는 내용.
양쪽 모두 제아무리 명예와 지위가 드높은 자라고 한들 죽어서까지 그것을 가지고 갈 수는 없으니 겸손을 잊지 말아야 할 한낱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1] 신성 로마 제국 문장(Coat of Arms)의 검은 쌍두 독수리와 황금색 깃발에서 비롯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수립 후 국기로도 사용되었다. 러시아 제국처럼 국기와 어기가 같다.
[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장.
[3] 가문 자체의 문장은 좌측의 노란 바탕에 붉은 사자 문장이다. 가운데는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의 문장이며, 오른쪽의 황색 바탕의 새가 그려진 붉은 줄의 문장은 로렌 공작으로서의 문장이다.
[4] 표어는 아니고 유명한 시구다.
[5] 합스부르크의 모토이자 프리드리히 3세의 서명.
[6] 신성 로마 제국과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제후국으로서의 대공국이지만, 오스트리아 대공국 자체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성들이 대대로 유럽의 다른 왕실 귀족들과 차별화되는 '대공'(Erzherzog)이라는 특별한 작위를 자칭한 것도 위조문서를 앞세워 오스트리아 공국을 멋대로 격상시킨데서 비롯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성립된 이후에 다른 공국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 대공국도 1918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7] 19세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칭제 이전까지 유럽에서 황제가 있었던 나라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 오스만 왕조의 오스만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 제국 뿐이었다. 유럽에서 황제, 제국을 칭하려면 로마 제국의 후예여야 한다.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로마 제국의 동쪽이었던 동로마 제국의 후예임을 자처했다.
[8] 대영제국으로 전세계를 호령할 당시의 영국도 정작 공식 국호는 제국이 아닌 그레이트 브리튼 연합왕국이었으며, 영국 국왕의 공식 칭호도 황제가 아닌 왕/여왕(King/Queen)이었다.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보다 더 강한 국력을 자랑한 프랑스 왕국의 태양왕 루이 14세조차도 끝까지 왕으로 남았고, 황제를 칭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면 프랑스 왕국의 국교였던 가톨릭 교회가 인정하는 유럽의 유일한 황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뿐이었기 때문에 실제 국력이 어떻든 가톨릭 교회 중심 구체제하의 프랑스 왕국은 죽었다 깨어나도 제국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가톨릭 교회 중심의 구체제가 한번 무너지고 난 후에 집권한 나폴레옹이 등장하고 나서야 프랑스는 비로소 황제를 칭했다. 황제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제국이 몰락한 이후 다시 돌아온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의 칭제를 무르고 다시 왕을 칭했는데 기껏 올라갔던 프랑스의 황제국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고 다시 왕국/왕으로 돌아간다는, 동양적 시각으로는 너무나 이상하게 보이는, 이런 부르봉 왕가의 행동은 옛 질서를 복구시키고자 했던 그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의 프랑스도 여전히 엄연한 유럽 강대국의 한 축이었으나 부르봉 왕가가 신봉한 가톨릭 교회 중심 유럽 구체제 질서의 세계관에서는 실제 자신들의 국력과는 무관하게 프랑스는 황제국이 아닌 왕국이어야 했던 것이다. 다만 이와 별개로 프랑스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국력과 맞먹거나 더 강했고 뿌리가 신성 로마 제국과 같은 프랑크 왕국이기 때문에 프랑스 국왕은 황제만 아닐 뿐이지 역사, 정통성, 권위면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도 별로 꿀리지 않았다.
[9] 다만 헝가리의 경우 명목상 왕국으로 남았기 때문에 카를 1세가 헝가리 왕위라도 되찾으려고 했으나 섭정을 자처하던 호르티 미클로시가 정작 합스부르크 가문이 돌아오는 것은 막아버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공산화되어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 되었기에 무산되었다. 또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자신의 사후에 과거 스페인의 왕실이었던 합스부르크의 후계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를 스페인 왕으로 추대하는 것을 고려해보기도 했지만 오토 폰 합스부르크 본인이 거부했고 스페인계 부르봉 왕조의 복고가 이루어졌다.
[10] 루돌프 1세의 첫 부인인 호엔베르크의 게르트루데가 호엔촐레른 가문 슈바벤계의 후손이라 먼 친척이었다.
[11] 원래는 알브레히트와 둘째 루돌프에게 나눠주었으나 마음을 바꾸어 맏이에게 몰빵하고 둘째에게는 이름만 남은 슈바벤 공작위를 하사했다.
[12] 이후 스위스와 합스부르크는 시시때때로 충돌하고 영합하며 처음의 종속구도에서 차츰 지분을 양보해주는 식으로 변모해갔고 스위스의 독립 달성은 수세기 후 30년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성취되었다. 참고로 네덜란드 또한 합스부르크 속령화와 독립 과정에 있어 스위스와 싱크로가 상당히 맞아 떨어진다. 차이점이라면 400년 정도 시간차가 난다는 정도이다.
[13] 동생 루돌프의 아들인데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넘겨준 대가로 보상을 해주지 않은데서 앙심을 품고 큰아버지를 암살했으나 그 대가로 가문 족보에서 지워졌으며 <제국추방령>을 당해 이탈리아 반도를 전전하다 피사에서 객사했다고 전해진다.
[14] 루돌프 1세가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에게 승리한 후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는 자신이 가져가고, 케른텐과 크라인은 자신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티롤 백작 마인하르트에게 양도했는데, 마인하르트의 직계가 단절되면 다시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반환하는 것을 조건으로 걸고 넘겨주었다.
