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한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늘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말투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어느 누나가 TV에서 그랬다.
지난주에는 그 누나의 얘기를 믿었다가 햇볕이 참 화사한 날에 우산을 들고서 걸었지만, 오늘은 왠일인지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있고, 숨을 쉴 때마다 습한 공기가 가슴으로 들락거렸다. 분명히 예보라는 이름이 붙어있으니 맞는 게 당연한데 막상 맞으니까 기분이 묘하다.
악명높은 월요일 4교시, 그것도 국영수 같이 주류인 과목이 아니라, 비주류인 도덕시간,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지금 일어나있는 놈은 31명 중 나를 포함해서 10명이 될까말까다.
그나마도 10명 중 8명은 교과서가 아닌 책을 읽고 있거나, 아니면 책상 아래에서 휴대폰을 만지기 바빴다. 결과적으로 수업을 듣고 있는 녀석은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부반장, 나, 그리고 내 왼쪽 앞에 앉은 여자애 뿐이다.
나도 원래대로라면 조금 부족했을 수면시간을 채우려고 책상에 엎어져서 정신없이 잤을텐데, 자리를 바꿀 때 운이 나빴다. 지금이 여름인데도 복도의 서늘한 공기가 문을 비집고 자꾸만 들어오니, 자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잠들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운이 나쁘지는 않았다. 원래 내가 뽑은 표는 바로 내 앞자리니까. 하지만 갑자기 어느 여자애가 와서는 표를 바꿔달라고 조를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애의 표가 이 자리인 줄도 몰랐다.
하필이면 자리도 나쁜데다가 이 반에서 유일하게 짝 없이 앉게 됐고, 2주 뒤면 여름방학이 시작이니 그 사이에 자리를 바꿀 일도 없다.
그 때 나한테 왔을 때 바로 거절했다면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괜히 우유부단하게 넘겨버리니 이런 일이 생긴 거겠지, 다음부터는 꼼꼼히 확인하면서 살면 되겠지만, 솔직히 귀찮으니까 그냥 이대로 살아야겠다.
오늘의 수업 내용은 "인생의 행복", 돈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느니, 좋은 직장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얘기를 국가공무원인 선생님 입에서 듣고 있으니 참 기분이 묘해졌다. 제일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인간 입에서 직장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나온 거니까.
아마도 정말로 행복할 사람, 뭔가를 하는 것이 즐겁다고 느낀 사람에게는 저 얘기가 맞는 얘기겠지만, 나한테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뭘 하려고 해도 귀찮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고, 잠시 흥미가 생긴 일도 금방 질려버린다. 그나마 오랫동안 하고 있는 건 학생의 의무감이니 뭐니 하는 이유로 하고 있는 공부 뿐이고, 사실 공부에도 흥미를 잃은지 꽤 오래 됐다.
몸 쓰는 일이나 운동에는 옛날부터 조예가 없어서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그래도 그냥 귀찮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살아오니 딱히 취미도 없고, 목표도 없는 어중간한 놈이 됐다. 목표가 없는 녀석들은 나 말고도 이 반에 꽤 많지만, 취미까지 없는 녀석은 없다. 독서, 게임, TV, 음악, 어떤 것이든 나에겐 관계 없는 일이다.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도 아마 진심은 아니겠지, 다른 선생님들도 딱히 학생들한텐 관심이 없었지만, 도덕선생님은 그 정도가 특히나 더 심했다. 아마도 자기가 열심히 가르쳐봤자 학생들은 수업에 신경도 안 쓰니 저런 태도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TV에서 나오는 교육영상은 행복의 주관성에 관한 설명을 끝내고서 인생설계로 돌입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계획을 짜라, 그리고 그걸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놓아라, 그러면 언젠가는 그걸 성취할 수 있을 거라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런 걸로 성공이 된다면 자살하는 사람들이 나오지는 않았겠지, 저런 일은 노력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노력하는 모두가 성공으로 보답받는 건 아니다. 세상에는 실패해서 절망하는 사람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괜히 뭔가에 도전하는 리스크를 감당할 필요는 없다. 그냥 남들이 제일 많이 다니는 길로 다니면 충분하다. 그러면서 도전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가져오는 열매만 먹으면 된다. 내가 나무에 오를 필요는 없다.
날씨 탓일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우울하다. 공기는 습하고, 앞은 덥고, 뒤는 춥고, 마음은 우울하고, 그냥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다.
점심시간에 보건실에 가서 잠이라도 자버릴까, 그러려면 보건 선생님이 급식실로 가기 전에 미리 가서 누워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 일어나서 보건실로 가야하는데, 역시 귀찮다. 그냥 지금 자자.
교과서와 필통을 한쪽으로 몰아놓고서 시계를 쳐다봤다. 12시 30분 직전, 기껏 추운 걸 참아가면서 자려고 했더니, 수업이 곧 끝날 것 같다.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엘리제를 위하여가 흘러나오고, 책상에 엎드려 있던 애들이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나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딱히 아무 말없이 노트북과 교과서를 정리하셨다. 반장이 일어나서 인사를 했지만, 그것에도 눈길 하나 주지 않는 모습이었다.
내가 큰다면 아마 저런 어른이 되지 않을까, 아마도 선생이란 직업도 그냥 먹고 살기 좋아보인다는 이유로 선택했을 거고, 학교 생활에서 보람이나 즐거움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으면서 하루하루 사는 모습.
막상 생각해보니 저런 인간으로 큰다는 건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닐 것 같다. 하지만 결국 부정해봤자 바꿀 의지가 없으면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난 의지가 없으니 그냥 받아들이도록 하자.
