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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카리님의 뜬금없는 환영에 나는 뭐라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그런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면서 묻는다. 「왜 그러니?」 「아니요. 그게….」 방금 눈치 챈 건데, 나 아직 장을 안 봤구나. 하긴, 마을에서 그 난리가 있은 후, 바로 케이네를 따라 서당으로 갔고, 그 후는 뭐…. 이런, 이래서야 오늘 하루 완전 삽질한 거잖아! 「혹시, 장을 보지 못한 걸 신경 쓰는 거야?」 「…네.」 유카리님의 물음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는 수 없잖은가. 오늘 여러 가지로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자기 변명이 아니다. 지금 다시 마을로 날아간들 컴컴한 밤이 되고 말겠지? 구시대 배경인 마을에서 밤이 되면 상점가들이 죄다 문 닫을 거고. 면목이 없어진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유카리님이 신경쓰지 않는다는 어조로 말했다. 「하는 수 없지. 오늘 저녁은 간편식으로 하자.」 싱긋 웃는 표정에서 나는 유카리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간편식이라면 내가 아는 한 편의점 도시락이 떠오르지만, 그건 아니겠고, 간소식을 말하는 걸 거야. 나는 고개를 숙이며 수긍의 뜻을 밝혔다. 「네, 그럼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아니야, 됐어.」 「네?」 「1분 만에 데워 먹는걸 뭐하려 지금부터 차리겠다는 거야?」 「네에?」 저기요. 그거 설마? 내가 아는 그건 아니겠죠? 아무리 봐도 여기, 환상향에는 도시락을 파는 편의점 같은 게 없어 보이는데. 「오늘 많이 지쳤을 텐데, 얼른 집안으로 들어가서 쉬고 있으렴.」 「네.」 유카리님은 나에게 배려있는 말을 남기고는 집안 현관문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 믿기지 않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건 틀림없는 편의점 도시락이었다. 그것도 세븐 일레븐에서 파는 인기 만점의 도시락! 이렇게 셋이서 밥상에 둘려 앉아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 광경은 매우 신선하면서도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이건 안 어울린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저 도시락만이 시대를 초월하여 이곳 과거로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식겠다. 안 먹고 뭐하니?」 눈꺼풀을 떨며 내 몫의 도시락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나에게 유카리님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편의점 도시락이라 조금만 지나면 금방 식어버린다는 거 나도 모르는 게 아니지만, 위화감이 너무 심했다. 배는 당장이라도 도시락을 먹어치우라고 꼬르륵거림에도 선뜻 젓가락질하기 어려웠다. 여기 일단, 물어봐야 할 부분인거 같아. 나는 유카리님을 빤히 응시하며 이 도시락의 출처에 대해 물어보았다. 「유카리님, 이건 대체 어디서 나신 겁니까?」 「바보 같은 질문이네? 편의점인 게 당연하잖아.」 「아니, 그건 압니다. 근데 여기에 편의점 따윈?」 「아-,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유카리님이 답답하다는 듯이 두 눈을 가늘게 했다. 그리고 그 눈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내 능력에 대해 잊은 거니?」 유카리님의 능력은 경계를 조작하고, 틈새를 이용하여 어디든지 손쉽게 다니는 것. 그 치트키 같은 능력을 상기 했을 때, 나는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확실히 유카리님의 틈새라면 바깥 세계라고 일컬어지는 현대의 일본을 왕복하는 것 따윈 아무것도 아니겠구나! 알면 알수록 대단하고 부러운 능력이다. 생각에 잠긴 채, 시선을 떨구는 나에게 유카리님의 일침이 들려왔다. 「저래서야 앞으로 결계 복구일은 어떻게 맡길지 걱정이네.」 턱을 괴며 한숨을 내쉰다. 결계에 대한 일. 케이네에게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다. 원래의 란은 유카리님을 도와 결계를 복구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지금 나에게 닥친 일 중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뭐 아는 게 있어야지. 유카리님 따라서 나도 한숨을 내뱉었다. 얼굴에 근심이 다 드려났는지, 첸이 걱정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괜찮아, 조금 피곤한 거뿐이니까. 귀여운 첸을 이 이상 걱정시키게 할 순 없지. 나는 젓가락질을 휘적거리며 상에 놓인 도시락을 입에다 집어넣었다. 우물우물. 맛은 있구나. 역시, 세븐 일레븐 도시락이야. 평소, 비싼 값 때문에 반값 할인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은 건데 말이야. 