[15] 다만, 현대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영토는 오스트리아 공국, 케른텐 공국의 90%,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60%, 티롤 북부와 동부, 잘츠부르크, 과거 헝가리 왕국 영토 중 독일인이 많았던 부르겐란트로 구성되어, 오스트리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티롤 백국, 고치리아 그라디스카 제후 백국, 트리에스테, 알자스와 슈바벤 일대의 월경지 외지오스트리아로 구성되었던 합스부르크 가문 본령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크라인 공국 같은 경우는 슬로베니아의 전신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16] 유럽을 호령하던 룩셈부르크 가문이 단지 대를 잇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합스부르크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라 희극적이기까지 하지만, 역사에서 이런 일은 제법 흔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조선 말기에 가면 왕실이 자주 단절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유럽에선 그럴 경우 딸에게도 어느 정도 상속권이 인정되어 사위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동양의 경우엔 아무리 딸의 상속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서자를 왕위에 올리거나 방계 왕족을 찾아 선왕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왕위에 올렸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17] 엄밀하게는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7세가 잠시 황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자 후사가 끊겼기 때문에 생긴 일인데,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슈테판이 즉위했다.
[18] 정확히는 부계 한정. 이들 가문 모두 모계로 가문을 계승하여 영토를 흡수했다.
[19]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는 용담공 샤를이 전사하자마자 남자 계승자가 없다는 이유로 부르고뉴를 침공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저지대의 백성들을 선동하여 마리 드 부르고뉴를 겐트 성에 가둬버린 후, 자신의 7살 난 아들과의 결혼을 강요할 정도로 부르고뉴를 향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20] 이때 합스부르크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라이벌이었던 잉글랜드 왕국, 카스티야 왕국 등까지도 안느와의 정략결혼을 추진하면서 프랑스를 견제하려 했으나, 안은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을 선택했다. 그러나 동서로 적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경계한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무력으로 브르타뉴를 침공하고 안과 강제로 결혼하였다.
[21] 그나마도 2대 만에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를 겸한 계통이 유복자왕 라디슬라우스의 사망으로 단절되면서 두 나라의 유력 귀족이 왕위에 올랐다가, 다른 귀족과의 갈등 끝에 라디슬라우스의 누나 엘리자베트와의 혼맥을 이유로 왕위를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야기에우워 왕조에 갖다 바친다.
[22]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 1세의 여동생으로 필리프와 후아나의 3녀.
[23] 카스티야 연합과 아라곤 두 왕국 전부
[24] 1521년부터 오스트리아 대공이었고, 카를 5세는 이때부터 오스트리아를 동생에게 주어 독일 종교개혁 문제를 처리하게 하고 본인의 오스트리아 대공 칭호는 장식으로만 달고 있었다.
[25] 다만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오스만 제국 때문에 1/3 정도만 차지했다.
[26]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파르마 공국도 스페인 부르봉 왕조에게 빼앗겼으나 이곳을 잃은 타격은 슐레지엔에 비해 크지 않았다.
[27] 오스만 제국이 슬슬 망조가 보이니 필요 없어진 합스부르크를 손절하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28] 모데나 공작가는 마지막 공작 프란체스코 5세가 사망한 후 남계가 단절되었고, 토스카나 대공가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29] 펠리페 2세의 부인이자 조카인 오스트리아의 안나의 사진이 잘못 삽입되었는데 해당사진은 루이 14세의 어머니인 안 도트리슈다.
[30] 단 그렇다고 선대 왕들이 막장이라는 애기는 아니다. 어쨌거나 선대 왕들은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스페인의 전성시대인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 그리고 최근에는 쇠락해가는 스페인의 현실을 깨닫고 개혁도 시도해보고 노력도 했다고 평가받는 펠리페 4세 등 파도파도 그냥 암군인 펠리페 3세 빼면 마냥 막장 왕만 있는 것도 아니다.
[31] 스페인 왕인 펠리페 4세의 딸이다. 엄마는 아빠의 조카(!)뻘 되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마리아나 공주, 하지만 그녀 역시 사촌(고모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에게 시집갔다.) 겸 육촌(아버지 펠리페 4세와 레오폴트의 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는 고종 사촌)이자 외삼촌뻘인 레오폴트 1세(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자신의 외가(!))에게 시집갔고 불과 22세의 나이에 출산 도중 요절했으며 그녀의 자식들은 대부분 10살이 되기도 전에 죽는다. 살아남은 딸인 마리아 안토니아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에게 시집을 가는데 이 선제후와 사이는 매우 좋지 않고 심지어 폭행까지 했다고.
[32] 대체적으로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과 많이 통혼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와 이종사촌이었다. 다만, 레오폴트 1세는 팔츠 비텔스바흐 가문의 엘레오노레와 결혼해서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를 얻었고, 카를 6세의 황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출신이어서 근친혼이 약간이나마 희석되었다. 이외에도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보르본 왕조, 작센의 베틴 가문, 사르데냐 왕국의 사보이아 왕조와 통혼했다.
[33]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할아버지 레오폴트 1세와 아버지 카를 6세가 근친혼이 아니어서 주걱턱이 상대적으로 덜했고, 아버지 프란츠 1세는 로렌 가문 출신이었다. 하지만 로렌 가문도 프랑스 발루아 왕조와 근친혼이 잦았고, 결정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가 8촌 지간이었다.
[34] 페르디난트 1세는 더해서 수두증에 언어장애, 정신지체까지 시달렸다.
[35] 아이러니하게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봉건주의 영향이 남아 있던 것과는 별개로 정치적으로는 황실의 권한이 다소 있었던 점을 제외하면 자유민주주의에 가까웠다.
