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원한 친구,
애니메이션
"어차피 난 오타쿠다 이거야. 이상한 사람이라고.“
-러키스타, 이즈미 코나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언제부터 애니메이션을 직접 찾아보게 되었더라?
어릴 때만해도 투니버스나 챔프에서 항상 애니메이션을 틀어주었기 때문에 딱히 오타쿠가 아니더라도 애니메이션을 접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만
직접 찾아본다는 건 애니메이션을 본격적으로 좋아하게 된다는 의미니까요.
"네 영혼 받아가겠어!."
저는 초등학생 때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을 직접 찾아봤습니다. 그게 바로 본즈의 ‘소울이터’ 였습니다.
초등학생이 보기에는 약간 에로하고 잔인한 장면들이 있었지만 그 때 짝사랑하던 여자얘가 그걸 좋아했었거든요.
하지만 그때까지는 애니메이션에 대해 별 생각 없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에 입문하게 된 건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때문이었습니다. 1화부터 바니걸 복장을 한 눈물 가득 미소녀가 미쿠루룽 하는 괴상한 노래를 부르는 첫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하루히를 보고 충격을 받은 후 tv에 자체적으로 있던 vod로 이런 저런 작품들을 찾아보았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토라도라’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되어있어"
츤데레 폭력녀 타이가와 눈매만 날카로운 가정적인 남자 류지의 후유증 유발 두근두근 러브 스토리.
그걸 이해하기에 저는 그때 어렸고 연애경험이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연애경험이 없는지라 이해는 잘 가지 않습니다.
왠지 슬퍼지니 넘어가고요.
"통칭 SKET단이야."
그렇게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지던 중 투니버스에서 만난 작품이 ‘스켓댄스’였습니다.
해결사라는 이름으로 학교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해준다는 내용은 어린 제 마음을 불태우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기억은 이루고 싶은 꿈이 되어 고등학생 때 진짜 고민상담 동아리를 개설하는 계기가 됩니다. 나름 대성 했습니다만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니 치워두고요.
중학생 쯤 올라가니 이세계물이 판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소드 아트 온라인’을 필두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이세계물은 금세 애니판을 장악했습니다.
뭐 소드 아트 온라인이 이세계가 아닌 겜판소인 건 둘째 치고 그 때 봤던 작품 중에 기억에 남는 건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와 ‘문제아들이 다른 세계에서 온다는 모양인데요?’ 정도 뿐 인 거 같습니다.
절대 바니(걸)이 와서 기억에 남는 건 아니고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크게 인상 깊은 작품을 보지 못하는 것인지 기억을 못하는 건지. 솔직히 아직도 이세계물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지라 그 시절이 분명 재미는 있었지만 휘발성이 강한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넘쳐나는 이세계물에 지쳐가던 제가 찾게 된 반가운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바보와 시험과 소환수’입니다.
미성년자가 보기에 매우 유해한 개그들을 치지만 성적과 그로 인해 생기는 무한 경쟁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아주 기묘한 작품이였죠.
처음에는 개그를 위주로 봤지만 돌려볼수록 주제 의식이 머리에 들어왔습니다. 그 때문에 특유의 반골 기질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자기 합리화를 살짝 해보고 넘어 가겠습니다.
"신지, 에바에 타라"
고1, 뒤늦게 찾아온 중2병의 여파로 “나는 남들과 다른 애니를 찾아보겠어!” 하는 쓸데없는 뭔가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심오한 작품들을 찾아다녔고 그렇게 만나게 된 것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었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애니를 본 시간보다 해석을 찾아본 시간이 10배는 긴 거 같은데 아직도 정답을 내리지 못한 모호한 작품이예요.
그래서 스스로 내린 결론이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이 정답이 아닐까” 하는 미지근한 답이네요.
물론 그게 안노 히데아키가 의도한 바라고 생각은 합니다.
중2병은 길어져 그로테스크한 것을 싫어하는 주제에 ‘데빌맨 크라이베이비’ 같은 작품들을 꾸역꾸역 처먹는 지경에 이르러 정신이 피폐해지던 차에
중2병을 이겨내고 나이에 맞는 청춘물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풀꽃 같은 은은한 매력의 ‘빙과’, 방황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사춘기 증후군에 담아낸 ‘청춘돼지는 바니걸 선배의 꿈을 꾸지 않는다.’ 등등
그 중에서도 학창시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리라이프’였습니다.
