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을 얼굴에 조심스럽게 갖다대자 퍼렇게 터진 인상이 구겨졌다. 그래도 치르노의 도움이라도 없었다면 붓기 때문에 눈도 제대로 못 떴을 것이다. 시원하게 젖은 손이 아픔과 말라붙은 피를 싹 닦아냈다.
어느 정도 응급 처치가 끝나자 마루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마루의 표정이 이상해지자 치르노의 얼굴에는 다시 걱정이 떠올랐다.
"왜 그래? 아직도 어디가 안 좋아?"
"흐윽...아니야. 나 괜찮아. 그냥..."
마루는 얼굴을 비비면서 울음을 삼켰다. 하지만 울면 안되는 상황이라는 걸 알아도 복받치는 걸 어쩌지 못하자 이번에도 치르노가 도와주었다. 몸과 마음을 털어낸 뒤에야 마루와 치르노는 웅크려 앉은 채 소근소근, 아주 조용히 작전 계획을 시작했다.
시작과 동시에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하진 않지만, 꽤 중요한 질문이 입 밖으로 나왔다.
"치르노는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야?"
"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직감? 꼭 여기로 와야 한다는 느낌이 팍!"
말로 표현하기 지극히 난감한 경험을 어떻게든 말로 설명하기 위해 온몸이 비틀려야 했다. 지루한 겨울에 항상 그랬던 것처럼 여기저기를 배회하던 치르노는 아주 강렬한 감에 이끌려 홍마관의 담을 넘었다. 무슨 감이냐는 질문은 없었다. 경험한 당사자도 모르는 것이었으니까. 눈 위에 남은 발자국과 굉장히 수상해 보이는 철문, 흔적을 쫓아갈수록 치르노는 빨려들어가듯 더 빠르게 달렸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불에 탄 흔적을 따라간 끝에 발견한 게 바로 유린의 현장이었다. 마루를 깔아앉고 있는 저 녀석이 얼마나 살벌하건 치르노가 행동을 자제할 이유가 되지는 못했고, 그렇게 지금에 이르렀다.
여기서 마루는 치르노가 어떻게 자신을 데리고 도망친 건지 궁금해졌다. 들쳐업었거나 질질 끌어서라도 간 건가. 어느 쪽이든 도망가는 걸 플랑이 잠자코 바라만 볼 리가 있나.
답은 이랬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내가 누구야? 이렇게 잘 도망쳤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루는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
그닥 구체적이지 못한 탈출 계획은 바로 치르노가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치르노는 길을 완벽하게 기억하지는 못하고 있었고, 이곳의 넓이를 생각하면 객관적으로 그닥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이 주변에서 지도 같은 것도 못 찾았으니 말이다.
플랑과는 길이 잘 엇갈렸는지 귀 기울일 때 들리는 건 마루와 치르노가 내는 최소한의 인기척뿐이었다. 근처에 있다면 마땅히 찾을 수 있는 흐름의 위화감도 마루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쉽고 순조롭지만 그래서 더 입이 마르고 머리가 따끔거리는 긴장감 속에서 둘은 계속해서 소리를 죽여 날았다.
곧이어 둘은 희미한 핏자국과 얼음조각이 녹아서 생긴 물방울 자국을 지나쳤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장소였다. 슬쩍 보이는 흔적만으로도 치르노가 말한 아슬아슬함이 어느 정도였고 얼마나 무모한 짓을 벌였는지 실감이 됐다. 아무튼 어느 정도 되돌아왔다는 걸 확인했으니 다시 나아가려던 때였다.
"아, 드디어 찾았네."
마루는 환각이라도 본 줄 알았지만 그건 치르노의 눈에도 똑똑히 보이는 진짜 플랑이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플랑이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갑자기 뭔가가 나타나는 건 귀신이나 가능한 짓이겠지만 플랑은 적어도 귀신이 아니었다. 귀신만큼이나 만나고 싶지 않다는 건 같았지만. 마루와 치르노는 귀신이라도 본 얼굴을 한 채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허무한 현실로부터 눈 돌리는 단계가 지나가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생각하는 단계가 되었다. 플랑은 새파래진 표정이 아주 볼만하다는 듯 느긋하게 비밀을 보여주었다.