[36]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경우는 이것은 특히 종교전쟁기에 국한되어 있다. 이는 어릴 적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았던 페르디난트 2세의 개인적인 성향과 황제의 자금줄 역할을 했던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37] 물론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싫어하는 민족들도 있었다. 가령 폴란드인들은 오스트리아가 자국을 멸망시키는 데 일조했기에... 그래도 크라카우에 합스부르크 황제가 방문할 때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 독일령 폴란드나 러시아령 폴란드의 폴란드인들보다는 불만이 덜했다. 체코인들은 30년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었지만 실패한 이후에는 제국 내에서 동등한 주권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입장을 선회했고, 헝가리인들은 지금의 트란실바니아에 기반을 두었던 동부 귀족들을 필두로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았다. 라코치 독립전쟁이나 1848년 헝가리 혁명은 대부분 트란실바니아나 현재 헝가리 북동부가 주요 전쟁터였다.
[38] 사코 디 로마만 하더라도 카를 5세는 세속군주로서 교황을 찍어누르는 정도를 원했지, 사코 디 로마급의 막장을 원한건 아니였다.
[39] 반면 부르봉 왕조나 로마노프 왕조는 문란한 성생활로 유명했다. 사실 부르봉의 프랑스 통치는 프로테스탄트인 앙리 4세가 프랑스를 지배하려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시작되었기에, 합스부르크 입장에서 보자면 기도 안찼을 것이다. 또한 이때 교황들은 마누라를 한 다스씩 챙기던 시대였다!
[40] 당장 인터넷에서 네덜란드 독립사 관련 글을 아무거나 읽어보면 십중팔구는 합스부르크가 악의 축으로 나온다. 하지만 독립 당시의 네덜란드 사람들 대부분은 가톨릭 신자였고, 개신교화는 이후에 진행된게 함정
[41] 카페 왕조의 방계로 시작되었고, 16세기에 나바르 여왕 잔과의 결혼으로 나바르 왕위를 획득했다.
[42] 남작 가문 출신이라 옛날 같으면 빼박 귀천상혼이었고, 오토 대공의 차남 게오르크는 구 올덴부르크 대공국 가문 딸과 결혼해서 후계자 교체도 가능했지만 오토 대공이 동등결혼으로 인정해 줬다. 사실 구왕실들이 작위가 낮거나 없는 부르주아 가문과 혼사를 맺어 재정적 안정을 바라는 경우가 많은데 프란체스카의 친정은 티센크루프로 잘 알려진 재벌가문이다. 참고로 근대 들어 부르주아 가문들이 남작 같은 하급귀족 작위를 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오토 대공은 까다로웠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귀천상혼에 대한 규율을 완화시켜, 1918년 군주제 붕괴 이후 귀족 여성과의 결혼으로 귀천상혼이 된 후손들에 대한 계승권도 소급해서 인정시켰다. 현재는 수장의 승인과 가톨릭 혼인성사만 올리면 평민과 결혼했다 할지라도 동등결혼으로 인정된다고 한다.#
[43] 그런데 정작 합스부르크를 상징하는 주걱턱은 재현하지 않았다.
[44] 지도자가 속한 이해집단이 여당이 아니면 정통성이 깎인다.
[45] 지도자 성격에 따라 세수가 줄거나 연구 포인트를 추가적으로 얻기도 한다.
[46] 모든 전쟁을 끝낼 대전쟁을 일으킨 그 유명한 빌헬름 2세 혹은 적합한 호엔촐레른 후보 중 하나인 빌헬름 3세가 복위한다.
[47] 1291~1338, 그리스어로는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
[48] 그리스어로는 이리니
[49] 다만 동로마 황실과의 혈연을 근거로 로마의 계승을 주장했던 러시아 제국과 달리 오스트리아는 혈연을 로마 계승의 근거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50] 과거에는 직위명과 본성만을 사용했으며,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경우 제정 폐지 뒤에서야 장성하여 정치계의 거물로 활동했기에 학위를 비롯해 그가 거쳤던 숱한 훈장과 여러 직함들을 읊었다.
에어버스 헬리콥터스 (유로콥터)
Airbus Helicopters
독일, 프랑스의 헬리콥터 제작 업체. 공식 웹사이트
1. 개요
2. 특징
3. 기종
3.1. 소형 헬리콥터
3.2. 중형 헬리콥터
3.3. 대형 헬리콥터
3.4. 공격헬기
3.5. 다목적 헬리콥터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92년 다임러 크라이슬러 우주항공(DASA)[1]의 헬리콥터 사업부와 아에로스파시알의 헬리콥터 사업부가 합병해서 만든 헬리콥터 제작 업체. '유로콥터'라는 이름을 쓰다가 모기업인 EADS가 <에어버스 그룹>으로 사명을 바꾸면서 2014년 1월 에어버스 헬리콥터스로 바꾸게 된다, 본사는 프랑스의 마리냔에 있다. 계열사로는 여객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에어버스와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체인 에어버스 D&S가 있다.
2. 특징[편집]
이 회사는 연쇄적인 인수합병으로 설립되었다. 일단 1968년도에 설립된 Messerschmitt-Bölkow-Blohm(약칭 MBB)를 1989년도에 다임러AG가 인수해서 DASA 헬리콥터 사업부로 운영하다가 1992년 프랑스 아에로스파시알의 헬리콥터 사업부와 합병해서 유로콥터가 출범했고 다시 에어버스 헬리콥터스로 사명을 개칭했다.
