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기괴괴)슬픈 부모자식
…숫자들이 죄다 나빠져 있었다. 혈압도 높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높다. 재검사 필요?
‘에이, 당장 죽기야 하겠어, 재검사까지는 안 해도 되겠지’ 하고 강한 척해 봐도, 조금은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결과를 보고 주변에서 운동 좀 하라고 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집 반려견이랑 같이, 출근 전에 한 번, 퇴근 후에 한 번씩 산책을 하기로 했다. 이러면 돈도 안 들고 일석이조다. 헬스장 다니는 것도 왠지 부담스럽고. 게다가 작심살인인 나도, 개와 같이 하는 산책이라면 어떻게든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 개는 이른바 대형견이라 산책이 쉽지 않다. 자세한 얘기는 생략하지만, 뭐 “장난꾸러기”라고 하면 대충 감이 올 거다.
장난꾸러기 대형견 산책은 힘들다. 쉬는 날에는 차를 몰고 사람 없는 곳까지 데려가 산책시키곤 했지만, 출근 전에 그럴 순 없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산책 코스가 몇 군데 있는데, 그중 하나에 강둑을 정비해서 만든 공원이 있다. 소위 말하는 생태공원라는 곳이다. 제방 위에는 산책로가 정비돼 있고, 둑을 올라가면 눈 아래로 공원이 펼쳐진다. 공원 안팎으로 하천 숲이 펼쳐져 있어 자연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인기 스폿이다. 여담이지만, 계절이 되면 고령자들이 조류 관찰을 하겠다고 고가의 카메라를 잔뜩 들고 와서 일종의 자랑 대회를 벌이는 걸로도 유명하다.
그렇게 인기 있는 장소라 해도, 이른 아침 6시 전후라면 아직 사람도 적고, 신경 쓰지 않고 산책하기 좋기 때문에 나는 이곳에서 산책을 시작하기로 했다.
계절은 초가을, 아침엔 조금 쌀쌀한 시기. 산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어느 모자를 본다. 세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와 유모차를 미는 엄마라는 조합. ‘새벽부터 산책이라니, 엄마 정말 대단하네’ 같은 생각을 하면서 멀찍이서 바라봤다. 엄마는 옅은 연두색 가디건에 하얀 스커트, 머리는 어깨까지 오는 길이. 복장으로 봐서 30대 중반쯤이려나 싶었다.
남자아이는 빨간 점퍼에 같은 계열 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이 바지와 같은 계열의 색을 한 유모차.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없었는데도 이상하게 유난히 인상에 남았던 기억이 있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다시 그 모자를 보게 됐다. 신기하게도 지난번 봤을 때와 옷차림이 완전히 똑같다. 그 후로도 여러 번 그 모자를 마주치게 됐는데, 이상한 점은 매번 옷이 똑같다는 거였다. 그 옷을 엄청 좋아하나, 아니면 ‘산책할 땐 이 옷’이라고 정해 둔 걸까, 혹시 생활이 빠듯해서 옷이 별로 없나? 아니면… 설마 유령? 같은… 그 정도의 망상을 볼 때마다 하곤 했다.
계절이 겨울로 바뀌었을 즈음, 우연히 일찍 눈이 떠진 날이 있었다.
다시 잠들면 개 산책이 귀찮아질 것 같아서, 거의 막 깨어난 채로 개를 데리고 강둑으로 향했다. 강둑 근처에는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고, 여명빛이 희뿌연 안개를 주황색으로 은근히 물들이고 있었다. 너무나도 환상적인 풍경에 잠시 발을 멈추고, ‘저승이 있다면 이런 곳일지도 모르겠다’ 할 정도로 신비로운 광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둑을 올라 공원을 내려다보니, 그곳에 그 모자가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추운 날이었는데도, 초가을부터 변함없는 그 옷차림…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그날만큼은 등골이 오싹했다. 이런 기온에 저렇게 얇은 옷은 아무리 그래도 아니지 싶었다. 가볍게 ‘유령인가?’ 라고 생각했던 게, 현실감을 띠기 시작한 듯한 느낌이었다.
희고 환상적인 공원 안을 모자는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들을 뒤쫓았다.
조금 무섭긴 했지만, 호기심이 더 컸다. 정말 유령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모자의 뒷모습을 보며 거리를 줄여 나간다. 발걸음은 여전히 느릿느릿했다.