거만하게 까딱거리는 플랑의 왼팔이 붉게 흩어졌다. 마치 피를 뿌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저건 액체가 아니었다. 이내 붉은빛이 다시 모여들면서 그 정체를 드러냈다.
소름돋는 소리를 내면서 서로를 물어뜯고 엉키면서 플랑의 신체를 쌓아올려가는 검붉은 박쥐들이었다.
"으엑, 저게 대체 뭐야..."
치르노 말마따나 보고 듣기 좋은 광경은 절대로 아니었다. 마루의 상상 속에서는 저 기분나쁜 광경이 조금 다른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온몸이 조각조각 빨간 박쥐로 변해서 좁은 틈이나 눈길이 잘 안 가는 사각에 흩어져서 교묘하게 숨는 모습이 떠올랐다. 타고난 사냥꾼은 당연히 사냥감이 예상할 수 있는 짓은 하지 않고, 예상 외의 짓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우월한 법이었다.
잘 봤냐는 듯 플랑은 오른손에 든 지팡이를 고쳐잡으면서 여유를 부렸다. 완만하게 휘어 있고 끝은 삽머리와 비슷한 게 악마가 꼬리를 살랑거리는 것 같았다. 어떤 용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안증을 일으킬 것 같았다. 매번 볼때마다 솟아나는 괴리감 때문에 마루는 저 미소가 혐오스러웠다. 간혹 잡아먹을 듯 분노를 표출할 때가 거짓말 같을 정도로 거만함과 여유로움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우리 집에 멋대로 들어온 건 그렇다치고, 저 애 하나 때문에 나한테 덤빈 거야? 요정이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만."
"너야말로 내 친구 건드려놓고! 방금 전엔 잘 빠져나왔나 본데, 이번엔 확실하게 얼려서 못 나오게 해주마!"
"끼리끼리 친구라더니 둘 다 겁도 없고 입도 험하네."
저게 사람 납치해온 사람이 할 말인가. 마루는 더 말도 안 나온다는 듯 이를 갈았다. 치르노는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플랑이 그걸 가로막아버렸다.
지팡이가 한번 허공을 훑자 석영처럼 새하얀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풀무질을 받은 것처럼 마루의 온몸에는 불길이 그 줄기를 뻗어나갔다. 푸른빛의 불투명한 얼음판은 잠시 눈부신 빛을 차단했지만, 순식간에 얼음 속에 밝은 빛이 스며들었다. 둘은 방패를 단단히 받들면서 기도했다. 격돌의 순간 정신적 섬광 때문에 눈꺼풀을 꽉 닫았는데도 눈앞이 새하얗게 터졌다.
마루와 치르노, 그리고 얼음 방패는 몇 걸음의 후진을 대가로 광선을 막아냈다. 비명은 안 질렀다. 그 대신 어금니가 조금 아팠다. 불규칙적인 균열들 때문에 불투명함이 더욱 심해진 얼음은 아직도 조각나지 않은 채 간신히 붙어 있었다. 움푹 파인 정중앙은 각이 져 있는 얼음 전체의 형상과는 달리 녹았다가 다시 얼어서 수면에 물방울이 떨어졌을 떄와 비슷한 부드럽고 둥근 모양새였다.
"이야아아아아아!"
기합과 함께 마루는 그걸 냅다 집어던져버렸다. 충격을 받아낸 직후에 이런 짓을 하자 팔다리를 칼로 긋는 기분이 들었고 입 안에서는 피맛이 느껴졌다. 체격에 맞지 않는 차력 묘기. 플랑이 마루의 투척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표현이었다. 온몸을 꽉 감싼 불꽃이 저 조그만한 몸을 지탱하고 힘을 보탰다.
