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게시물은 사무라이 렘넌트 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사무라이 렘넌트 외에 페그오 스토리에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뒤로 가기를 해주시기바랍니다.
미야모토 무사시 는 1584년 (*으로 추정) 하리마 국 (*오늘날 일본 효고현 남부 지역 ) 에서 신멘 무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린시절은 그의 자서전 격인 오륜서 에서 자세히 나오는데 13세때 들어 검호 아리카 키헤에 (?~1596)를 쓰러트렸으며
16세에 들어 다자미 국 (* 오늘날 일본 효고현 북부 지역) 의 무예가 아키야마 란 이를 쓰러트렸다고 주장합니다.
1600년 무사시 는 부친 신멘 무니를 따라 부젠국 (* 오늘날 일본 후쿠오카 동부 및 오이타 북부지방) 을 다스리던 구로다 칸베에
(1546~1604) (* 본명은 구로다 요시타카) 를 따라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그가 20세가 되던 해 수 많은 무예가와 싸워 져본적 없이 승승장구 했다고 하며 1614년 벌어진 오사카 성 겨울 의 전투 에서는
도쿠가와 가문 측에 소속된 미즈노 가츠나리에 객장(*자기구역이 아닌 다른곳에서 싸우는 장수 ) 이 되어 전쟁에 참전했다고 하며
이후 하리마 (*오늘날 일본 효고현 남부지역 )의 성주 혼다 타다토키 (1596~1626) 와 친분을 맺었고 아카시 (* 일본 효고현 남부
아카시 해안에 위치한 도시) 에서 도시계획을 참여 했으며 그가 아카시 에서 머무를때 신도무소류 의 고수 무소 곤노스케와 시합을 벌였다고
합니다.
1615년 나키가와 사마노스케의 셋째 아들 인 미키노스케를 양자로 들이고 히메지 국의 성주 혼다 타다토키 에게 출사 했으나 1626년 타다토키가
숨을 거두자 주군을 따라 순사(*모시고 있던 주군 혹은 주인이 세상을 떠날때 신하 또는 하인이 자결하는것 ) 했으며 이후 다하라 하사미츠의
둘째 이오리 를 양자로 들이게되었으며 이후 오가사와라 다다자네 (1596~1667)에게 출사시켰으며 1631년 이오리는 20세의 젋은나이에
가로 (*영주의 집안의 무사들을 총괄하는 직책) 이 되었다고 합니다
(*시마바라 성)
1638년 시마바라 반도 와 아마쿠사 지방에서 가혹한 천주교 탄압과 수탈등으로 폭발한 농민과 천주교인들의 민란인 시마바라의 난 이 터지자
무사시는 고쿠라 국 (* 오늘날 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고쿠라키타쿠) 의 성주 오가사와라 다다자네 의 조카인 오가사와라 나가츠구
(1615 ~ 1666) 의 후견인 으로서 출전했다고 합니다.
1640년 히고국 (*오늘날 일본 구마모토현 ) 의 성주 호소카와 다타토시 의 손님으로 초정받아 히고국 근처 지바에서 주택을 받았으며
고위급이 아니면 할수없는 매사냥을 할수있도록 허가해주기도 했으며 녹봉은 18석에 구휼미로 300석을 지급받았다고합니다
다타토시 사후 장남인 호소카와 미츠나오 (1619~1650) 때에도 빈객으로서 대우받았다고 합니다
미야모토 무사시 밑으로 1천명의 문하생이 있었다고 하며 1643년 긴푸산 (해발 2599m 의 산 야마나시현 소재 ) 에 위치한 운간젠지 란
절에 있는 레이간도란 동굴에서 자신의 저서인 오륜서 및 돗코도 란 책을 저술했으며 오륜서는 무사시의 제자인 데라오 마고노조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다만 이 오륜서는 미야모토 무사시 본인이 직접 쓴 원본이 전해지지 않고 후대에 필사본들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문젠 그 필사본들끼리 서로
내용이 달라서 무사시의 이름을 빌려 그의제자들이 집필한것이 아니냐 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미야모토 무사시는 1641년 지바성 자신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저서로는 앞서 말한 오륜서 와 돗토코 및 여러 그림 과 글들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무사시는 검사이면서 예술가 적인 면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지요
그의 무술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했듯 13세 나이에 아리카 키헤에 를 쓰러트린걸 시작으로 여러 무술가들과 무예를 대결했는데
그중 미야모토 무사시를 유명하게 만든것은 바로 간류지마의 결투가 아닐까 싶습니다.
