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다.
장재현 감독의 오컬트 3부작은 사실 메시지와 의도가 강한 영화이다.
검은사제들, 사바하, 파묘 셋 모두 '우리 사회의 숨은 어둠'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였다.
오컬트라는 소재를 사용한 이유도 여기에서 나온다.
물론 장재현 감독이 개인적으로 오컬트라는 장르를 좋아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장재현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회의 숨은 어둠'은 오컬트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심지어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더 나이가 그런 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으로 항상 우리는 불편하게 하는 어떤 것.
다만 유념해야 할 것이, 이 '어둠'이 반드시 '악'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검은사제들은 '악'에 대한 이야기였다.
실제로 '우리 사회의 숨은 어둠'은 그 실체가 '악'인 경우도 많으니까,
'악으로서의 어둠'에 대해서도 다루긴 해야한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사바하에서부터는 그 실체가 모호해진다.
사바하라는 영화의 매력과 완성도는 바로 이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한' 지점에서 나온다.
파묘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물론 파묘에서 조명하는 '어둠'은 분명 '악'에서 시발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파묘는 그 '악' 자체를 조명하지 않는다.
영화는 문제의 시발점이 된 '악' 그 자체에는 작위적일 정도로 무관심하다.
영화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악'이 남기고 간 '상처'이다.
문제는 '상처'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라는 것이다.
'상처'를 남긴 악은 이미 해소되었다. 하지만 악이 해소된 이후에도 상처는 계속 남는다.
피해자에게 계속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는 상처 역시 '나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처'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그냥 그런 것일 뿐이다.
'상처'는 그런 면에서 우리 무속의 핵심 개념인 '한'과도 일맥상통한다.
많은 경우 '한'은 악으로부터 야기된다.
하지만 '한'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한'은 문제의 근원이 된 악의 흔적일 뿐이다.
최초의 악이 해소되어도 '한'은 남는다.
그렇기에 '한'은 퇴치의 대상이 아니라 어르고 달래고 감싸안아야 할 '치유'의 대상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파묘'의 주인공이 한국의 무속인 것도 자연스럽다.
검은사제들은 선과 악의 싸움에 대한 이야기였고,
절대적 악을 퇴치하는 이야기에는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이 가장 어울린다.
사바하는 단순한 선과 악을 이야기가 아니라 그 모호한 경계선에서
선과 악의 구분조차 뛰어넘는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였고, 이런 이야기에는 불교적 세계관이 가장 어울린다.
하지만 파묘는 상처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고, 여기에는 한국의 무속이 가장 어울린다.
결론적으로, 파묘는 영화 자체가 거대한 한풀이요, 이를 위한 굿판이다.
파묘는 반일영화인가?
개인적으로 전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반일 영화라고 평하는 사람은 영화를 ㅂㅈ 않았거나, 영화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소재 자체에 반일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정작 장재현 감독은 이 소재를 전혀 정치적으로, 그러니까 '반일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일본은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소재로 사용될 뿐이다.
감독에게 반일 프로파간다적 의도가 있었다면,
이 영화는 검은사제들처럼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구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 악에 대한 묘사가 강해질 수 밖에 없다.
그 악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지를 충분히 묘사해야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구도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일본을 '악'으로서 묘사하는데에 지극히 무관심하다.
파묘의 의뢰인인 친일파 집안은,
친일파의 후손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뿐 전혀 '악인들'로 묘사되지 않는다.
의뢰인 역시 아들을 살리고 싶어하는 한 사람의 평범한 아버지일 뿐이다.
친일파의 후손이 부유하게 사는 모습 자체가 아니꼬울 수는 있어도,
그들 자신이 악인이라고 느낄만한 그 어떠한 묘사도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적 플롯에서 그들은 단지 '조상을 잘못 둔 죄'를 가졌을 뿐인 피해자로 묘사되는 장면이 훨씬 더 많다.
심지어 의뢰인도 주인공들도 모두가 살리고자 하는 대상은 갓난아기다.
아무리 반일 감정이 심한 사람일지라도,
친일파 집안의 증손자로 태어났을 뿐인 그 갓난아기를 '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의 중간보스격인 친일파 혼령은 분명 악한 인간일 것이다. 친일파니까.
하지만 영화는 이 명백한 악인을 다룰 때조차 그의 살아생전 악행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가 얼마나 끔찍한 악인이었는지,
그가 얼마나 심한 친일 행위를 했고 그로 인해 민족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를 조금도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분명 악귀이지만,
영화는 그가 악귀가 되어버린 이유조차도 '원래 악인이어서'라기보다는
'일제에 의해 이용당하고 그 결과로 오랫동안 고통받아서'에 가깝게 묘사한다.
영화의 최종보스인 장군 오니조차 그렇다.
그는 분명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존재이지만,
영화에서 그가 '악한' 존재로 묘사되었느냐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장군 오니는 오히려 기계적일 정도로 자신에게 강제로 부여된 사명만을 고지식하게 수행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마치 코딩된대로 작동하기만 하는 프로그램처럼,
음양사에 의해 강제로 주입된대로 주어진 좌표에서 쇠말뚝으로의 역할만을 수행하는 존재일 뿐이다.