플랑이 그걸 지팡이로 쳐내서 부숴버리자 사방으로 터진 얼음가루는 예쁘게 반짝거렸다. 곧이어 그 빛은 희끄무레함에 가려져 사그라들었다.
이미 계획 같은건 망상만큼이나 의미 없는 생각이 되어버렸다.
"뛰어!"
"저것들이 또 안개나 뿌리면서 내뺄려고!"
플랑은 발주변에 매섭게 터지는 소리에 발목을 잡혔다. 플랑의 시선은 바닥에 꽂힌 철창에서 그대로 위로 올라갔다. 소리의 원인이 플랑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건 플랑에게 아주 익숙한 물건이었다. 청회색이 인상적인 두 개의 장식용 갑옷. 늘 같은 자세로 한 자리만 쭉 지키던 갑옷이 움직이자 플랑은 신선함까지 느꼈다.
당연히 저 훤칠한 갑옷 안에 마루와 치르노가 들어갔다느니 하는 허무맹랑한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플랑은 이 갑옷 안에 있는 게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봤다. 투구의 페이스가드 사이로 불꽃이 날름거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불태우는 것만 빼면 별의 별 재주가 많은 불이었다. 창을 던져 빈손이 된 갑옷과 아직 창을 들고 있는 갑옷이 쇳소리를 터뜨리며 달려들었다. 창날은 장식용치곤 날이 아주 퍼렇게 서 있었다.
이 싸늘한 금속빛이 찰나의 시간이라도 벌어주길 바라며, 마루는 멀어져 가는 불꽃에 의지를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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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마루의 운세나 사주팔자가 뭔지는 알 방도도 없고 여기 있는 누구도 관심없었지만, 불운과 도망칠 일이 많을 날이라고 단정짓기에는 근거가 충분해 보였다.
오늘은 아프고, 뜨겁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괴로운 날이었다.
움직임이 다시 격해지자 진정됐던 통증이 다시 달아올랐지만 등 뒤에서 자신과 치르노를 덮치는 불길을 보자 마루는 아픔이고 뭐고 전부 잊어버렸다.
얼음도 불도 모두 방화벽을 칠 타이밍을 놓치자 결국 이 짓을 또 해야 했다.
"치르노! 다시 숨 참아! 숨!"
"아 진짜 또야! 흡!"
숨을 쉴 수 없는 시간이 지나가자 온몸에서 답답한 증기가 날리고 있었다. 물과 냉기가 없었더라면 아마 허연 증기 대신 숯검댕이가 날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힘겹지만 익숙해져야 할 일이었다.
머리만한 얼음은 비슷한 크기의 광탄을 교묘하게 빗겨쳐 사선을 꺾고, 태우지 않는 불꽃은 시각적, 청각적 공해와 더불어 부서지지 않는 특성을 다해 덫이 되어 흡혈귀의 사지를 묶었다. 언제부턴가 불꽃 올가미는 마루의 손발 이상으로 교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저런 요인들이 모이자 종족 간 격차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추격전이 지속되고 있었다.
'힘은 엄청 세지, 기분 나쁜 박쥐로도 분열하지, 불도 뿜어대는 데다가 성격까지 완전...!'
힘의 격차와 도무지 좋게 볼 수 없는 성격에 대한 악평은 마루의 목구멍에서만 맴돌았다. 그 영향을 받은 건지 몸을 감싼 불꽃이 기분 나쁘게 불똥을 타닥 튀겨댔다.
저기에 한 가지 더 얹자면 체력의 차이 또한 확실했다. 뺨을 쓰리게 하는 아픔도 그로 인한 결과였다. 이번엔 얼굴이 퍼렇게 멍드는 정도로는 안 끝날 것이다. 그때 치르노가 구해줬던 것처럼 이 일방적인 흐름을 꺾어야 했지만 거리 유지도 힘겨운 판에 이것 또한 난제였다. 차분하게 골똘히 생각할 여유도 없었고, 그럴 힘도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많이 지쳤는지, 지금 이 어깨에 붙은 불이 플랑의 불인지 자신의 불인지도 분간하는데 애를 먹던 마루를 깨운 건 치르노였다.
