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맺어진 조불수호통상조약에 의해서 조선과 프랑스가
외교 관계를 맺고, 천주교가 허용되어 프랑스 가톨릭 신부들이
조선 곳곳으로 포교를 하기 위해서 오게 되었다.
문제는 프랑스 신부의 치외법권을 인정해버리면서 성당 또한
치외법권이 되어버리고, 이에 자연스럽게 조선의 법망을 피하려는
부랑자들이 나일론 신자들이 되어 패악을 부리는 경우가 발생했다.
특히나 고종이 가톨릭 신부들에게 자신처럼 대하라는 표식을 나눠주었기에
조선인들은 수령들도 신부와 가톨릭 신자들에게 전혀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가톨릭교도들의 패악질은 가톨릭 선교가 퍼져나간
제주도에서 특히 더 심했는데, 어느 정도였는지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천주교도들이 처녀를 강-간하고 유부녀를 윤-간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고,
살인까지 저지르는데도 막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부패한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천주교로 입교한 깡패들이 자주
동원되어 제주도민들의 재산을 수탈해가기도 했다.
1901년 2월 결국 참다못한 제주도민들은 성당에 몰려가 항의하다가 훈장 등
지역 유지들이 오히려 성당 안으로 끌려가 신부와 천주교도들에게
고문을 받고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이에 제주목사는 군중들을 타이르고 민회를 열어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온건한 방향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5월 14일 천주교도들이 권총을 찬 프랑스 신부들의 지휘 아래
제주도민들의 항의를 이끌던 지도자 오대현을 납치하는 사건이 터진다.
이에 인내의 끈이 끊어진 제주도민들은 이재수를 지휘자로 하여 무기를 구해
난을 일으켜, 3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참수하고 프랑스 신부들 또한
모조리 죽여버렸다.
당시 제주성을 지키던 대한제국 수비대 또한 천주교도들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긴터라 경고 사격만 한 뒤 민군들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대정군수를 포함한 제주도의 관리들 또한 이에 동조했을 정도였다.
물론 가만히 있을 프랑스가 아니라서 5월 31일 프랑스 해군 함대가
제주도 앞바다에 포진했고, 제주도에 포격을 가하려 했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서둘러 사절단을 파견해 프랑스군이 공격하면
양민들이 많이 죽을 것을 지적하며 이를 말렸고, 때마침 일본의
견제와 미국의 중재가 겹치면서 프랑스군 함대는 생존한 천주교도들만
데리고 철수하게 된다.
그리고 이재수는 6월 1일 민군을 해산시킨 뒤 주동자들과 함께 스스로 자수한다.
원래는 그 혼자만 자수하려고 했으나, 일부 양반들이 관노 출신 이재수가
나가는데 어찌 자신들이 몸을 피할 수 있겠냐면서 함께 자수한다.
이에 이재수를 포함한 3명이 참수당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이렇게 큰 사건인 신축민란은 왠지 모르게 역사 속에서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다.
그나마 이재수의 누이동생 이순옥 씨와 일부 사람들이 1961년
처형당한 이재수 포함 3명을 넋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으나, 가톨릭 교회의
항의로 인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 옮겨져 방치되기까지 했다.
이렇게 신축민란이 조명받지 못한 이유는 크게 3가지인데,
하나는 이 사태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가톨릭 교회의 의도적인 파묻기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였던 뮈텔 주교에 의해
3의사가 묻힌 무덤이 없어져버렸으며, 2011년까지 한국 가톨릭 교회는
신축민란 당시 사망한 천주교도들의 시복을 추진하기까지 했다.
다행스럽게도 2016년 이후 한국 가톨릭 교회는 신축민란 당시의 추태를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등 뒤늦게라도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하나는 워낙 임팩트가 큰 제주도의 4.3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300명 조금 넘게 죽은 신축민란과, 제주도 전역이 쑥대밭이 되어버린
4.3 사건은 규모나 잔학성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4.3 사건이 신축민란보다 시점이 더 가깝기 때문에 기억하기도
더 쉽고, 더 알려지기도 쉬운 면이 있다.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조금 놀랍기도 하고 슬프기까지 한 이유가 있다...
바로 신축민란을 일으킨 제주도민들을 일본 제국이 지원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민군들에게 일본이 무기를 지원했다.
물론 이재수 이하 제주도민군들은 절대로 친일파가 아니었다.
당시 제주도민들과 일본인들이 어업 문제로 다투었기 때문에
일본인에 대한 감정 또한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축민란 당시 민군은 일본 상인들이 판 일본도와 일제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일본 무기상들이 가난한
제주도민들도 손쉽게 살 수 있도록 헐값에 무기들을 팔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제주도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한 일본의 술책이었다.
때문에 한동안 신축민란은 가톨릭 교회에 의해 '일본인들의 손에 놀아난
과격분자들의 천주교도 학살'로 매도되어왔다.
지금에 와서야 이재수 이하 민군들이 일본의 무기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민란 당시 일제 무기로
무장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로 존재한다.
게다가 일본은 프랑스 함대가 제주도 바다로 왔을 때 자기들도 군함을
띄워 제주도민들을 보호한답시고 설쳤으며, 1932년에 이재수의 여동생
이순옥 씨가 신축민란의 전모를 담은 '이재수실기'를 저술하자 이를
일본 오사카에서 출판하도록 했다.
당연하겠지만 이 '이재수실기'에는 천주교의 횡포와 프랑스군의
개입, 무능한 대한제국 정부의 모습만이 강조되어있을뿐
막후에서 사태를 악화시킨 일제의 그림자는 하나도 담겨있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은 여기서 프랑스 군함을 견제하고 국제 사회에
해당 사건을 중재하도록 요청하는 상식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결국 일제는 생존자의 수기 또한 자신들의 이미지 세탁에 이용한 것이다.
결국 정리해보자면 신축민란은,
1. 제주도에서 천주교도들과 신부들은 온갖 행패를 다 부렸다.
2. 이에 분노한 제주도민들이 민군을 일으켜 천주교도들과 신부들을 죽였다.
3. 일본은 제주도민들에게 무기를 팔며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4. 결과적으로 프랑스가 제주도에서 손을 떼면서 일본의 영향력만 강해졌다.
라고 볼 수 있겠다.
저 일이 있은지 9년 뒤 일제가 우리 조선에게 뭔 일을 했는지를
생각해보면, 한국 가톨릭 교회가 잘못을 사과한 현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축민란이 재조명받기는 상당히 힘들지 않을까 싶다.
여담으로 제주도의 개신교 또한 이 신축민란으로 뜻하지 않게 이익을 보았다.
천주교에 실망한 제주도민들이 대거 개신교로 개종하거나 입교했기 때문이다.
민란의 주동자였던 이재수도 21살서부터 개신교 교도였다.
이에 조선 최초의 목사 이기풍이 직접 내려가서 전도를 할 만큼
강성해지던 제주도의 개신교 교세는 해방 이후 그 악명높은
서북청년단이 4.3 사건에서 대학살을 저지르면서 망하고 만다.
개신교인이 대부분이었던 서북청년단의 학살 행위를 한국 개신교가
공산당을 잡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쉴드쳤기 때문이다.
혼란하다 혼란해 이래서 역사는 단편적으로만 봐서는 안되는거 같음
혼란하다 혼란해 이래서 역사는 단편적으로만 봐서는 안되는거 같음
일본이나 프랑스나 깡패 새끼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