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조가 사실은 요절할 뻔 했다?
영조 24년인 1748년, 입 안에 난 염증과 심각한 현기증에 의해 밥을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죽음을 감지합니다.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영조도 이 시기즈음 자신도 혹시? 라는 생각을 하는 듯 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조선왕조실록을 본다면, 약방(내의원)에서 진료 후 박문수가 들어와 영조는 구중 궁궐에 있으면서 국사를 돌보지 않는다며
영조에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구중 궁궐에 국사를 돌보고 있지 않을 정도로 영조의 건강은 영 아니었습니다.
2. 그런 영조를 사도세자가 살렸다.
1748년, 사도세자는 병중에 든 영조를 위해 신맛나는 과일과 참외 그리고 고초장(고추장)을
궐 밖에서 구해다가 바쳐 영조의 기력을 회복시키게 됩니다.
이후 고추장이 얼마나 좋았던지, 1749년 7월 경오일(24일) 승정원 일기를 보면
'옛날에 임금에게 수라를 올릴 때, 반드시 짜고 매운 것을 올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 나도 천초(川椒) 같은 매운 것과 고추장(苦椒醬)을 좋아하게 되었다.
식성이 점점 어릴 때와 달라지니 이것도 소화 기능이 약해져서 그런가.' 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영조는 숙종과 경종의 밥상에도 짜고 매운 양념이 오른 것을 보았다며
자기도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고추장에 대해 말했고 이후 내의원에서 연일 고추장을 올렸다고 합니다.
자신이 병중일 때, 사도세자는 궐 밖을 돌아다니며 어떻게든 영조를 살려보겠다며 애썼지만, 결국 돌아온건 대리청정과 돌이킬 수 없는 죽음 뿐이었습니다.
3. 당시 고추장은 얼마였을까.
1748년 작중 상황에서는 이제 막 궁궐에 고추장이 반입된 시기입니다.
고추장을 만드는 제조법은 입맛 잃은 숙종에게 바칠 음식을 수소문하여 모은 책인 『소문사설(謏聞事說)』 중 식치방(食治方)에 순창 고추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콩을 쑤어 두 말을 백설기 닷 되와 합하여 곱게 빻고 짓이겨 빈 섬에 넣고는, 정이월(正二月)에 7일 동안 띄워 볕에 쬐어 말린 뒤에 좋은 고춧가루 엿 되를 고루 섞는다.'
다만 소문사설이 편찬되고 나서도 정작 궁궐에서는 고추장이 없던 시기로 작중 당시까지는 민간에서도 먹는 사람만 먹는 장이었습니다.
사실상 가문의 비법과도 같은 존재에다, 고추 농사가 그리 흔하지 않았음을 고려한다면 고추장 자체가 필수재라기 보다는 사치재에 가깝지 않을까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고추장을 팔고 산다고 하면, 그 자체로 부르는게 값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다만, 비빔밥의 가격을 기초로 사치재로서 고추장의 가격을 유추해 볼 수는 있을것 같습니다.
영조 때 문헌 <낙하생집> 중 '부자가 여름에 먹는 골동반(비빔밥) 한 그릇과 같은 값으로 600전에 달한다.'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시중 물가를 비빔밥과 비교하며 사치풍조를 비판한 것인데, 당시 600전이 어느 정도의 가치였는지 그리고 부자들이 먹었다는 비빔밥이 어떤 재료를 넣어 만든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 또한 사치재라고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후 한 세대 후에 나온 정약용의 <경세유표>에서 1만 전은 100냥으로 쌀 20섬 값이라고 했습니다. 이 기준으로 보면 600전은 6냥으로 쌀 3섬 값이라는 점.
평상시 즐겨먹는 음식이 아닌, 말 그대로 부자들이나 먹을법 한 음식들의 가격은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으니, 초기 고추장도 이러한 범주이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4. 생각보다 왕에게 험한 말을 많이 했던 박문수.
박문수를 떠올릴때면 어사 박문수, 곧고 강직한 박문수 라는 이미지가 강한데, 적어도 영조 대상으로 박문수는 가끔 선을 넘는 모습을 보입니다.
영조 너 세제때부터 나약한거 알았는데 나이 먹어도 나약한거 똑같네. 하나같이 문제 있는 관료들 안 내치고 뭐 하는지? 게다가 문제 있는 놈들이 뭉쳐서
저언하 아무 문제 없습니다 하면 너도 오케이 할거잖아?
라며 면전에 대고 신랄하게 까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그를 영조가 끝까지 아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 합니다.
영조 : 고추장? 고추장? 고추장? 너 지금 간장 생각나라고 나 비꼬냐?
고추가 늦게 들어왔다고 알고 있는데, 실제로 고추 키워보면 이거보다 손 많이가는 채소는 없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