"마루! 정신 차려! 숨 쉬어!"
"흐아! 하아!"
마루는 단순히 지쳐서 눈 깜빡임이 힘겨운 줄 알았다. 다행히도 치르노가 거꾸러지려는 마루를 붙잡아 일으켰다. 말을 걸거나 등을 두드리는 정도로는 부족했던 탓에 극단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급하게 불어넣은 냉기가 마루의 심장을 쾅 울렸다.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지금 당장 회복시키지 않았더라면 마루는 저 앞에 보이는 문을 못 보고 넘어갈 뻔했다.
"저 문! 저기로 가! 빨리!"
마음도 급하고 머리도 아픈 와중에 마루의 확신은 섣부르긴 했다. 그래도 부족한 견식과 경험치곤 정확하게 문 너머를 알아차렸다. 저 문틈을 통해 열기에 들뜬 바람이 사납게 순환하고 있었다.
저 문 너머의 공간은 넓었다. 좁아서 공격도 제대로 못 피하면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쫓기는 이때, 지금보다 넓은 곳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치르노는 마루의 판단을 믿었는지 한번 더 냉기를 뿜어주면서 속도를 올렸다. 몸살에 걸린 것처럼 냉기가 마루의 몸을 떨게 했지만 질리도록 겪고 있는 뜨거움보다야 훨씬 나았다.
다양한 온도의 수증기, 섬광탄, 불꽃 올가미에 얼음덩이들까지. 앞에서 뿌려대는 온갖 방해 요소 때문에 시야가 엉망이긴 했지만 집 구조를 모를 리 없던 플랑은 당연히 이를 저지해야 했다. 그런데 이미 몇 번이고 버티는 걸 봤음에도 플랑은 이번에도 불꽃을 택했다.
게걸스럽게 공기를 삼키면서 다가오는 저 불기둥이 지금까지의 불길과는 다르다는 걸 깨닫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둘 다 실수했다고 생각했을 때 피할 곳은 없었다.
번뜩 생각난 걸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건 마루보다는 치르노가 더 전문이었다. 치르노에게 무작정 끌어안겼을 때 마루는 살면서 느낀 것 중 최고의 차가움을 경험했다. 의식조차 얼려 꺼뜨릴 것 같은 한기였다. 열풍과 한기가 부딪치자 일어난 회오리가 얼핏 마루의 눈에 보였다. 마루와 치르노의 온몸을 새하얗게 덮은 서리와 눈꽃이 바람에 깎여나갔다.
...
흥건하게 물이 고인 자리에서 움찔움찔 크고 작은 파문이 퍼져나갔다. 마루는 뜨거움이 대부분인 오늘, 오랜만에 추위를 느끼면서 정신이 들었다. 이렇게 깨어날 때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서 화들짝 놀라는 기분을 느꼈다.
한가하게 기절해 있는 게 편하겠지만 움직여야 했다. 추위에 이가 딱딱 부딪치는데도 마루는 더 추운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리에 힘이 없었지만 마루는 치르노의 곁으로 최대한 빠르게 기어갔다. 가만히만 있어도 스멀스멀 나오는 치르노의 냉기는 마루를 안도하게 했다. 흠뻑 젖은 몸은 그렇게 편하지 않았지만.
차가움이 몸을 찔러대자 감각이 다시 또렷해졌다. 자연히 마루는 이를 꽉 물면서 신음을 흘렸다.
"끄으윽..."
"여기서부터는 출입금지. 그게 우리 모두한테 좋을 거야."
참 자비롭게도 플랑은 문 옆에 기댄 채 둘 중 누군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치르노는 물론, 처참한 몰골이 된 마루도 플랑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마루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미지근함은 가는 길마다 따끔거림을 남겼고 턱끝에서 묽은 붉은색이 되어 바닥에 뚝 떨어졌다. 뭐에 다친 건지 얼굴 곳곳은 긁히고 베인 상처들이 나 있었고 흠뻑 젖어있기까지 해 마루는 눈뜨고 보기 불쌍한 꼴이었다.