분명 남산 신사에 모셔준다고 했는데 음양사에게 속았다며 분통을 터트리는 장면에서는
오히려 이 장군 오니조차 일종의 이용당했을 뿐인 피해자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결국 이 영화의 메인 빌런은 일제, 그 중에서도 음양사 무라야마 준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앞서 말한대로 이 '메인 빌런'에게는 철저히 무관심하다.
영화는 일제의 만행을 묘사하지 않는다.
음양사 무라야마 준지 역시 과거 회상으로만 잠깐 등장할 뿐이다.
이들은 영화의 등장인물이 아니다. 그저 설정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반일 영화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감독이 이 영화를 반일 영화로 만들고자 했다면,
의뢰인인 친일파 후손들은 더 악랄하게 묘사되었을 것이다.
그런 짓을 당해도 싼, 조상이나 다를 바 없는, 자업자득인 사람들로.
그리고 일제와 그 앞잡이인 친일파 조상의 악행을 묘사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을 것이다.
이야기 상 일제는 악이 맞다. (그리고 실제 역사적으로도 맞고.)
그러나 일제는 말 그래로 '설정 상으로만 존재하는' 악일 뿐, 영화의 전개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이 영화는 '주인공들이 일제라는 악을 물리치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들이 일제라는 악이 남기고 간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의 후반부가 김빠진다고 느끼는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피해자들이 잔뜩 나온다. 그런데 빌런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빌런은 있는데 영화에 등장하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피해자들이 빌런을 물리치는 내용이면 단순하고 명쾌하고 시원할텐데,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영화의 메인 빌런 역할이었어야 할 장군 오니가 생각보다 빌런스럽지 않은 시점에서,
이 영화는 일반적인 작법을 벗어나버린다.
빌런은 있으나, 그 빌런은 이미 과거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현재의 주인공들이 물리치고자 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그 빌런이 남기고 간 흔적, 즉 '상처'일 뿐이다.
어쨌든 이 '상처'가 현재까지도 계속 고통을 남기고 있으니, 이 '상처'를 뿌리뽑긴 해야한다.
하지만 상처가 고통스럽듯이, 상처를 뿌리뽑는 과정도 고통스럽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는 피해자들 밖에 없다.
의뢰자인 친일파 집안도 그저 피해자였을 뿐이다.
친일파 악귀나 장군 오니도, 물론 그들은 가해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어떤 의미에선 철저하게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피해자이기도 하다.
주인공들도 당연히 피해자들이고, 그 밖에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모든 한국인들도 피해자들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무속의 한풀이도 그런 것 아닌가.
한을 품은 귀신을 앉혀 놓고, 음식과 술을 먹이며 좀 달래 놓고,
억울한 거 다 털어놓게하고, 다 들어주고, 다독여주고,
그리고는 '하지만 억울해도 어쩌겠소. 그래도 망자는 갈 길 가야하지 않겠소.
언제까지 이승에서 한만 품고 살아갈 순 없지 않겠소. 여기서 다 풀고 편안한 곳으로 가소.'라고 하는 거.
상처는 계속 남아서 피해자를 고통스럽게 한다.
하지만 상처를 남긴 '악'은 이미 과거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분하고 원통하고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과거의 존재를 다시 현재로 불러와 벌할 수는 없지 않는가.
어쩌겠는가. 산 사람은 상처를 치유해가면서 계속 살아가는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파묘는 그냥 그런 이야기다.
그래서 맥이 빠지지만, 어쩔 수 없다.
피해자들만이 남아서 서로 다독이며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니.
개인적으론 반일 영화는 맞다고 생각함. 다만 이걸 '반일이 소재에 들어갔을 뿐 강도는 낮다. 그러니 반일 영화라고 할 수 없다' 와, '반일이 소재에 차용되었다면 일단 반일영화는 맞다.' 의 시선 차이 정도로 볼 뿐이지. 그리고 사실 반일 영화 민족주의 영화 애국영화 이거...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게 시달렸으면 반일영화 몇개 나올 수 있지.
상처와 그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 이런 해석 좋네요
ㅇ
분석은 추천해줘야지.
개인적으론 반일 영화는 맞다고 생각함. 다만 이걸 '반일이 소재에 들어갔을 뿐 강도는 낮다. 그러니 반일 영화라고 할 수 없다' 와, '반일이 소재에 차용되었다면 일단 반일영화는 맞다.' 의 시선 차이 정도로 볼 뿐이지. 그리고 사실 반일 영화 민족주의 영화 애국영화 이거...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게 시달렸으면 반일영화 몇개 나올 수 있지.
글을 참 잘쓰시는 것 같아요 멋집니다.
후반부 김빠진다, 호불호가 갈린다기에 궁금했었는데, 이런 이유였군요. 적당한 스포로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을 것 같네요.
상처와 그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 이런 해석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