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고 가까운 4·16기억전시관을 찾았다. 세월호 참사 후 인근 다섯 마을의 변화를 알려주는 ‘마을의 4·16’이라는 전시였다. 일동마을에서는 매주 촛불을 들었고, 사동은 청소년 공간을 만들었다. 반월동은 매달 기억밥상을 차렸다. 희생자가 두번째로 많았던 와동에서는 미안한 마음에 주민들이 분향소 앞을 지나가지 못했다. 어렵사리 모인 주민들은 펑펑 울었다. 이윽고 ‘이웃대화모임’을 만들었고, ‘주민한마당’, ‘마을학교’로 이어졌다. 100명 넘게 희생된 고잔동에서는 영구차와 언론사 차량 들이 늘 북적댔다. 징글징글하다는 말이 나왔다. 이듬해 봄, 사람들이 ‘기억꽃집’을 열어 꽃을 나눴다. 꽃집이 고잔동으로, 온 안산으로 퍼졌다. 꽃같이 예쁜 아이들을 기억하는 4월이 됐다. 재난은 깊은 고통으로 지역을 갈랐지만, 마주 잡은 손, 부둥켜안은 가슴도 낳았다. 그렇게 공동체들이 탄생했다.
우리동네 합창단 파노라마도 그렇게 태어났다. 가슴 먹먹하던 그 봄에 평범한 동네 사람들이 분향소를 만들고 촛불을 들었다. 아이들 생일상을 차리고 유가족 이야기를 들으며 울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어색하게 노래 부르며 행진도 했다. 세월호가 던진 질문을 새기며, 뭐라도 하자고 다짐하곤 했다. 막 태동하던 마을이 세월호를 만나며 조금 단단해졌다. 이듬해 6월, 모이면 술만 마신다며 핀잔 듣던 동네 남자들이 중창단을 만들었다. 여성들도 합류하며 합창단이 됐다. 꽃을 나눈 안산의 마을 사람들처럼 지역에서 노래를 나눴다.]
[그날 이후 ‘기억하겠다’는 말은 한국어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그것은 고통에 잠긴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이면서, 범박한 일상에 젖어가는 부끄러운 나를 깨우치는 다짐의 말이 됐다. 그래서 오늘 감히 말한다. 기억하겠다.]
글 잘 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