기절하기 전에 있었던 일 중 마루는 몇 가지가 똑똑히 떠올랐다.
빙하와 비교했을 때 부족한 건 나이 정도밖에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단단한 얼음의 방벽.
마치 거인이 휘두른 망치마냥 그걸 사탕처럼 깨부숴버린 불길.
엄청난 고열이나 폭발의 충격파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걸 그때 육안으로도 알 수 있었다. 불꽃에 이런 표현이 이상하긴 하지만 밀도가 높거나 아주 단단하다는 인상이었다. 그런 걸 무슨 수로 막겠는가. 절망감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바들바들 떨리는 마루의 손은 무의식 중에 다른 손을 잡았다. 미동 하나 없는 치르노의 손이었다. 기억하는 것보다 미지근해진 손에서 물기가 묻어났다.
"진짜 꼴이 말이 아니다. 아프지? 이번에도 그때처럼 끅끅 울 거야?"
"이게 진짜!"
무작정 집어던진 건 거의 다 녹아서 살짝 쥐면 바스러져 버릴 얼음조각이었다. 이마저도 슬쩍 걸음을 옮기자 물 한 방울조차 플랑에게 닿지 않았다.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이 마루의 눈에 들어왔다. 지나치게 과장됐다는 점에서 그건 조롱을 대신하고 있었다. 얼음장 같은 마루의 머리와 가슴이 화악 달아올랐다.
결국 플랑과 마루의 관계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노는 이와 그의 손에 놀아나는 장난감의 관계로.
"어이구 무서워라~. 얼굴 보기가 무섭네."
딱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플랑과 마루 사이의 거리가 좁아졌다. 양 팔은 물론 지팡이를 바짝 길게 잡아도 공격이 닿기에는 애매한 간격이었지만 금방 메꾸어졌다. 마루가 황급히 일어나는 사이에 불길이 치솟아 지팡이의 길이가 연장됐다. 그것에서 익숙함을 느낀 마루는 등골이 싸늘해졌다.
지팡이를 칼자루로 보면 불길은 거대한 검신의 형상이 되었다. 불길을 휘감은 양팔을 들어올릴 때 마루는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불꽃이 저렇게 넓고 얇은 형태라면 어떤 기능을 할지 모를 리가 없다. 맨손으로 내리치는 검을 피하는 것도 아니고 막으려고 하다니.
"넌 불을 다루는 재주는 있는데, 정작 불인데도 뜨겁지는 않잖아? 대신 그렇게 몸을 감싸거나 갑옷을 움직이는 건 신기하더라고."
가장 격하게 타오르는 두 불꽃이 부딪치는 순간 마루는 천리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고, 플랑의 말은 빠르게 멀어지는 옹알이 소리처럼 들렸다. 모든 물기가 후두둑 털려나갈 것처럼 팔다리가 부들거렸다. 다행이라면 플랑은 힘조절을 아주 잘했다 생각하면서 이 이상 힘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마루는 남의 말을 들을 상태가 아니었기에 플랑의 말은 듣는 이 없이 허공에서 타버렸다.
"나도 비슷한 거 할 줄 아니까 한번 제대로 시험해 보자. 내가 잘 봐가면서 힘조절할 테니까 죽지는 않을 거야."
금속이 서로 충돌하고 긁는 것처럼 두 불꽃 사이에서 까각대는 소리와 불똥이 터졌다.
마루의 온몸을 적신 물기가 순식간에 증발해 날아갔다. 온기가 차가운 사지에 힘을 주었지만 아주 잠깐뿐이었다.
...
마루는 자신의 얼굴에 생긴 상처들의 원인을 알아냈다. 톱니처럼 날카로운 겉불꽃들이 살랑살랑 그를 위협했다. 맨살에 닿으면 깔끔하게 베일까, 아니면 거칠게 찢어질까.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칼날 아래에서 길거나 짧다는 표현을 덧붙이기 애매한 시간이 흘렀다.