도시락을 그럭저럭 맛나게 먹으면서도 부디 유카리님이 나에게 그 결계 복구에 관한 일 만큼은 시키지 않았으면 하고 빌었다. 진짜 그것만은 못한다니까! * 힘든 란으로서의 첫 하루가 지나고, 아침이 밝아옴과 동시에 내 두 눈이 번쩍 떠졌다. 따로 자명종 같은 게 없는 데도 이른 아침에 눈이 떠진 걸 보면, 확실히 란은 아침형 인간‥ 아니, 요괴임이 틀림없었다. 하룻밤 잤을 뿐인데도 어제의 피로감이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굉장해! 이게 란의 몸인가? 아니지, 구미호 정도나 되는 요괴니까 당연한 걸 거야. 몸을 일으키는데 등 뒤로 느껴지는 무게감. 이 어마한 크기와 수를 자랑하는 꼬리만큼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간혹 손을 뒤로 해서 만져보면 푹신거리는 것이 좋은 촉감이긴 해도 내 몸에 붙어있는 거라 동시에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다. 다들 만져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 어제 마을에서 느꼈던 시선들이 대게 그러했다. 만져보고 싶다는 어마어마한 욕망의 소용돌이. 단순 눈빛만으로 그만한 욕망을 느끼다니, 이 꼬리의 위력을 충분히 실감하는 바였다. 하암. 작게 하품을 내뱉은 나는 이불을 개고, 평상복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옷장 안에는 많은 수의 옷들이 걸려있었지만, 죄다 똑같은 것들뿐이라서 단벌 숙녀가 된 기분이 든다. 다른 옷엔 관심이 없었던 걸까? 움직이기 편한 옷이긴 하나, 객관적으로 보면 좀 더워 보이는 차림이었다. 특히, 어제 같이 더운 날에는 통풍이 안 되서 땀이 찬다. 특히, 등 뒤쪽 꼬리부분이. 마음 같아서 그냥 훌러덩 벗어던지고 자연인으로 다니고 싶을 정도로, 이 옷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심정이 간절해지기도……. NO! 안 돼. 그랬다간 그저 노출광 치녀일 뿐이잖아! 어쩐지 어제 케이네에게 들었던 란에 대한 소문이 더 더욱 신빙성을 더해가고 있었다. 이 몸의 원주인도 그랬던 건가? 그러면 좀 시원한 차림을 하고 다니면 좋을 텐데. 좋아, 오늘 마을에 들려서 시원한 복장을 찾아보기로 하자. 나중에 할 일, 한 가지 정해놓은 나는 기분 좋게 기지개를 키고서 장지문을 활짝 열었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서늘한 공기가 전신을 일깨운다. 크게 심호흡을 함으로서 폐 속의 오래된 공기를 맑고 깨끗한 공기로 바꿔놓았다. 짹짹. 참새 소리가 들리고 저 멀리 산등성으로부터 안개에 싸인 태양빛이 밝게 떠오르고 있었다. 이 정도 날씨에 이제 막 밝아 온다하면 6시 쯤 되겠구나. 아니, 그 보다 더 일찍 은가? 식사 준비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기에 나는 앞으로 매일 보게 될지도 모를 경치를 느긋하게 감상했다. 낯설지만, 익숙한 풍경. 이젠 나도 내 자신이 누구인지 중요치 않게 되었다. 아무렴 어때? 기억이 애매하다면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면 될 것을. ─ 정말?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직접 들려왔다. 이건 틀림없이 란의 목소리였다. 나는 주변을 둘려보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머릿속 목소리에 집중했다. ─ 너는 내가 아니지만, 난 너야. 또 들려왔다. 혹시 이거 텔레파시인가 하는 그런 건가? ─ 아니야. 네 안에서 말을 걸고 있는 거야. 내 안에서라면 혹시, 네가 란인 거지? ─ 음…. 절반만 맞췄어. 나머지 절반은 뭐야? ─ 난 란이지만, 동시에 란이 아니란 의미야. 지금은 네가 란이고. 그게 무슨 뜻이야? 좀 더 알려 줄 수 없어? ─ 미안, 난 이제 슬슬 자지 않으면 안 돼. 뭐? 잠깐, 기다려. 난 아직 듣고 싶은 얘기가 잔뜩 이라고! ─ 그 동안 미안했어. 기다려! 나는 몇 번인가 내 속의 그 목소리에게 말을 걸었지만, 더 이상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체 뭐인 거야? 그 목소리 때문에 괜한 혼란만 가중되었다. 어째서 사과하는 거지? 그리고 지금은 내가 란이란 소리는 또 뭐야? 괜스레 이중인격자가 된 기분이었다. 아까 들려왔던 목소리와 말투, 내가 알던 란이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도리가 없기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산등성의 안개는 어느새 걷혀져 있었고, 가려져있던 해가 그 존재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이제 슬슬 식사를 준비해야 할 시간인 거 같다. 나는 주방으로 향하는 동안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던 수많은 의문들을 억지로 떨쳐내었다. 언젠가는 이 의문들이 풀릴 날이 오겠지. 그보다 재료가 없어서 뭘 만들어야 하지? 아침부터 난제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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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프롤로그.
다음 회 부터 진짜 본편임.
(불길)
알몸 활보 떡밥..!
두근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