모자는 산책로 오른쪽에 있는 휴게소의 정자 안으로 들어갔다. 앞쪽의 덤불에 가려져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나는 분명 그들이 정자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여기까지 읽은 눈 밝은 사람이라면 ‘어차피 사라졌다 이런 얘기겠지’ 싶을 거다.
맞다, 예상대로 모자의 모습은 정자 안에 없었다. 덤불에 가려졌다고 해도, 정자 근처에는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다. 정자를 관통해 나간다 해도 잡목숲이 있을 뿐이고, 그것도 유모차를 밀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안개가 짙다 해도 모자의 모습은 계속 보였고, 정자로 들어가기 직전 모자와의 거리가 십몇 미터 정도였던 걸 생각하면, 설령 산책로로 돌아섰다 해도 내가 놓칠 리는 없다.
역시 유령이었던 건가… 아니, 그래도 내가 착각한 걸까…? 반신반의한 채 찜찜함을 안고 산책을 재개하는데, 앞쪽에서 노인이 한 사람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노인의 인사에, 나는 얼결에 그 모자에 대해 물어봤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죄송한데, 이 앞에서 유모차를 미는 여자를 못 보셨나요? 세 살쯤 된 남자아이와 같이 있었을 텐데요.”
“계속 걸어왔지만 그런 모자는 못 봤네. 그 사람들이 어쨌길래?”
“아뇨, 별건 아니고요. 감사합니다.”
노인은 수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봤지만,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없었다. 애초에 거짓말할 이유도 없을 테고. 그 모자의 정체는 결국 알 수 없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아마 유령 쪽이겠지’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 후 한동안 모자를 보지 못했다. 연말이 다가올 무렵, 회사도 무사히 업무를 마감하고 나는 겨울 휴가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개 산책에 쓰던 차를 아버지가 급히 쓰게 됐다. 어디로 데려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차를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시간은 저녁… 서둘러야 어두워지기 전에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생태공원로 향했다.
겨울 해는 빨리 져서 오후 4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이미 어둑어둑했다. 하천 숲으로 둘러싸인 공원 안은 가로등도 하나 없어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래서 공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둑 위에서만 산책을 끝낼 생각으로 걷고 있었는데.
저기 그 모자가 있었다…
해 질 무렵의 어스름한 공원 안을, 언제나와 똑같은 옷차림으로,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걷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걸 느꼈다. 해가 떨어지기 직전의 공원,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내는 가운데,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는 그들. 만약 정말 유령이라면… 하는 공포와, 그렇더라도 정체를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내 안에서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나는 개와 함께 비탈을 뛰어 내려갔다. 공포와 호기심의 저울은 결국 호기심 쪽으로 기울었다.
개가 볼일을 보거나 냄새를 맡느라 시간을 끄는 통에 약이 오르면서도, 모자와의 거리를 좁혀 갔다. 전과 거의 같은 상황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안개가 없다는 것 정도.
어둑한 가운데, 모자는 다시 정자 안으로 사라졌다. 바로 앞에서 그 모습을 놓쳐 버렸다.
“거 봐라, 네가 질질 끌어서 따라잡지 못했잖아.”
개에게 투덜대 봐도, 녀석은 헥헥거리며 숨만 쉬고 모르는 척이다. 시선을 다시 돌려 보니, 조용히 우뚝 서 있는 정자의 으스스함에, 쫓아온 걸 후회했다. 찬바람에 잡목숲이 자아— 하고 크게 흔들린다. 몇 미터만 더 가면 정자 안을 확인할 수 있을 텐데, 공포 영화 한 장면 같은 분위기에 눌려 나는 그 이상 발을 떼지 못했다.
퐁… 퐁… 퐁…
불쑥 작은 고무공이 이쪽으로 통통 튀어왔다.
“죄송한데, 공 좀 주워 주시겠어요?”
정자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라진 줄 알았던 차에 말을 걸어오니 순간 움찔했지만,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에 조금 안도했다. ‘뭐야, 유령은 아니었구나’ 하고. 나는 굴러온 공을 집어 들었다.
“죄송한데, 공 좀 주워 주시겠어요?”