세심한 불조절을 하느라 지금 손이 바쁘지만 않았다면 플랑은 저 사력을 다하는 모습에 박수를 쳤을 것이다. 마루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다는 이성과 저 경탄스러운 모습을 더 보고 싶다는 욕구가 팽팽하게 대립했다.
불기운이 숨을 타고 들어가 목구멍과 가슴 속을 태워버리려 했고 뱀의 혀처럼 살갗을 탐욕스럽게 핥는 상황은 마루의 정신머리가 이상해지기 충분했다. 사람은 숨을 쉬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주술이 빚은 불꽃의 저항은 무모했다. 아무것도 태우지 못하는 어중간한 불꽃이란 건 결국 이런 거였다.
"빨리 일어나 줘... 제발...!"
불기운을 삼키지 않으면서 말하니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무의미한 시도였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치르노를 깨워야 했다. 아직까지도 마루가 버티고 있는 이유는 그의 발주변을 적시고 있는 물웅덩이에 있었다. 도저히 다 막아내지 못하고 새어나온 열기는 치르노를 서서히 물로 바꿔버리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마루가 빠져나가면 어떻게 될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지도 않는 요정을 지키겠다는 이유가 이 어중이떠중이 불꽃을 아득바득 피우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비웃음당할 만큼 쓸모없는 이유는 아니었다. 얄팍한 마음가짐으로는 저 업화를 버텨낼 힘이 나올 리 없었으니까. 그때처럼 치르노가 깨어나서 거들어 줄거라고 분명히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 믿음이 배신당하는 비극적인 결말은 없었다. 열에 지쳐 있던 정신이 발목을 타고 올라온 차가움에 놀라 화들짝 깨어났다. 마치 제대로 숨쉬라고 일갈하는 것 같았다.
'얼씨구, 얘는 무슨 힘이 이렇게 좋다냐.'
아주 근소한 차이였지만 지팡이가 조금 올라가자 플랑은 그걸 다시 눌러버리기 아깝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곧이어 그 생각이 뚝 끊어졌다.
마루의 오른팔은 왼팔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자리를 벗어났다. 정말 못 볼 꼴이라도 봐주겠다는 각오로 마루는 불에 휘감긴 주먹을 올려쳤다. 물거품을 걷어내는 것처럼 소리없이 불꽃이 두동강났다. 여기서 플랑이 정말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맨손으로 불을 때려봤자 칼로 물 베는 것과 같을 텐데. 지팡이 끝에는 불꽃이 부러져 삼 분의 일 정도가 남아 있었고 당연히 나머지 삼 분의 이는 마루의 왼손에 있었다.
마루가 저 불덩이를 되돌려주려고 달려들때 플랑은 다리의 불편함을 느꼈다. 바닥의 물기가 플랑의 다리를 타고 올라와 꽝꽝 얼어 있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상태에서 활활 타는 불꽃으로 내려찍힌다. 마루와 치르노는 당했던 걸 제대로 돌려주는데 성공했다. 두 쪽이 났던 불꽃이 화려한 재회와 동시에 폭발했다. 폭발도 지나가고, 연막도 걷히고. 익숙한 과정 후 문이 열려 있는 걸 본 플랑은 눈이 뒤집으며 달려나갔다.
또 당했다. 이 정도면 부처도 약오르지 않을까. 저긴 진짜 안되는데.
'이것들이 진짜아아아!'
이명을 억누르면서 급하게 눈을 부릅뜨고 찾아봤자 마루와 치르노는 없었다. 그냥 문만 열어둔 거였으니까. 격한 감정 때문에 플랑은 바로 뒤에서 다가오는 걸 모를 만큼 둔감해져 있었다. 손이 닿는 거리 내에서 치르노가 실력을 발휘하자 알록달록한 날개가 얼음 속에서 그 색이 일그러졌다. 플랑이 뒤돌아볼 새도 없이 마루가 온몸을 부딪쳤다.