일단 한 모델을 개발하면 계속 개량하면서 몇십년동안 꾸준히 생산하는게 헬리콥터 업계[2]이다 보니 기존 회사들의 생산형을 모두 이어받아서 엄청나게 다양한 기종을 만들고 있다. 현재 제품 라인업은 MBB 시절 생산기종, DASA 시절 개량형, 또 아에로스파시알 시절 생산기종에 이 기체들의 개량형, 후속형들이 모두 있다. 예를 들어 MBB의 주력 제품이였던 Bo-105 경헬기는 DASA 시절을 거쳐서 유로콥터로 바뀐 뒤에도 2001년까지 계속 생산했다. 이후 후속모델로 EC-135를 만들었고, 얼마뒤에 크기를 조금더 키운 파생형 EC-145를 출시했고, EC-145를 미군 납품용으로 또다시 개량한게 UH-72.
거기에 합작 혹은 공동개발도 많이 해서 전세계적으로 이 회사와 연결된 파생형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당장 한국에선 쿠거를 기반으로 수리온을 제작하는데 도움을 줬고 이후 LAH 사업에도 H155모델로 참여 중이다. 인도네시아는 퓨마 계열 헬리콥터를 면허생산하고 있고, 중국과는 1980년대 아에로스파시알 시대부터 에어버스 헬리콥터스인 지금까지 면허생산과 공동개발로 끈끈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런 역사 덕분에 세계 헬리콥터 시장에서 40%의 점유율과 미국에서도 30%이나 되는 점유율을 차지해서 미국의 시코르스키, 벨과 같은 헬리콥터 제작 업체에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미군이 미 본토에서 운용하는 소형 헬리콥터 사업에서 EC145가 선택받아서 UH-72라는 명칭으로 운용하게 되었을 정도다.[3] 또한 유럽합작 다목적 헬리콥터 NH-90의 주요 제작업체이기도 하다.
3. 기종[편집]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DASA에서 만든 헬리콥터와 아에로스파시알에서 만든 헬리콥터, 그리고 유로콥터 시절에 만든 헬리콥터들이 모두 섞여 있는게 특징이다(...).
군용은 뒤에 'M'이 붙는다.
3.1. 소형 헬리콥터[편집]
H120 (단종)
H125 (AS350)
H125M (AS550)
H130 (EC130)
H135 (EC135)
H145 (EC145)
H145M (UH-72:미 육군 납품 모델)
3.2. 중형 헬리콥터[편집]
AS365
AS565
SA 330 퓨마 (단종)
H155 (EC155)
H160
H160M
H175[4] (EC175)
3.3. 대형 헬리콥터[편집]
H215 (AS332 슈퍼 퓨마)
H215M (AS532 쿠거)
H225 (EC225 슈퍼 퓨마)
H225M (EC725 카라칼)
3.4. 공격헬기[편집]
타이거 (EC665)
3.5. 다목적 헬리콥터[편집]
NH90
[1] 이전에는 MBB(메서슈미트 뵐코프 블롬)라는 회사였다.
[2] 이렇다보니 최신 기종이라고 해도 그 원형기체는 1960~70년년대에 등장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신형모델을 하나 개발할려면 비용과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들다 보니 완전히 백지상태에서 새로 개발하는 기종은 거의 없고, 대부분 기존 모델에 최신기술을 적용해서 개량하는게 보통. 이래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으로 만들어보자고 미국에서 시작한게 JMR 사업이다.
[3] 또한 이 사업은 결과적으로 KC-135 170여대를 대체하는 사업인 KC-X 사업에서도 영향을 받아서 에어버스와 노스롭 그루먼과 손잡고 A330 MRTT를 제안을 했고 KC-45라는 기종명칭까지 받았으며 거의 성공하기 전까지 갔었다.
[4] 중국 AVIC와 공동으로 개발했다.
타이거 공격헬기
Eurocopter Tigre
EXPH-0094-07
독일어: Eurocopter Tiger[1](EC-665 Tiger, Der Tiger).
프랑스어: Le Airbus Helicopter EC665 Tigre(Eurocopter EC665 Tigre).
1. 개요
2. 제원
3. 개발
4. 생존성
5. 기동성
6. 공격력
7. 도입
7.1. 독일
7.2. 프랑스
7.3. 스페인
7.4. 호주
7.5. 사우디 아라비아
8. 바리에이션
8.1. UHT Tiger
8.2. Tiger HAP / HCP
8.3. Tiger HAD
8.4. Tiger ARH
9.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10. 개량 사업
10.1. Tiger MkIII
11. 한국의 AH-X 사업
12. 매체에서의 타이거 공격 헬리콥터
1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독일, 프랑스의 유로콥터사에서 만든 공격헬기로 독일연방군의 대전차사양 UHT(Unterstützungshubschrauber Tiger)와 프랑스군의 화력지원용인 HAP(Hélicoptère Appui Protction), 오스트레일리아군의 ARH(Armed Reconnaissance Helicopter)가 있으며 최근 공격형 - 정찰형을 하나로 통합한 HAD(Hélicoptère Appui Destruction)형으로 통합할 예정이다. 무장 탑재량이 AH-64 아파치에 비해 심히 빈약해 보여서 일부 한국 밀리터리 마니아층에게서 AH-64에 비해 성능도 그냥 그런 주제에 가격만 비싼, 가성비가 영 좋지 않은(...) 공격 헬리콥터 취급을 받고 있었고 결국 생각했던 것 그 이상으로 처참한 성능이 사실로 드러났다.
