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은 혁명적 운동으로 위장한다
프티부르주아 대중 운동을 하나로 묶기 위해 나치들은 “마르크스주의적” 노동자 단체들을 공격했을 뿐 아니라, 대자본과 독일의 “반동적인” 기성 정치권에 맞서는 “민족 혁명”이 필요하다는 미사여구를 사용했다. 그런 수사는 데마고기인 동시에 매우 교묘한 것이었다. 근본에서 나치는 자본주의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 대신 생산적이고 민족 이익에 종속되는 “건강한” 자본주의와, 그들이 보기에 투기적이고 민족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유대인 자본”(그들의 유대인 혐오적 세계관을 반영한다)을 구별했다.
이를 통해 나치는 반혁명적 운동을 혁명적인 반反자본주의 운동이라고 내세웠다. 이처럼 나치는 급진적 언어를 쓰고, (설령 개별 자본가 몇몇의 지원을 받았더라도) 자본가 계급의 정치 구조물 바깥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발전한 대중 운동이기 때문에 지배계급의 제1 선호 대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 독일의 지배자들은 히틀러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의 돌격대가 노동자 운동과 유대인 사업가들만이 아니라 더 광범한 지배계급을 적대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그들은 히틀러가 노동자 운동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면 아래로부터 저항이 폭발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1934~1936년 프랑스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프랑스의 파시스트 “연맹들”이 정부를 무너뜨리자 노동자들이 대규모 행동에 나선 것이다. 1936년 스페인에서 프랑코 장군이 권력을 잡았을 때 반란이 터져 나온 것도 비슷한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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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23년 뮌헨 맥주홀 쿠데타(히틀러와 그의 동맹이 직접적 무장 투쟁으로 쿠데타를 촉발하려 시도했다)가 실패한 후 히틀러는 기존 노선을 재평가하고 재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나치당이 선거 참여를 완강히 거부하는 기존 입장을 버리도록 했다. 이제 히틀러는 이렇게 주장했다.
"(나치는) 새로운 행동 노선을 추구해야 한다. … 음모적 무장 투쟁으로 권력을 잡으려 하기보다는 우리는 코를 막고 의회에 들어가 가톨릭과 마르크스주의 의원들에 맞서야 한다. 표 대결에서 그들을 이기는 것이 총 대결보다 더 오래 걸릴지라도, 적어도 그 결과는 저들이 만든 헌법의 보장을 받을 것이다."
이런 이중 전략, 즉 선거와 준군사적 거리 운동을 결합하는 전략이 나치의 목적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돌격대 대장이었던 헤르만 괴링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 국가와 현재 체제를 철저하게 무너뜨리기 위해 싸우지만, 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한다. … 우리는 국가를 증오한다고 했지만 [이제는—] 국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래도 우리의 진심을 모두 알고 있다.”
반혁명적 강령을 혁명적 언어로 위장한 나치는 이제 “용인될 만한 세력”이라는 가면과 정상적 세력이라는 가림막 뒤에 숨어 전진하려 했다. 역사가 요아힘 페스트는 이렇게 관찰했다.
[히틀러의] 야심은 변하지 않았다. 바로 권력 장악이다. 이를 위해 그는 독재적이고 군사적인 정당을 건설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권세 있는 집단과 기구들의 신뢰를 회복해야 했다. 다시 말해, 히틀러는 혁명적으로 보이는 동시에 기존 질서의 수호자처럼 보여야 했고, 급진적이면서도 온건하게 보여야 했다. 그는 체제를 위협하는 동시에 보호하는 구실을 해야 했다. 그는 법을 어기는 동시에 법의 수호자로서의 신뢰도 구축해야 했다.
분명 1929~1932년 경제 대붕괴는 나치가 돌파구를 연 것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열쇠이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나치는 히틀러의 주도 아래 정상적 세력 행세를 하고 더 전통적인 보수 세력과의 동맹 관계를 통해 정당성을 인정받고, 언론 지면을 장식하고,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에 대공황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파탄 난 상황을 이용할 수 있었다.
핵심적인 변화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요 보수 정당이었던 독일민족인민당이 급진화한 것이었다. 독일민족인민당은 1918년에 창당했고 제1차세계대전 이전 보수 정당들의 계승자로서 매우 반동적이었다. 왕당파에 친화적이고 유대인 혐오적이며 바이마르 공화국에 적대적이었다. 1920년대 중엽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부분적으로 인정했는데 당시 혁명의 위협이 가라앉고 경제가 확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28년에 당권을 차지한 언론 재벌이자 산업가인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의 지도 아래 독일민족인민당은 더한층 우경화하며, 더 광범한 바이마르 공화국 반대 정서(나치도 포함된다)의 기수가 되고자 했다. 독일민족인민당은 나치의 강령과 수단들을 일부 차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통해 요란할 뿐 보잘것없는 히틀러가 아니라 자신들이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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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방향 전환 ― “정상적 세력”이라는 외양을 추구하기, 권력층을 향해 좀더 점잖은 모습을 보여 주기, 1923년 이후 선거 정치에 참여하기 ― 과 기존 우파 일부의 급진화가 이제 맞물리면서 나치가 전국 정치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진출하도록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히틀러는 나치가 광범한 연합 안에서도 여전히 독립성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에 가장 급진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은 바로 자신들이라는 점을 지지자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행동했다. 바트 하르츠부르크 집회에서 히틀러는 나치 돌격대의 행진이 끝나자마자 무대에서 보란 듯이 곧장 내려왔는데, 철모단 행렬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일주일 후 히틀러는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돌격대 10만 명을 동원한 거대한 집회를 조직했고, 〈라이프치히 최신 뉴스〉의 편집자에게 “당신은 우리가 맞서 싸우고 있는 부르주아지를 대표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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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나치의 전술이 딱 찢당의 전술과 흡사하지 않음?
이재명일당이 어쩌다보니 역사에서 관찰되는 반사회적 집단들과 닮은 구석이 있지만 그것들을 따라할만큼의 학습능력은 없다고 보임 그냥 쓰레들끼리 수렴진화하는거지 ㅋㅋㅋㅋㅋ
근데 나치즘도 그런 동기로 만들어진 거라. 고로 이재명은 빨갱이가 아니고 파쇼 그 자체라는 결론으로 귀결되지.
이재명일당이 어쩌다보니 역사에서 관찰되는 반사회적 집단들과 닮은 구석이 있지만 그것들을 따라할만큼의 학습능력은 없다고 보임 그냥 쓰레들끼리 수렴진화하는거지 ㅋㅋㅋㅋㅋ
근데 나치즘도 그런 동기로 만들어진 거라. 고로 이재명은 빨갱이가 아니고 파쇼 그 자체라는 결론으로 귀결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