뜨거운 충격과 통제할 수 없는 추락에서 오는 아찔함이 플랑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빙글 돌면서 난간을 넘자 저멀리 땅바닥이 보였다.
...
어림짐작으로 예상했던 넓이가 시각을 통해 확고해졌다. 문 너머의 공간은 초자연적이었다. 밖에서 본 저택의 크기와 내부의 넓이 사이에서 상식적인 혼란이 오기에 충분했다.
높디 높은 벽이 연상되는 저 거대한 것들은 다른 것도 아니고 책꽂이였다. 그리고 그 갯수 또한 공간의 크기에 걸맞는 수준이었다. 경이를 감상할 상황이 아니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바로 이곳, 플랑을 날려버린 대도서관의 내부 발코니는 대충 봐도 상당한 높이에 있으니 쿵 하는 소리가 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다. 문제는 그 사이에 뭐라도 해야 하는 판에 둘다 기력이 바닥나 버렸다. 찰박하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아 헐떡이던 치르노는 자기 이상으로 심각해 보이는 마루를 걱정했다. 불꽃을 터뜨리며 플랑을 화끈하게 날려버린 것도 그렇고, 깨어났을 때부터 그의 상태가 많이 이상해 보였다.
"괜찮아... 앗 뜨거뜨거!"
"으아아, 미안미안. 일단 멀리 떨어져 있어줘."
손을 댔다가 치르노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마루의 상태를 보고도 손댈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치르노의 담력은 비범한 수준이었다. 불타는 숯이라는 비유가 딱 걸맞았다. 마루가 불붙은 거야 이전과 같았지만 몸 곳곳엔 시뻘건 균열이 가 있고 결정적으로 엄청나게 뜨거웠다. 그 열기가 계속해서 머리를 압박하자 현기증과 구토감이 솟아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한테 불이 붙으면 이것보다 훨씬 끔찍한 꼴이 되어야 했지만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도, 작열통에 찬 비명도 없었다. 적당한 이유가 떠오르자 마루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마루가 원인으로 짚은 건 다름아닌 플랑이었다. 사람을 화끈하게 지지고 굽고, 그걸 또 죽기살기로 버티다 보면 이렇게 변하는 지도 모른다는 요상한 원리였다. 스스로도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왔지만 오늘 일은 사람 머리가 이상하게 만드는데 부족함이 없긴 했다.
"으우욱... 일어설 수 있겠어?"
"으으. 난 괜찮지만. 마루 네가 더 심해 보이는데?"
저러다 불타부서지는 거 아닐까 불안해 보이는 숯덩이는 잉걸불을 가다듬으며 구역질을 참았고, 녹다 만 얼음은 데인 손을 후후 불면서 간신히 일어났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소모적인 도망은 질렸다는 눈치를 보냈다. 길도 모른 채로 무작정 도망쳐봤자 소득도 없는 건 정말 그만하고 싶었다. 대신 뭘하고 싶은지는 둘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섭지 않을 수 없었지만 걱정과 고심으로 썩은 표정 대신 서로 피식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플랑을 보기좋게 날려버렸던 것처럼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초연한 얼굴이었다. 지치고 상처투성이였지만 초라하진 않았다. 낙담한 얼굴도 아니었다.
마루가 한껏 들이마시자 균열이 뻘겋게 빛났고 뜨거운 증기가 날숨으로 나왔다. 치르노의 몸 곳곳을 덮은 하얀 성에가 바닥까지 뻗어나가 뾰족뾰족 솟아올랐다. 수단이 어쨌건 당한 만큼 확실하게 돌려주겠다는 복수심이 온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리적인 온도와는 상관없이 머리와 가슴은 한껏 뜨거워져 있었다.
극단적인 온도차가 일으킨 와류가 주변 풍경을 흔들었다. 넓디 넓고 고요한 도서관에 어지러운 바람소리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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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전 끝! 약자의 반격 스타트!
굳굳굳굳굳굳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