2. 제원[편집]
Eurocopter EC-665 Tiger
개발사
Airbus Helicopters
제조사
Airbus Helicopters
첫 비행
1991년 4월 27일
생산기간
1991년~현재
생산댓수
135대 (2017년 10월달 기준)
배치기간
2003년~현재
전장
동체 : 13.85 m
날개 포함 : 15.82 m
전폭
스텁윙 포함 : 4.53 m
날개 포함 : 13.0 m
전고
3.83 m
회전면적
133 m²
공허중량
3,060 kg
적재중량
5,090 kg
최대이륙중량
6,000 kg
엔진
MTU Turbomeca Rolls-Royce MTR390 터보샤프트 엔진 x2기
엔진출력
Rolls-Royce MTR390
1,303 HP (x2 2,606 HP)
순항속력
230 km/h
최고속력
광학 시스템 탑재 시
290 km/h
광학 시스템 미탑재 시
315 km/h
항속거리
전투시
800 km
외부연료탱크 탑재 시
1,300 km
추중비
0.38 kW/kg
분당상승률
10.7 m/s
실용상승한도
4,000 m
항전장비
Strix HA sight 레이저 거리측정기
Osiris sight 광학 시스템 (로터 상부 탑재)
하드포인트
총 4개소
무장
고정
GIAT 30 30 mm 기관포 x1문
450발
기관포
20 mm 자동포 포드 x1기
로켓
68 mm SNEB 무유도 로켓 포드
Hydra 70 70 mm 무유도 로켓 포드
미사일
AGM-114 헬파이어 x4기 (호주 / 프랑스)
Spike-ER 대전차미사일 x4기 (스페인)
PARS 3 LR 대전차미사일 x4기 (독일)
HOT3 대전차미사일 x4기 (독일)
미스트랄 공대공 미사일 x2기
FIM-92 스팅어 공대공 미사일 x2기 (독일)
승무원
2명 (조종사 1명, 화력관제사 1명)
3. 개발[편집]
베트남전에서 단 두 대의 UH-1B XM-26이 TOW 미사일로 월맹군의 T-55과 여러 표적을 우수한 명중률로 잡는 것을 시작으로 미국이 세계 최초의 본격 공격 헬리콥터 AH-1 코브라를 실용화시키는 등 대전차전에서도 큰 가능성을 보여주자, 소련군의 대규모 기갑부대의 위협에 노출되어있던 유럽 여러나라에서도 대전차 헬리콥터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유럽 국가들은 뛰어난 헬리콥터 개발 기술과 개발 실적에도 불구하고[2], 미국의 AH-1나 AH-64 같은 본격적인 공격헬기를 개발하는 단계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대신에 슈퍼링스#, 가젤#, Bo-105# 같은 경량 헬리콥터에 대전차 미사일과 조준장비를 추가한 무장헬기 단계에 머무른 상태로 70년대를 보내게 되었다.[3]
한 편 미국 AH-1 코브라는 UH-1 무장헬기 버전에서 진화한 기종으로서, 초기 무장헬기는 수송헬기의 호위 및 화력 지원 임무를 주로 수행했다. 따라서 건포드 혹은 도어건을 이용한 기총소사와 로켓탄을 이용한 수송헬기 착륙지의 지역제압이 주 임무였고 자연스럽게도 소련제 14.5mm ZPU-4 같은 공산권의 육안조준식 대공포 와 빈번하게 직접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하지만 AH-1은 단순 호위헬기에 머물지 않았고 대전차미사일 운용을 테스트 하기 위한 XM-26의 실전평가와 AAFSS의 보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AH-1에 TOW를 기본 무장으로 통합 하였고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유럽식의 대전차 헬리콥터와 베트남전에서 기원한 호위 및 화력지원 헬리콥터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바야흐로 공격헬리콥터의 기본 개념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70년대 내내 무장헬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유로권의 헬리콥터 전술 개념은 공격헬리콥터를 완성한 미국에 비해 뒤떨어지게 되었고 이후 미국의 AH-64 개발과 실전 배치에 의해 이 격차에 결정적 쐐기가 박히게 된다.[4]
결국 AH-64가 이미 한참 실전 배치되는 80년대에 들어 와서야 서독과 프랑스는 사실상 공격헬기의 완성체가 된 AH-64의 유럽형 독자모델이 될 타이거의 개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하고 논의 도중 서독의 AH-64 직도입 시도 같은 부침을 겪다가 결국 80년대 말이 되어서야 타이거의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4. 생존성[편집]
케블라 방탄판을 사용하여 동체 주요 부위에 대해 23mm급의 내탄성을 확보했다. 또한 EAP라고 불리우는 추가장갑을 장착했을 시 장착 부위에 대해서는 2000미터 밖이라면 30mm급 기관포에도 대응할 수 있다. 연료탱크는 자동방루(self-sealing) 사양이 기본 채택 되었으며 채프-플레이 디스펜서는 총 32발을 탑재한다.
초기형 AH-1과도 유사하게 얇은 정면 투영면적과 평평한 측면 형상 덕분에 육안 및 광학 센서로부터의 포착 확률과 어느정도 낮은 레이더 피탐률을 달성했으며 또한 기존 공격헬기의 예를 따라 적외선 신호 감소 배기구 설계가 적용 되었다. 열이 배출되는 공기흡입구를 최대한 밀착되게 붙이고, 엔진에 장착되는 적외선 신호 감소장치와 배기구를 처음부터 최대한 동체와 모듈화되게 만들었다. 이런 특징에 힘입어 적외선/열영상 피탐지거리가 일반 헬리콥터의 50% 수준으로 억제하는데 성공했다.
