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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과 팬픽션은 보통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집니다.
첫째. 작품에 대한 반발, 작품의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면모에 대한 적대적 감성
둘째. 작품에 대한 애호. 작품이 나에게 채워준 것들을 칭송하는 찬가.
이 팬픽 단편선의 저자는 다들 이영도 빠돌이들이니, 당연히 이 앤솔로지 역시 후자를 따릅니다.
제목이 첫 단편선인 [숲의 애가] 인데, 좀 직설적으로 말하면 [눈마새 애가] 가 되겠군요.
1. 숲의 애가.
여름과 케이건의 첫 만남을 다루는 단편입니다. 가장 스탠다드하고 원작에 충실하며, 가장 담백한 맛. 이영도가 이렇게 친절한 사람 아니란 점 빼면 원작과 가장 일치하는 작품입니다.
팬픽의 완성도라는 의미를 '가장 원작에 충실하며 튀지 않는다' 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 단편선 중 최고로 올려줘도 될 충직한 단편.
+ 나가 멸망시키자.
2. 극을 이끄는 달빛
극연왕과 레누카의 이야기. 첫 이야기보다 확장성이 넓지만 과거로의 확장입니다. 원작의 내적으로 연장되는 측면에선 나쁘진 않은 편.
하지만 원작의 문체를 구현하려던 시도가 다소 난잡하고 두서없어진 경향이 좀 있군요.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의 개입으로 극의 규모를 늘리려던 시도보다는, 주역인물 두 사람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래도 극연왕 X 레누카는 신기했어.
3. 시체부활자
이 팬픽의 시리즈 중 가장 독특한 물건인데, 가장 읽기 고역스러웠지만 가장 기묘했던 이야기였습니다.
전반적인 내용은 '환상계단'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작가가 극한으로 탐구한 이과생 레포트. 피마새 이후 엄청난 시간이 지나 현대화된 새 세계관을 그리는데, 내용의 대부분은 학부생이 이영도 스타일로 레포트를 풀어 쓴 듯 하며, 결말은 퓨쳐 워커 스럽습니다. 즉 절단신공.
그래도 대학원생을 자기 안에 군령시켜서 연구시키는 교수 이야기는 재밌음.
+타 단편들이 다소 '얌전'한 부류였는데, 2차 창작 특유의 재해석이 유난히 부각되던 단편 중 하나였습니다.
4. 별철은 녹슬지 않아
가장 재미있게 읽은 이야기입니다. 실수로 자신의 무기, 반려, 성씨를 연못에 빠뜨린 레콘 이야기.
매끄러운 문체, 원작의 줄거리에 집착하지 않은 재미난 소재, 깔끔한 결말, 여러모로 외전 팬픽의 가장 좋은 판본에 이 단편선의 개인적인 1순위 작품입니다.
이영도 작품들의 특징인 해학적이고 유쾌한 작중인물들을 정확하게 짚어낸 점에선 가장 원작 구현도가 높기도 합니다.
+그냥 엄청 재밌는 얘기라서 길게 평을 쓸 필요가 없어요. 개졸잼. 끝.
5. 황혼의 피, 새벽의 눈물.
6. 왕을 위한 장송곡
드디어 나왔다. 2차 창작이라면 다들 하는 그거.
'원작 에필로그 이후 캐릭들 이야기 쓸거야!!!!' + '이 커플링 이어줄거야!!!'
[황혼...]은 엔딩 이후 케이건을 위해 바라기의 칼날을 제작하는 사모의 이야기. [왕을 위한 장송곡]도 엔딩 이후 케이건을 찾는 사모의 이야기.
본질적으로 '케이건 X 사모가 진리 아님??' 이라는 점이 동일하기에, 함께 묶어 후기를 쓰겠습니다.
[황혼]은 피마새와 연결점이 없다고 딱 잘라서 넘어가는게 눈에 띄는 작품이었습니다. 이건 눈마새 팬픽이지 새 시리즈 팬픽션이 아니니....
[장송곡]은 [황혼]의 더 짧고 굵고, 더 축약된 버젼입니다.
감수성을 담은 물잔이 넘친 듯 하지만(뭐 케이건 X 사모 팬픽이 그렇지) 본질적으로는 유려하며, 이런 원작 연장의 스토리는 항상 수요가 좋았죠.
그렇기에 '이거 원작보다 좀 오버한 듯 한데요?' 라는 원작 구현도에선 미묘한 의미로 삐끗한 물건이기도 하지만
알게 뭡니까. 지금 데오니 달비한테 키베인이 청혼했다고!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총평:
고퀄에 작가들이 눈마새에 바치는 애정이 잘 느껴지는 좋은 팬픽 앤솔로지. 그리고 커플링에 환장한 팬들의 욕심도 슬슬 묻어나오는군요.
새 시리즈 팬이라면 한번 구매해도 나쁠 것 없는 물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