공을 집어 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마치 재촉하듯 엄마가 같은 말을 했다. ‘그렇게 급하면 직접 가지러 나오시죠’ 하는 짜증이 조금 났다. 그때 개가 갑자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적의에 찬 낮고 굵은 으르렁거림.
“야, 왜 으르렁거려.”
개를 달래며 나는 공을 살살 던져 주었다. 정자를 향해 천천히 튀어 가던 공은, 힘이 부족했는지 중간쯤에서 멈춰 버렸다.
“죄송한데, 공 좀 주워 주시겠어요?”
아, 네네. 애매한 곳에 던져서 죄송합니다. …아니 그쪽이 더 가깝잖아요, 직접 가지러 나오세요 좀.
정자 안에서는 아이도 엄마도 나오는 기척이 없었다. 유령이냐 아니냐 같은 건 싹 잊어버리고, 그 뻔뻔함에 화가 치밀었다.
으르렁거리던 개가 갑자기 폭발하듯 짖어댔다.
“야, 짖지 마! 목소리도 큰데.”
나는 개를 더 달래며 투덜거리면서 공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개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려 하지 않았다. 억지로 끌고 가 공을 다시 집어 들었다.
“죄송한데, 공 좀 주워 주시겠어요?”
기계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 같은, 생기 없는 똑같은 말투에 나는 온몸이 소름 돋았다. 사실 개가 짖기 시작한 이유를 나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나는 정자를 살짝 들여다봤다. 그 안에는 테이블과 벤치만 있고, 아무도 없었다.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한다…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멈춰 서 있었다. 다만, 손에 쥔 공이 싸늘하게 차갑던 것만은 뚜렷이 기억난다.
“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갑자기, 정자 안에서 남자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끄러워! 울지 마! 넌 왜 맨날 울기만 하냐고! 울지 좀 마!”
아이의 울음에 이어, 엄마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어느새 개도 짖기를 멈추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과, 그것을 덮어버릴 듯한 엄마의 고함이, 눈앞의 텅 빈 정자에서 울려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언제나 언제나 ○○인 거야!!!!”
(※○○ 부분은 잘 들리지 않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탈兔처럼 도망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비명을 지르지 않는구나 싶을 만큼, 거의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거의 깜깜해진 공원을 개와 함께 그저 죽어라 달렸다. 뒤에서는 엄마의 고함과 아이의 울음이 들려왔다. 거기에 아기 울음소리도 섞여 들린 것 같았다.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더 뛰면 쓰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달렸다.
둑 위로 뛰어올라간 지점에서 한계에 다다랐다. 아니, 오히려 여기까지 잘도 뛰어왔구나 싶을 정도로 숨이 턱까지 차올라 주저앉았다. ‘여기서 따라잡혀 무슨 일을 당해도 이제 어쩔 수 없지’ 싶을 만큼 한계였다. 다행히도 그 모자는 쫓아오지 않았다.
그 모자를 본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 얘기를 써 볼까 생각하게 된 건, 그 일 이후 얼마지 않아 이직을 계기로 이사를 갔다가, 몇 년 만에 다시 이 지역을 방문하게 된 게 계기였다. 문득 그 생태공원이 떠올라 발걸음을 옮겨 봤더니, 당시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그 모자가 누구였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내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유령 같은 존재였을까. 누군가의 장난이었을까.
다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근처의 신도시 같은 주택가에, 육아에 지쳐 결국 아이를 데리고 동반 자살을 한 엄마가 있었다고. 그 엄마는 자주 이 생태공원에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며 산책 나온 모습이 목격되곤 했다고 한다.
그게 그 모자였는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왜 내 앞에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다. 유령이라고 한다면, 우연히 파장이 맞았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 정자에서의 일은 정말 끔찍했다. 진짜로 무서웠고, 다시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반 자살한 모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게 그 모자였다고 한다면, 어쩌면 모습을 드러냈던 건 누군가 알아봐 주길 바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고함은 아이를 꾸짖는 말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절규였는지도 모르겠다.
내 멋대로인 해석이라는 건 나도 안다. 그래도 만약 그 모자가 아직도 그 공원을 헤매고 있다면, 부디 하루라도 빨리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왜냐하면 내가 본, 공원을 산책하던 그 모자의 모습은, 누가 봐도 다정해 보이는 부모와 아이의 모습이었으니까.
지금은 나도 아이를 가진 입장이기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저승에서는 고통 없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