AN/AAR-60 MILDS 미사일 탐지 장비의 경우 KUH-1 수리온에도 채택되었는데 이는 원래 타이거를 위해 개발된 장비이다. 레이더 신호 및 레이저 신호를 수동 탐지하는 기존의 RWR, LWR과는 달리 해당 장비는 미사일 배기열에서 나오는 자외선을 감지한다. 때문에 기존 RWR과 LWR로는 탐지가 여려웠던 IR센서 기반 단거리 SAM과 MANPADS를 효과적으로 탐지하여 경보를 발령하고 자동으로 채프 및 플레어를 투발할 수 있다.
5. 기동성[편집]
유럽 최초로 전동체 탄소 복합재 구조를 도입하여 자중의 77%가 탄소 혹은 탄소-노맥스 복합재이다. 그로 인해 공허중량은 3100kg으로 상당히 낮다. 여기에 유럽 주요 헬리콥터 엔진 제조사들의 합자회사인 MTR(독일 MTU + 프랑스 Turbomeca + 영국 Rolls-Royce)사가 1300shp급 MTR 390 엔진을 타이거 전용으로 개발하여 높은 중량당 마력[5]을 제공한다.
메인 로터는 힌지리스 4엽 로터이며 전용 공격헬기 중에서 힌지리스 로터의 도입은 최초이다. 때문에 높은 중량당 마력과 어우러져 기동성은 매우 뛰어나며 공격헬기로서는 이례적으로 임무 프로파일 중 공대공 임무가 적극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6. 공격력[편집]
대전차 임무를 위해 별도의 대전차 미사일인 TRIGAT의 개발을 시도한 바 있지만 조별과제의 원조 유로권 답게 개발지연과 협력국가 이탈 등의 악재가 속출한 끝에 결국 2012년 이후 독일만이 TRIGAT-LR을 운용 중이다. TRIGAT-LR은 IR이미지센서에 의한 Fire&Forget 방식 운용과 일제사가 가능한 본격적인 장거리 3세대 대전차 미사일로 개발 되었으나 현실은 개발이 지지부진한 동안 경쟁 대상인 헬파이어는 이미 밀리미터파 유도 모델이 추가되고 심지어는 스파이크 대전차미사일 같은 광학-광섬유 유도 복합 방식의 4세대급 미사일이 등장 하면서 빛이 바래게 되었다. 실제로도 유로콥터 공식 홈페이지에는 헬파이어와 스파이크-ER만 지상공격용 무장 리스트에 언급되어 있다.
옵션으로 탑재할 수 있는 터렛형 기관포는 30x113 탄을 사용하는 GIAT(현 Nexter)의 30 M 781 기관포가 장착된다. AH-64의 M230 체인건과 동일한 탄약을 사용하며 포구초속 역시 동일. 발사율은 750발/분 수준으로 625발/분 의 M230에 비해 근소하게 빠르고 장탄량은 AH-64의 1200발에 비해 450발로 비교적 낮다. 이는 사실상 동급 기관포를 새로 개발해서 탑재한 수준이다. 세부 운용시 단발, 10점사, 25점사, 50점사, 완전자동으로 발사모드 변경이 가능하며 개발사는 반동이 적고 보다 정확한 사격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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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당시 터렛형 기관포 옵션을 포기하고 건포드를 운용하기로 한 독일의 경우 RMK-30이라는 신형 30mm 무반동 기관포를 자국군의 타이거-UH에 장착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6] 해당 기관포는 라인메탈사가 개발 했으며 1993년에 개발을 시작하여 1996년 11월 4일에 초도품이 만들어졌고 2001년에 양산이 개시되었다. 비젤 장갑차에 장착된 기관포이기도 하며, 30MM X 230 RMK-30/2, 30MM X 280 RMK-30/1이 있으며, 35MM도 있다. 포구에너지가 무려 200KJ로, 190KJ인 A-10 공격기의 GAU-8 어벤저 30MM 기관포보다 강하며 일반적인 터렛형 기관포에 비해 월등한 직사 성능을 가지고 있다. 자동기관포로써 정밀사격 임무도 맡으므로 정확도도 1KM에서 1.5M다. 장탄수는 30MM가 300발, 35MM가 200발이다. 포구 초속은 AP/30MM X 280탄 기준으로 1,200 m/s다. 무게는 30MM 기준으로 100KG. 발사속도는 분당 300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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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독일군은 현재 예산 문제로 RMK-30 도입은 힘든 실정으로 보이며 당분간 기총은 건포드에 계속 의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7][8]
공대공 무장은 미스트랄 미사일 4발이나 스팅거 공대공 미사일 4발을 달 수 있다. 조작장치는 조종간 위에 있으며. 목표물은 조준기를 수동적으로 조작하도록 하는 조이스틱을 사용하거나 자동 추적기능으로 획득한다.
대전차 미사일 탑재량은 총 8발이다. 다른 공격 헬리콥터(AH-64 아파치)처럼 대전차 미사일을 16발 장착하지는 못하지만 통상 공격헬리콥터는 기지가 아니라도 FEBA의 거점에서 재무장 후 출동이 가능하므로 미사일을 많이 탑재할 이유가 크지 않다.[9]
7. 도입[편집]
7.1. 독일 국기 독일[편집]
독일 연방 육군
36th Combat Helicopter Regiment(Kampfhubschrauberregiment 36, 제36 전투헬리콥터연대)
7.2. 프랑스 국기 프랑스[편집]
프랑스 육군
4th Special Forces Helicopter Regiment (4e Régiment d'Hélicoptères des Forces Spéciales, 제4 특수 항공 연대)
5th Combat Helicopter Regiment (5e Régiment d'Hélicoptères de Combat, 제5 전투 항공 연대)
7.3. 스페인 국기 스페인[편집]
스페인 육군
Attack Helicopter Battalion 1 (제1 전투 항공 대대)
7.4. 호주 국기 호주[편집]
호주 왕립 육군
1st Aviation Regiment (제1 항공연대)
7.5. 사우디아라비아 국기 사우디 아라비아[편집]
12대를 구매할 계획이다.
