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stay night UBW
황야는 깊이를 잃은 채 평범한 모래밭이 되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승리를 가리지 않고
따라서 생애에 의미는 없으니
그 몸은 분명 검으로 되어 있다.
-5차 아처의 UBW-
6명의 서번트가 모여들며 준비를 거의 끝마친 성배전쟁
학교에서 의문의 습격을 받았던 시로는 집으로 돌아와 방금 전의 추격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의문의 창기병이 쇄도하고 시로는 창고로 도망가게 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묻겠다, 그대가 나의 마스터인가?“
Fate/stay night UBW는 페스나 원작의 2번째 루트인 UBW 루트를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입니다.
페스나 원작이 루트마다 히로인이 바뀜에 따라 뒤틀린 정의관을 가진 시로가 어떤 변화와 성장을 겪는가가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었기 때문에 UBW는 조언자이자 시로를 이해자로서의 토오사카가 돋보이던 루트였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스토리적인 측면에서 많이 아쉬웠던 작품이었는데요.
원작을 플레이 해 본 입장에서 어떤 점들이 다르게 다가왔고 그런 것들이 어떤 식으로 서사를 약화시켰는 지를 중점으로 아주 개인적인 감상을 풀어볼까 합니다.
원작에서의 시로는 광기 어린 정의를 가진 인물입니다. 애니메이션 판에서도 그걸 살리기 위해서 여러 연출을 사용하지만 원작에 비하면 크게 와 닿지는 않는 편이죠.
시로가 꿈꾸는 정의에 대한 신념은 자신이 해를 입더라도 맹목적으로 타인을 구원하는 것이고 토오사카는 주체인 ‘자신’의 행복을 그 범주에 넣지 않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시로의 신념이 뒤틀렸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바로 직접 막으면 무조건 죽는다는 걸 아는데도 버서커의 참격을 몸으로 막거나 세이버의 칼을 대신 받아내는 장면 등이 있습니다.
이런 살신성인의 자세는 시로의 위태로움을 표현하기 위한 장면이지만 애니메이션 판에서는 시로의 독백이 상당 부분 잘려나가며 심심한 장면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원작은 엄청난 텍스트 분량을 가지고 있는 비주얼 노벨인데 상황 묘사에도 많은 분량을 소모하지만 그 중 제일 많이 쓰여 진 문장들은 바로 화자의 독백입니다.
주인공인 시로의 독백은 압도적으로 많은 수준이죠. 그 독백에서 보여주는 시로의 신념은 ‘맹목적이다’를 넘어 인간이라면 있을 수밖에 없는 자기방어기제가 완전히 상실된 것 같이 느껴져요.
거기에 세이버가 앞서 강력한 무력을 보여줬음에도 ‘여자는 싸우면 안 돼!’ 라며 버서커 앞으로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면 단순히 정의 라는 것을 동경하는 소년 이상의 무언가라는 것 바로 느낄 수 있죠.
그런데 애니메이션 판에서는 작품의 구조 상 독백이 많이 잘려나갈 수밖에 없었고 대사들의 톤도 시대가 변한 것에 맞춰 많이 유해 지다 보니 시로의 광기가 꽤 옅어졌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게 한 인물의 변화 정도로 그쳤으면 좋았겠지만 페스나 라는 작품 전체가 시로의 일대기 이다 보니 시로의 작은 변화 하나가 모든 서사를 어그러트린다는 것이 문제죠.
자신을 버리더라도 타인을 구원한다는 시로의 정의관이 왜 잘못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UBW루트입니다. 앞선 Fate 루트에서는 시로와 세이버를 대비 시키면서 시로의 신념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면 UBW에서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죠.
그걸 위해 전면으로 등장하는 것이 미래의 에미야 시로, 5차 아처입니다. 지금 시로가 가진 뒤틀린 신념을 끝까지 이어간다면 도달하게 될 결과로서 시로의 신념은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캐릭터이죠.
하지만 문제는 시로의 광기가 옅어지며 5차 아처가 시로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작에서는 하도 미친 소리를 독백으로 내내 늘어놓다 보니 과거를 끊어서라도 자신이 맞이한 결과를 없애겠다는 아처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많은 부분 수정되면서 광기 어린 신념 보다는 좀 많이 정의롭고 올곧은 청년이 된 시로는 이대로 가면 객사 하겠구나 라는 생각은 들어도 신념에 잠식되어 모든 것을 져 버리겠구나 라는 생각은 잘 안 듭니다.
동시에 시로의 광기가 옅어지면서 피해를 본 인물이 한 명 더 있는데, 바로 이 루트의 히로인인 토오사카 린이죠.
