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和の尊さ、忘れないで 終戦2日後に298人が集団自決 「旧満州開拓団」の記憶を語り継ぐ父子(神戸新聞NEXT) - Yahoo!ニュース
태평양전쟁 말기, 오늘의 효고현 토요오카시 단토초으로 부터 구 만주(중국 동북부)에 입식했고, 구 소련의 침공을 받아서 종전 이틀후에 집단 자
결로 몰린 "타카하시 무라 만주 개척단"에 대해서, 전후 태어난 2세 세대가, 당사자의 기억을 이어가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이 적어지고 있는 와
중에, 유족회 회장을 맡고 있는 야마시타 유키오씨(91)의 장남 후미키씨(64)는 10년 가까이, 아버지와 함께, "평화의 소중함을 잊지마라" 이라고
젊은 사람들에게 호소를 하고 있다.
구 다카하시 무라에서는 전시중인 1994년(쇼와 19년) 3월, 식량 확보를 목표로 하는 농업 이민정책의 일환으로 103세대 476명이 "제13차 대효
고 개척단" 으로써 구 만주에 들어갔다.
하지만, 전황 악화로 남성이 징병이 되었고, 무라에는 고령자와 여성, 아이들이 남았고, 구 소련의 침공을 받았을 때 가혹한 도피행을 강요받았
다. 45년 8월 17일, 집단에서 강에 몸을 던져서 298명이 사망했다. 그 이외에도 생명을 잃은 사람은 이어갔고, 일본에는 120명 정도 밖에 돌아오
지 못 했다.
종전시, 유키오씨는 12세였고, 부모와 형= 당시 15세, 여동생 7세, 남동생 3세=와 자결을 기획했고,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80년에 강연을 시작했
고, 그 횟수는 120회를 넘은 후, 계속되었다.
단토쵸 타카하시 지구에서는 현재, 경험을 얘기하는 건 유키오씨와 또 다른 1명만 남았다. 후미키씨는 10년 정도 전부터 강연에 동행했고, 기록
과 영상을 남겼을 때에 유키오씨를 대신하여 얘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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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복으로 동생이 울기 시작했다. 적에게 발견되니까 죽을 수 있다고 하면서, 가족이 동생의 얼굴을 뚫어져야 본 후 웃었다. 어머니가 "이제부터
는 절대로 울리지 않는다. 죽일거면 나도" 이라고 감싸며 "그러고 난 후 자결까지 동생의 울음소리는 들은적이 없었다"
부자는 올해 9월, 효고현 아시야 시립 야마테 중학교의 2학년생 172명과의 온라인 교류회에 임했다. 학생들은, 사전에 애니메이션 영화와 그림
연극으로 개척단과 동세대의 전쟁 체험을 배우고 있으며, 이 날은 아버의 도피행을 후미키씨가 얘기를 하며 재현했다.
무라 사람들이 증수한 강에 뛰어든 집닩 자결의 현장에서는, 동생을 물에 우겨넣는 아이들의 눈으로 부터 눈문이 뚝뚝 떨어졌다. 표정을 바꾸지
않은채 모친은 유아의 코와 입을 막았다. 다른 아이들은 모친의 손으로 목을 졸려서 울었다.
유키오씨는 형과 등을 맞댄채로 강에 밀쳐졌다. 하지만, "눈을 뜨니까, 쓰러진 형의 옆에 버드나무 가지에 얽혀있었다. 죽지 않으면 이라고 몇 번
이나 뛰어들었지만, 몸을 살려고 했다"
달려던 중국인에게 제지를 받았고, 난민 수용소에서 지낸 후, 히키아게선을 타고 혼자서 귀국했다.
듣고 있던 중학생들은 "부모가 아이를 손을 댈 줄이야" "국가와 국가가 전쟁을 하고 있을때도, 사람과 사람은 사이가 좋아질 수 있다. 어째서 국
가 끼리는 사이가 좋아질 수 없는 것인가?" "전쟁 반대이라고 말 못하는 건 무섭다" 이라고 감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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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1~3회의 페이스고 학교 등에서의 강연을 이어가고 있는 유키오씨는 "평화는 굉장한 것이고, 전쟁은 안 된다고, 일본인 전원이 강한 의지를 가
질 수 밖에 없다. 나도 이 나이지만 하루라고 길게 살고 싶다. 빨리 죽는 게 싫다" 이라고 힘을 담으며, 후미키씨와의 더 나아간 강연에 의욕을 나
타낸다.
후미키씨는, 아버지들 증언자의 의견에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들어줬으면 하는 한 편으론, "타자를 생각하는 마음과 합쳐서, 더욱 더 다음
세대에 전하고 싶다"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같은 건 할 수 없더라도, 지역의 선조가 맞이했던 비극이 잊혀지지 않도록 할려고 하는
것도 계속 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