8. 바리에이션[편집]
8.1. UHT Tiger[편집]
UHT[10] Tiger는 타이거 공격헬기의 독일식 명칭이며 2013년에 총 57기의 헬기가 독일 연방군에 인도되었다.
8.2. Tiger HAP / HCP[편집]
Tiger HAP[11] / HCP[12]는 타이거 공격헬기의 프랑스식(HAP) / 스페인식(HCP) 명칭이며 2012년에 40기의 헬기가 프랑스 육군에 인도되었고 2015년에 Tiger HAP / HCP 형식을 2025년 부터 HAD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할 예정이다.
8.3. Tiger HAD[편집]
Tiger HAD[13]는 Tiger HAP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MTR390 엔진의 출력을 14% 증대시켰으며 이는 최대이륙중량의 증가를 의미하므로 그만큼 더 많은 무장을 탑재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업 링크 및 다운 링크 위성 통신 안테나 설치, 방호능력 증대, AGM-114 Hellfire와 Spike ER 대전차 미사일을 운용 할 수 있게 되었다.
8.4. Tiger ARH[편집]
Tiger ARH[14]는 호주 육군에서 OH-58, UH-1을 기반으로한 건쉽헬기를 교체하기 위해서 도입하였으며 Tiger HAP를 기반으로 MTR390 엔진을 계량하고, Strix sight 레이저 거리측정기를 도입하여 AGM-114 Hellfire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2001년 22기를 도입하였으며 ARH 버전의 타이거는 2004년 12월 15일에 첫 두기가 인도되었고 2010년 6월에 전량 인도되었으며 2011년에 전력화 되었다. 2014년 8월 호주군과 BAE Systems는 70mm FZ 무유도 로켓 발사를 위한 APKWS 레이저 유도 시스템을 설치하기로 계약했다.
9.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편집]
그러나 하드웨어 스펙은 그럴싸 해서 비싼 값은 하지 않나 싶은 소리도 들었지만, 수많은 실전경험과 그에 비례한 빠른 개량으로 성능이 갈수록 높아지는 미국과 러시아의 공격 헬리콥터와 달리 온갖 수많은 결함과 개량 미비로 없으니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한 깡통이다.
2016년에 호주 국방백서에서 2020년대 중반에 타이거를 다른 기종으로 대체할 것이라 발표하였는데, 이 기사를 보면 주요 문제점으로 아주 높은 유지비, 낮은 가동율, 로켓포드 오작동, 4km의 유효탐지거리를 가진 저열한 열상장비, 데이터링크의 부재 등등 FOC(완전작전능력 선언) 시점에서 60가지 중요 성능미달점을 포함해 총 76가지(...)의 성능미달점이 있는것으로 밝혀졌다.
도입한지 20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15] 호주군은 타이거 헬기를 이제 거의 포기하다시피 해버렸고, 이를 보다 못한 호주 정부는 2019년 7월 현재 보유하고 있는 22대의 타이거 공격헬기를 대체할 LAND 4503 프로그램을 개시했다. 이에 보잉과 벨은 각각 AH-64E 아파치 가디언과 AH-1Z 바이퍼를 제시하였고, 에어버스는 타이거 공격헬기의 업그레이드를 제안하였지만(...) 이미 호주 정부에게 단단히 찍힌 타이거의 처참한 성능으로 인해 미국제 헬기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호주는 랜드 4503 사업에서 AH-64E 아파치 가디언을 우선협상자로 선정했다. 어찌보면 동일 시기 처음부터 AH-64 계열로 기종을 구입했다면 E형 업그레이드로 충분했거나, 추가 도입으로 전력 강화의 기회가 되었을텐데 타이거를 도입한 덕분에 멀리 돌아간 셈이다.
더 처참한건 호주만 이러면 모를까, 타이거 개발국인 프랑스와 독일도 영 좋지않다. 독일은 가동률이 53기 중 11기만 가동하는 상태고, 프랑스는 전체 기체의 4분의 1만 가동 가능하다고 한다. 더군나나 독일은 이 아까운 걸 말리에서 작전 하다가 한기를 추락으로 날려 먹었다.
10. 개량 사업[편집]
10.1. Tiger MkIII[편집]
2016년, 타이거 MkIII라고 불리는 개량 사업이 발표되었다. 프랑스는 개량을 위해 스페인, 독일과 협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2022년 3월, 드디어 타이거 MkIII 개량 사업의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 계약에 따라 프랑스의 타이거 42대[16]와 스페인의 18대의 업그레이드가 진행되며, 향후 독일이 나중에 MkIII 개량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고 한다.
첫 번째 MkIII 개량형은 2025년 취항 비행 예정이며 프랑스에는 2029년, 스페인에는 2030년에 첫 인도가 이루어질 예정이다.
각 항공기는 프랑스, 스페인, 독일 각국에서 개량 작업이 이루어질 계획이다.
타이거 MkIII의 표준 구성으론, 사프란 Strix NG 조준경, 탈레스 FlytX 항공 전자 장비, Topowl DD 헬멧 장착 조준경 디스플레이, 인드라 IFF 개량, 탈레스 GNSS 및 사프란의 관성 항법 시스템의 통합이 포함된다.