(*야먀구치현 시모노세키 앞바다에 있는 무인도 간류지마 섬의 모습 )
미야모토 무사시는 쵸조 나가마사 밑에서 검술을 배운 고수 사사키 코지로 와 결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사건은 다음과 같이 전해지는데 무사시 의 제자들과 코지로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스승이 강하다며 언쟁을 벌이다 두사람이 결투를 벌이게 되었다
라고 전해지는데 다만 기록에 전해지는 이야기 일뿐 실제로 두사람이 어떤 경유로 만나 싸우게되었는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먼저 코지로는 결투장에 도착해서 무사시를 기다렸지만 정작 무사시는 천천히 일어나 밥을 먹고 목도를 깍은뒤에야 나와 결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승자는 다름아닌 미야마모토 무사시 .. 코지로 는 그자리에서 무사시가 깎은 목도로 두들겨 맞고 죽었다고 하지만
이 간류지마의 대결내용이 사람들마다 달라 정확한건 알수 가 없습니다.
호소카와 가문의 가신인 누마타 노부모토의 말에 따르면 무사시와 간류의 승부이후 무사시는 조용히 떠났으나 같이온 무사시의 제자들이
패배한 코지로 를 때려 죽였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시모노세키 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는 다릅니다
코지로 를 태운 어부들이 무사시가 이미 제자들을 동반하여 결투장에 왔으니 혼자서 그들을 상대할수 없으므로 돌아가야한다며 조언했지만
코지로 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 무사는 두번 말하지 않는다네 굳게 약속한 이상 오늘 건너가지 않는다면 무사로서 수치스러운 일이야 만약 다수가 날 공격한다면 부끄러운
내가 아니라 무사시 겠지 "
어부의 말대로 무사시 와 제자들이 가세하여 코지로를 죽였고 어부들의 만류에도 최후를 맞은 코지로 의 의로운 마음에 감동하여 묘를 세우고
무사시와 싸운 무인도를 코지로의 호인 간류를 붙여 간류섬 이라고 부르게되었다고 합니다
무사시 의 대표검술로 알려진 이천일류 검술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분파로 나뉘어 노다하와 산토하 란 분파로 나뉘어져 있다고하며
무사시가 개발한 이 검술은 그의 나이 50세가 되었을때 만들어졌으며 한국에서도 이천일류 의 수련모임이 있어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고합
니다 검술의 역사에 대해서는 제가 이야기 하기는 어렵기에 직접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 미야모토 무사시 자체는 페그오 에픽 오브 렘브란트 시모노사쿠니 편에서 주인공을 도우며 등장했고
2부 스토리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아쉽게도 페그오 세계관에서는 영기가 소멸해서 두번다시 만날수는 없지만 ..
사무라이 렘넌트에서 다시 등장하니 무사시를 그리워 하시는 분들꼐서는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수 있겠네요 지금까지 미야모토 무사시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지나가던 아는척 코너. 사실 1.5부 시모노사쿠니에서 만난 무사시는 이미 구다즈와 면식이 있는 상태로, 정확히는 "무사시 체험퀘스트"에서 첫 등장해 짤막한 스토리를 거치면서 구다즈와 동행 및 공투를 거친 상태입니다. 개인적 인상으론 1.5부의 인기에 힘입어 2부에서도 활약하게 되었지만 그 탓에 안티도 불어나버린 딱한 처자ㅋㅋ 우리(1명)는 이것을 "네로 현상"이라 부르기로 했어요.
지나가던 아는척 코너. 사실 1.5부 시모노사쿠니에서 만난 무사시는 이미 구다즈와 면식이 있는 상태로, 정확히는 "무사시 체험퀘스트"에서 첫 등장해 짤막한 스토리를 거치면서 구다즈와 동행 및 공투를 거친 상태입니다. 개인적 인상으론 1.5부의 인기에 힘입어 2부에서도 활약하게 되었지만 그 탓에 안티도 불어나버린 딱한 처자ㅋㅋ 우리(1명)는 이것을 "네로 현상"이라 부르기로 했어요.
전 바키의 무사시 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