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게시글은 사무라이 렘넌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수 있습니다.
페이트 사무라이 렘넌트에 를 플레이 중이시거나 스토리 에 대한 내용에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뒤로가기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 아리마 가문 비극의 시작
아리마 나오즈미(1586~1641) 의 아버지인 아리마 하라노부(1567~1612) 는 큰형 아리 요시즈미가 단명하여 가독을 이었는데
처음 하라노부도 천주교 탄압에 압장을 섰던 인물이였습니다. 그러나 1580년 이탈리아 출신이자 예수회 선교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1539~1606) 의 영향으로 천주교 로 개종하였고 1582년 오토모 소린 (1530~1587) 과 하루노부의 숙부 인 스미타다 와 함께
덴쇼 소년 사절단을 로마에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령 을 반포할때 까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보호했다고합니다.
이후 임진왜란 당시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꼐 전쟁에 참전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엔 도쿠가와 진영에 가담하여 고니시 유키나가를 공격
했지요 그러나 1609년 마카오에서 현지주민들과 가신들과의 다툼으로인해 가신 48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져 이에 대한 보복을 도쿠가와 에게
요구 했으며 나가사키 항에 정박하려 했던 포르투칼의 상선을 포위하고 그들을 구류하려 하였으나 선장이 미리 선원들을 도피시키고 상선을 자침
시키면서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이렇게 포르투칼과의 갈등이 심각해짐을 느낀 하루노부는 도쿠가와의 측근 가신인 혼다 마사즈미의 부하인 오카
모토 다이하치 에게 뇌물을 건네 사건을 무마시키려 했지만 이 사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 귀에 들어가버리는 바람에 하루노부는 참수 되었고
뇌물을 받은 오카모토 다이하치는 화형을 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아들인 나오즈미 는 아버치 하루노부 처럼 영지를 몰수당하지는 않았고
이에야스와 친분덕에 영지를 보존할수 있었지만 하루노부의 뇌물사건으로 자신의 영지에 있는 천주교 신자들과 천주교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전봉(*영지를 옮김) 신청 하여 노베오카 (* 오늘날 일본 미야모토현 노베오카 시 ) 로 옮기게되었고 이후 시마바라의 난 발발 당시
천주교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큰 피해를 입은 나오즈미는 거침없이 자신의 옛 가신은 물론 영지민들에게 칼을 휘둘렀다고합니다. 오랜시간
천주교 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것에 대한 복수를 한 셈이였지요 ..
◆ 먹거리와 특산품 과 시마바라 난 이후
하라 성에서 농성을 하고 있던 당시 막부군에 의해 보급로가 끊기자 남은재료를 섞어먹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구조니 떡국의 시초가 되었다고합니다.
구조니 떡국은 다른 떡국과는 달리 어묵.쑥갓.닭고기.장어 및 다른재료들을 섞어 끓여먹는 음식으로 시마바라 지방의 명물음식이지요
이마저도 떨어지자 반란군은 해안의 절벽을 타고 해초를 캐서 먹었다고 합니다.
반란 이후 폐허가 되다시피한 시마바라 지방 을 재건하고자 했는데 마츠쿠라 가문의 후임으로온 고리키 타다후사 (1584 ~1656) 은
타지방에서 이주민들을 이주시킬 방법으로 연공을 면제해주겠다고 하였는데 이로인해 타지방의 사람들이 와서 정착한 덕에 시마바라 에서는
방언과 풍습이 하나가 되지않고 따로따로 가 되었는데 이때 히로시마에서 온 이주민들 이 만든 소면은 시마바라에서 특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타다후사의 후임이자 아들인 고리키 타카나가 (1605~1677) 가 마츠쿠라 가문이 했던것처럼 실정을 하게되면서 1668년 개역(*영지가
몰수되는것 ) 당하면서 추방당하고 맙니다 대규모 민란이 터진지 곳에서 또 그짓을 했으니 ...처음인 도쿠가와의 방게인 마츠다이라 가문이
통치했으나 이후 잠시 도다 가문이 맡았고 다시 마츠다이라 가문이 맡게됩니다. 천주교 탄압이 실패한 상황에서 또다시 천주교인 들이 반란이
일어나는걸 막기위한 막부의 결정이였다고합니다
한편 사건의 발단을 제공했던 마츠쿠라 카츠이에는 에도로 끌려와 처형당했는데 카츠이에 밑에 두 동생이 있었으나 한명은 ■■ 한명은
낭인이 되어 떠돌았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반란의 또다른 근원지 였던 아마쿠사의 영주 테라자와 히로타카 (1563-1633) 역시 천주교 박해
에 나설 정도 였는데 그의 아들인 테라자와 카타타카 (1609 ~ 1647) 가 부임중 시마바라의 난이 발발했던 탓에 아마쿠사 4만석 영지를 몰수 당했
지만 본 영지인 카라츠 번 (* 오늘날 일본 규수 사가현 북서부 지역 ) 8만석만은 유지하는것으로 끝이났습니다만 .. 카타타카는 이일로 인해 충격을
받아 정신이상을 일으켰고 결국 1674년 ■■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혹은 할복했다고 합니다.)
◆ 시마바라의 난 이후 막부의 대응과 천주교인들의 삶
(* 시마바라 현에 위치한 시마바라 성 )
시마바라 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막부는 한 지방에 하나의 성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폐쇄 및 철거시키는 일국일성 정책을 펼치게됩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포르투칼 과 같은 천주교 를 보급하려고 하는 국가와는 단절하고 네덜란드 와 그나마 일부지역에서 무역을하는 쇄국정책
을 펼치게 됩니다. 시마바라의 대규모 민란이후 살아남은 일부 천주교 인들은 카쿠레 키리시탄이 되어 외진 섬이나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천주교 를 믿으며 살아갔는데 1805년 다시한번 아마쿠사 에서 대량의 천주교신자가 무더기로 잡히게되었습니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강제적이지만 후미에 (*예수가 그려진 동판을 밟게하여 천주교인을 가리는 검문법) 과 배교서약서를 쓰게 하면서 사건을 덮어버렸습니다.