통신 제품군은 탈레스의 Contact/Synaps 라디오 및 유인/무인 팀 구성 전용 데이터 링크로 업그레이드하고, 스페인의 경우 Link16 및 SATCOM 기능이 포함된다.
스페인의 타이거 MkIII는 인드라가 제공하는 전장 관리 시스템과 대응책을 장착할 예정이며, 프랑스의 타이거는 MkIII에는 ATOS의 전장 관리 시스템과 탈레스가 제공하는 대응책이 장착된다.
프랑스의 새로운 무장 구성으론 MBDA MAST-F[17]와 미스트랄 3 공대공 미사일이 포함되고, 스페인의 경우 새로운 기능에는 70mm 유도 로켓과 새로운 공대지 미사일이 포함된다.
11. 한국의 AH-X 사업[편집]
2011년 7월 한국의 AH-X 사업의 후보기종 중 하나로 선정되지만 입찰하지는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의견은 대체로 둘로 나뉜다.
첫째, 한국 육군의 강력한 AH-64 아파치 선호 때문에 경쟁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둘째, 예산이 너무 적어 현실적인 사업이라고 보지 않아서이다. [18]
12. 매체에서의 타이거 공격 헬리콥터[편집]
007 시리즈 골든 아이에서는 제니아 오나토프가 프랑스의 타이거를 탈취해서 EMP에도 견디는 충격과 공포 다 그지 깽깽이들아 의 성능을 보여주며 러시아 방공망을 뚫고 들어갔다. 나중에 야누스가 제임스 본드와 세베르나야 비밀기지의 생존자 나탈리아 시모노바를 함께 추적 미사일로 날려버리려 했으나 제임스 본드가 사출좌석을 작동시켜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헬리콥터만 박살났다.[19]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는 '다운폴 작전'의 주 공격 헬리콥터로 등장하지만 심심하면 미믹의 스피어 탄에 맞아 박살나는게 일과로 나온다.
EC-665 Tiger UHT
WT EC-665 Tiger ...
WT EC-665 Tiger ...
EC-665 타이거 UHT
EC-665 타이거 HAD
EC-665 타이거 HAP
워썬더에 독일연방군 소속 EC-665 타이거 UHT, 프랑스군 HAD, HAP로 나온다.
워게임: 레드 드래곤에서 서독 소속 PAH-2 Tiger, 프랑스 소속 Tigre HAD, HAP이 등장한다. 고증상 등장할 수 없는 개발, 도입연도이지만 1991년 초도비행 날짜로 우겨서 어거지로 도입했다. 프랑스 게임 제작사의 국뽕을 한사발 얹어서 OP 스텔스 헬기로 등장한다.
[1] 여담으로 독일어식으로 읽으면 '티거'가 된다.
[2] 당대 최고속 기록을 세운 링스와 최초의 힌지리스 로터를 개발한 Bo-105가 대표적이다.
[3] 다만 서유럽 국가들도 70년대에 결코 무장헬기에 만족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애초에 Bo-105의 HOT 대전차미사일 장착형은 야간작전능력이 전무해서 서독 조차도 이러한 무장헬기를 징검다리 정도로만 생각했다.
[4] 미국-유럽간 공격헬리콥터 격차의 유일한 예외가 바로 이탈리아의 망구스타이다.
[5] 공허중량 5500kg급의 AH-1Z와 비슷한 수준이다. 애초에 AH-1Z가 비교적 낮은 공허중량에 AH-64용 고출력 엔진2기를 조합하면서 탑 클래스의 중량당 마력을 달성했다.
[6] 독일은 초기 타이거 도입시 대전차전 용도로 도입할 계획이었다. 따라서 고정터렛 기관포는 옵션에서 제외되었다.
[7] FN사의 50구경(탄약은 12.7 x 99mm nato탄.) M3P 기관총을 건포드로 만든 물건이다. 400이라는 숫자처럼 장탄수는 400발이며, 250발을 내장하는 HMP-250도 있다. 제작사인 FN의 홈페이지에 가 보면 공격헬기 말고도 다양한(?) 항공기의 장착 예시를 볼 수 있다. #
[8] 한국 밀매들에게는 상당히 익숙한 물건이기도 한데, 바로 KA-1에 탑재되는 건포드이기 때문이다. 다만 KA-1은 250발이 내장된 버전인 HMP-250을 운용하고 있다.
[9] 서방권 공격 헬리콥터중 타이거보다 무장가능중량이 큰 것은 AH-64 아파치나 AH-1Z 바이퍼뿐이다.
[10] Unterstützungshubschrauber Tiger, 타이거 지원 헬리콥터.
[11] Hélicoptère d'Appui Protection, 화력지원용 헬리콥터.
[12] Hélicoptère de Combat Polyvalent, 다목적 전투용 헬리콥터.
[13] 프랑스어 : Hélicoptère d'Appui Destruction, 스페인어 : Helicoptero de Apoyo y Destrucción, 지원 및 공격 헬리콥터.
[14] Armed Reconnaissance Helicopter, 무장 정찰 헬리콥터.
[15] 위에 봤다시피 2004년에 도입했다!
[16] 추후 25대 추가 개량 가능
[17] 미래 전술 공대지 미사일
[18] 유로화 환율의 영향도 있었다는 일부 미확인 정보도 있다.
[19] 실제 타이거에는 저런 장비가 없다.
[잡담] 유니콘 프로젝트 4 월드 그레이트 게임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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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치를 독일의 고위 귀족의 후예로 설정했다니....... 진짜 작가님의 머리를 열어보고 싶네요......
제발......그것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