"마음껏, 지금 이 순간을 즐겨."
사회에 치이던 주인공이 학생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리라이프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어 다시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는 따뜻한 작품이었죠.
어린 마음에 그냥 어른이 빨리 되고 싶다던가 학교가 귀찮다던가 하는 생각을 가졌던 저에게 학창시절은 되돌아오지 않는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라는 걸 새겨주었고
한정된 시간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열심히 뛰어다니게 만들어 준 은인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머리가 무거워지던 차에 보던 ‘카구야님은 고백받고 싶어’나 ‘월간순정 노자키 군’ 같은 러브코미디는 복잡한 현실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는 휴식이 되어주었고
‘SSSS.GRIDMAN’과 같은 작품들은 스스로의 취향이 무엇인지를 짚어준 좋은 이정표였습니다.
특히나 그리드맨은 매주 다음 화를 기대하며 한 장면 한 장면 주의 깊게 분석하기 시작한 첫 작품이라 제 나름 의미가 크네요.
"다시는 오지 마라!"
시간은 지나 어른이 되고 운명적이다 라는 생각이 든 한 작품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
작화, 연출, 동화, 캐릭터와 설정 등등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들었고 BD를 살 생각까지 하고 있었습니다만 아쉽게도 그 때 딱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아지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었습니다.
그 때의 주머니 사정에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어딘가 이상한 거야."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의 참사를 겪고도 애니메이션을 아직까지 좋아하는 것은 바로 다음 분기에 방영했던 'SSSS.DYNAZENON’ 덕분입니다.
두말 할 필요 없는 인생작으로 비일상과 일상 사이의 경계에서 합체로봇이라는 소재를 적극 활용한 캐릭터 빌드업와 전개, 섬세한 묘사와 화려한 연출.
거기에 자유와 부자유라는 선과 악으로 나뉘는 것 같은 주제를 비틀어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는 명작이죠.
물론 이 작품으로 치유 받은 저는 바로 다음 분기 ‘쓰르라미 울적에 졸’을 보며 더 큰 내상을 입었습니다.
"도망치면 하나, 전진하면 둘."
그 후, 군대에 갈 때까지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입대를 하고 상병 쯤 되었을 때 추천 받은 ‘봇치 더 락’은 제 귀와 눈이 아직 애니메이션을 바란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후반부야 어찌되었든 매주 도파민을 아주 빵빵하게 채워주던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는 슬레타의 귀여움과 미친 속도감, 매주 쏟아지는 충격적인 전개들로 군생활에서 가장 지루한 시기를 넘길 수 있게 해준 선물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애니메이션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나? 라고 물으면 조금 애매합니다.
제 좌우명은 페르소나5에게 받았고, 제일 가슴에 와 닿은 메시지들은 블루 아카이브 같은 게임에서 찾았습니다.
하지만 가장 오래 전 부터, 그리고 언제나 함께 했던 것은 애니메이션인 거 같습니다.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은 본편을 보지 않는 지금도 개봉할 때마다 꼬박꼬박 보러가고 ‘디지몬 어드벤처’가 남긴 Butter-Fly는 아직까지도 제 노래방 애창곡인 것처럼
의식하지 않았지만 항상 곁에 있었습니다.
꼭 인생에 큰 영향을 주어야만 좋은 친구인가요. 그냥 같이 있으면 즐겁고 떨어져 있다가도 만나면 재밌는 게 좋은 친구지.
오랜 취미이자 추억 그리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고마운 친구, 애니메이션에게
“몇 십 년이 지나도 너를 친구로 생각할게”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24기 ed-
'오타쿠는 소통과 오락으로 세상에 필요한 것을 만들어 내는데 관심 있는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마블 코믹스의 아버지, 스탠 리 어록 +
너무 좋은 어록이네요. 저도 좋아하는 어록 하나 남기겠습니다. "매니아가 욕먹는 세상에 대해서 이런 매니아와 같은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진정한 영웅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오타쿠가 지금 보다 더 욕먹던 시대에 서태지가 말했듯 문화를 소비하고 즐기는 것 또한 나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동력이 되어 더 훌륭한 작품이 나오고 세상을 바꿀 누군가가 영향을 받을지도 모를 일 이니까요. 딱히 세상을 바꾸려고 덕질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손가락질 당할 일은 절대 아니라 생각하기에 공감이 많이 가네요.
너 친구 프리큐어
그...이왕이면 가면라이더 쪽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