이들이 대량으로 검거된것은 다름아닌 소고기를 먹는것 때문에 걸렸다고하네요 ..
이후 막부가 몰락하고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다시한번 천주교 의 신앙활동이 허가되었는데 프랑스 신부 였던 베르나르나테 프티장 (1829~1884)
신부 는 일부러 성가를 외치며 돌아다녔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처음엔 구경하는것 처럼 와서 신부에게 여러가지를 질문하더니 이후 산파인
이사벨라 유리와 일부 마을사람들이 모두 찾아와 기도를 하게되자 놀란 프티쟝 신부는 교구장에게 이사실을 보고하게되었고 천주교 교단은
이를 기적이라고 까지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 역시 탄압을 멈추지는 않았는데 막부와는 다르게 서부열강의 압력등이 있어
이후 1873년 사이고 다카모리 에 의해 금교령을 폐지했으며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게되면서 자유로워 질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마바라의 난 으로 인해 일본인들은 천주교를 멀리하게 되었고 지금도 일본계 천주교인들은 희박할 정도입니다.
한편 망명한 천주교인들은 필리핀 .마닐라. 태국. 버마 .베트남 등에 정착했는데 베트남에서는 당시 남북국 시대로 나뉘어 내전중이였는데
당시 찐기엠 에 의해 수적열세를 금치 못햇던 응우엔호양은 인구와 군사력 증강을 위해 포르투칼과 돔맹을 맺고 일본에서온 천주교인들을
받아들였다고합니다. 해외로 떠난 이들은 공동체 집단을 형성하고 군사기술의 전파와 무역망 활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하지요
◆ 비운의 화가 야마다 시모사쿠
( * 아마쿠사 시로의 진중기 야마다 에모샤쿠가 그린작품. )
시마바라 난 당시 유일하게 생존했던 한명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야마다 에모사쿠 (?~?) 였습니다. 그는 어린시절 서양화 그리는 법을 배워
아리마 가문과 마츠쿠라 가문을 섬기던 화가였는데 당시그는 시마바라 반도 에 있는 쿠치노츠 란 마을에 촌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대 하필이면 마츠쿠라 가문의 수탈과 횡포로 인해 난이 벌어졌는데 반란군은 에모사쿠의 가족들을 인질삼은 상태였고 뿐만 아니라
반란군의 위압에 억지로 싸우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에모사쿠는 남몰래 야부미 (* 화살에 편지를 묶어 몰래 보는것 )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반란군의 진중기 등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에모사쿠는 야부미를 보낼때 전주인이기도 했던 아리마 가문과 소통했으며
에모사쿠 처럼 억지로 가담한 사람들을 구명해달라는 것과 아마쿠사 시로 생포작전을 담은 편지를 보내려다 발각되어 스파이혐의로
옥에 갇히게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에모사쿠의 가족들은 반란군들에 의해 처형당했고 그마저도 막부군에 의해 죽을뻔 하다 그가 보낸
야부미를 보여주면서 목숨을 구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 * 쿠치노츠 마을에 남아있는 에모사쿠의 집터와 위령비 )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그를 총사령관이였던 마츠다이라 노부츠나 의 도움으로 구명할수 있었으며 에도로 가서 취조를 받게되었는데 그가 받은
취조문은 당시 하라 성 에서 농성했던 상황들을 알수있는 귀중한 사료로 남겨져 있습니다. 이후 그는 천주교인을 감별하는 말단관리가 되었고
그가 그린 그림중엔 천주교인을 검별하는 후미에의 그림에는 그가 그린 작품이 쓰이기도 했고 노부츠나 저택에서 살면서 방화범이나 천주교
인을 처형하는 이른바 범죄에방 포스터를 그려 배포했는데 그가 그린그림이 너무 사실적이라서 포스터 가 공고되는 날이면 잠시나마 범죄율이
낮아졌다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의 사후는 알려져 있고 여러 이야기만이 있을뿐입니다 다시 천주교로 개종하여 나가사키에서 임종했다는
이야기 혹은 필리핀으로 떠나 두번다시 일본땅을 밟지 않았다는 이야기 등만 있을뿐 실제로 그의 마지막은 어찌되었는지는 모르는일입니다.
이렇게 그는 피해자 이기도하지만 서브컬쳐에서는 막부군과 몰래 내통했다는 이유로 서브컬쳐에서는 배신자 혹은 기회주의자 또는 악당으로
묘사되는일이 많으며 억울하게 강제로 끌려온것도 모자라 가족들까지 죽은것에 대한건 잘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이런모습으로 자주 그려진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중엔 유일하게 위의 아마쿠사 진중기 만이 남아있으며 그외는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시마바라의 난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여러모로 대규모적인 사건임을 알수있는데 천주교의 박해로 인해 벌어진 정치적인 문제가 여김없이 드러나는군요 ..
카쿠레키리시탄들은 들키지않게위해 성모마리아대신 관음상을 대응하는 매개체로하여 기도하고 했다죠. 아마쿠사시로가 성인시성절차를 할수없게된이유는 시마바라의 난이 단순히 순교사건으로보기에는 정치적요소가 담겨져있다고 교황청에서 판단되었기때문이라고합니다. 다만 일본서도 일부지역에서는 아마쿠사를 지역구(...)성인으로 추모하는 사람들도 있긴하다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