원작과 제일 차이가 나는 인물 또한 토오사카 린입니다. 대사 한 장면 나올 때마다 반드시 두 번씩은 시로를 놀리던 소악마스러움을 거의 다 잃어서 흔한 ‘츤 조금 데레 왕창’ 캐릭터가 된 것을 둘째 치더라도
시로의 뒤틀림을 인지하고 5차 아처의 기억을 더듬어보며 연민을 느껴 그를 바꿔야겠다고 다짐하는 인물상이 시로가 대충 열혈 정의 덕후로 바뀌면서 남친 걱정하는 츤데레 어디 쯤 으로 뒤바뀌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Fate/Zero의 영향도 크지 않나 싶습니다. Fate/Zero가 프리퀄에 해당하지만 어딘가 다를 수도 있는 아무튼 페러렐 월드인 것은 맞지만
애니메이션으로 UBW 보다 먼저 방영하면서 시로 신념의 근원인 에미야 키리츠구라는 인물이 어떤 인간인지를 시청자들이 모두 알아버렸거든요.
아무튼 UBW에서의 키리츠구와 Zero의 키리츠구는 다른 인물일 수 있겠지만 원작에서는 시로의 구원자이나 동시에 뒤틀린 신념이라는 저주를 건 누군가 쯤으로 존재하던 인물을
Fate/Zero 통해서 키리츠구의 유년기와 뒤틀리게 된 계기 그리고 그로 인해 맞이하게 된 결과를 모두 보면서 시로 이상의 뒤틀린 정의관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원작에서야 자신이 믿는 정의를 위해서라면 다 쏴 죽이는 키리츠구나 본인 죽으면 엔딩 나는데 자기암시에 잠식당해서 서번트한테 매번 몸을 던지는 시로나 그놈이 그놈이지만
애니메이션 판에서는 뒤틀린 신념이 저주처럼 작용해서 끌려가듯 움직인 다긴 보단 그냥 어디 흔한 열혈물 주인공 쯤으로 보이는 지라 전작에 해당하는 Zero의 키리츠구와 크게 비교되며 그 광기가 더 약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쭉쭉 늘어지더라도 독백을 우겨넣었어야 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지금도 충분히 늘어진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시로의 독백이 많이 줄었음에도 분량 상 축소하거나 아예 날렸어야 하는 다른 진영의 인물들 서사까지 하나하나 챙기다보니 늘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원작 UBW의 가장 큰 매력은 빠른 전개에 정석적인 성배전쟁 이었던 Fate 루트와 달리 휙휙 급변하는 상황을 시로의 뒤틀린 신념이라는 구심점 아래에서 휘두르는 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구심점은 약해지고 빠른 전개는 툭툭 끊어 먹으려고 나오는 듯한 과거 회상으로 날려 먹으니 장점이 퇴색된 작품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버서커 vs 4차 아처 전인데, 5차 성배전쟁에서 유력한 우승후보 버서커가 알 수 없는 서번트에 의해 허무하게 탈락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한 번 쌔게 움직이는 장면이거든요.
이제까지 압도적인 무력으로 3명의 서번트를 휘하에 둔 캐스터마저 승리를 장담 못하는 녀석을 순살 시키는 4차 아처의 전면 등장을 이 작품은 그 중간에 ‘이리야의 회상 집어넣기’로 임팩트를 완전히 죽여 버립니다.
원작에서는 4차 아처의 습격 -> 토오사카, 시로가 목격 -> 버서커 분전 하지만 처참하게 패배 -> 이리야 피습 -> 짧은 회상 이었다면 습격 직후에 회상을 길게 꾸겨 넣는 바람에 전투의 템포와 임팩트를 다 죽여 버리는데 시원하게 성공하죠.
이런 식으로 캐스터의 회상도 유의미하게 분량을 잡아먹는데 이게 Fate/Zero처럼 군상극을 표방했으면 성배전쟁이니까 하고 넘어갈 수 있겠으나 Fate/stay night이고 특히나 UBW는 시로와 아처 그리고 토오사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켰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짧은 분량으로 시로의 이야기를 전하려면 원작의 회상 같은 것을 짧게 줄이든가 해서라도 시로 개인에 대한 생각을 더 보여주었어야 했는데 줄이기는커녕 거의 한 화씩 잡아먹는 통에 지루하기는 엄청 지루한데 성배전쟁 특성 상 퇴장은 또 쿨하게 해버리니 큰 줄기에는 영향이 없습니다.
물론 화려한 액션이나 나름 신경 쓴 연출들은 눈에 띄지만 영상 매체, 거기다 업계 탑급의 작화 퀄리티와 연출실력을 보여주는 유포테이블의 애니메이션이 텍스트 무더기와 그림 흔들기 정도의 연출을 가진 비주얼 노벨보다 몰입감을 못 주면 저는 성공이라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원작을 안 해본 사람이 Fate/Zero의 후속작이자 유사 시퀄 쯤 으로 본다면 재미있게 볼 수는 있습니다만 원작의 팬으로서는 느낌이 많이 죽어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나스 키노코가 애니메이션 판이 새로운 시대의 페스나라고 선언한 만큼 정사이자 이게 이제는 옳게 된 페스나라도 보는 것이 맞겠지만 평범해진 맛에 속이 쓰린 작품.
애니판에선 그 대비가 한 없이 옅어 져버린 그 영창으로 글 마무리 해보고자 합니다.
사용자는 여기에 홀로
검의 언덕에서 철을 두드린다.
그렇다면, 내 생애에 의미는 필요치 않으니.
이 몸은 무한한 검으로 되어 있다.
-다른 미래를 맞이할 에미야 시로의 UB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