선생님이 짐을 챙겨 교실에서 나가자, 평소에 늘 문제아로 말 많던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같이 축구 할 녀석들을 찾았다. 그 얘기에 잠이 덜 깨있던 녀석들이 갑자기 벌떡벌떡 일어나면서 손을 들었다. 모두들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짜증이 나서 식욕이 없어졌다. 급식을 신청하지 않아서 평소엔 매점에서 빵을 사먹었는데, 오늘은 그것도 갑자기 귀찮아졌다. 보건실로 내려가서 자기도 귀찮다. 그냥 잠이나 자자.
내가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는 사이에 애들은 모두 무리지어서 급식실로 향했다. 달려가는 녀석도 있었고, 조금 빠르게 걸어가는 애들도, 아니면 느긋하게 걸어가는 애들도 있었다. 아까 전만 해도 사람들로 가득 차있던 교실이 비어져갔다.
잠을 청하려고 책상에 엎드렸지만, 역시 등으로 바로 파고드는 이 한기는 어쩔 수가 없을 것 같다. 이불같은 게 없을까 생각하던 중, 사물함에 있을 체육복이 생각났다. 동계용 체육복이라면서 두께가 얇아서 겨울엔 도움이 안되는 놈이었지만, 지금이라면 감사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사물함으로 향했다. 교실 안에 있던 녀석들도 대부분 빠져나가고, 지금 남아있는 녀석들도 곧 나갈 것 같다. 잠을 방해받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푹 자고 1시간 뒤에 일어나야지.
사물함을 열고서 체육복을 꺼내서 교복 위에 입었다. 그 사이에 남아있던 녀석들이 급식실로 가면서 교실 문을 닫고 나갔다. 참 예의도 좋은 녀석들이다. 괜히 문을 닫으러 가는 수고는 덜어도 될 것 같다.
체육복의 지퍼를 올리고서 자리로 돌아가려고 뒤로 돌아서자, 내 뒤에 서있던 여자애가 깜짝 놀라면서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방금 전에 다 나간 줄 알았는데, 한 사람이 남아있던 모양이다. 근데 왜 내 뒤에 서있었지?
"무슨 일이야?"
내가 물어보자, 갑자기 또 깜짝 놀라면서 자리에서 살짝 뛰어오른다. 내가 뭘 잘못했나? 대체 왜 이래?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줘."
여자애는 나한테 그렇게 얘기하고서는 나한테서 뒤돌아선 뒤에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뭐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거나, 가끔씩 볼을 가볍게 치기도 하고, 배를 움켜쥐기도 했다.
대체 뭐하자는 걸까, 빨리 자고 싶으니까 별 일 아니면 그냥 나중에 해달라고 얘기해야겠다.
내가 막 나중에 해달라고 얘기를 꺼내려던 순간, 여자애가 다시 나를 향해 뒤돌아보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살짝 이마를 찡그리고 뭔가 힘을 주고 있는 그 모습에서 묘한 위협같은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좋았어, 이제 뭔지 모르지만 일단 대충 얘기에 대충 맞장구나 쳐주고서 잠이나 자야지.
여자애가 숨을 들이쉬고, 그 작은 입을 뻐끔거리더니,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서 나에게 건내며 크게 소리쳤다.
"나랑 사귀자!"
창 밖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내 손에는 지금 한 편지가 쥐어져있다.
얘기할 것도 없다. 점심시간의 그 편지다.
그 여자애는 나한테 편지를 건넨 뒤, 갑자기 편지를 놓치고서 교실 밖으로 달려서 도망쳤다. 복도로 나가서 좌우를 살펴봤지만, 워낙 순식간에 사라져서 어디로 갔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 뒤에 편지를 집어들고서 자리로 돌아와 잠을 청해보려 했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체육복이 너무 얇았던 것 같다. 괜히 심장이 빨리 뛰거나 하는 느낌도 들지만 분명히 체육복이 얇아서 이런 거겠지.
결국에는 자기로 결심해놓고서 자지도 못하고, 결국에는 급식을 먹고 돌아온 애들 때문에 다시 잠들기에도 무리가 있는 상황이다. 너무 시끄러워서 잠이 오질 않는다.
대체 아까 그건 뭐였지? 솔직하게 말하면 그건 내가 자면서 본 꿈이고, 지금 당장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서 꿈에서 깨면 점심시간 종이 다시 치고, 점심을 사러 매점으로 갈 거다. 그래, 이건 꿈이야.
근데 왜 이렇게 편지 질감이 사실적일까, 심지어 손으로 만질 때 느낌도 참 사실적이다.
어차피 편지 내용은 이미 짐작이 간다. 심지어는 편지봉투를 봉한 스티거도 하트 모양이다. 이정도로 노골적이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거다.
젠장,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난 그냥 자려고 한 것 밖에 없는데, 왜 이런….
우선 편지는 나중에 읽자. 지금 편지까지 읽어버리면 진짜로 미쳐버릴 거다.
그나저나 나한테 고백이라니, 솔직하게 말하면 의외였다. 혹시라도 이런 식으로 뭔가 귀찮은 일이 생길까봐 늘 반 애들이랑 거리를 어느정도 유지하고 생활했고, 특히나 남들 앞에 나서는 일은 늘 피해왔는데, 대체 뭘 잘못했다고 이런 식으로 날 괴롭히지?
아 그래, 이건 사실 벌칙게임 같은 걸지도 모른다. 가위바위보라던가, 아니면 제비뽑기에서 잘못 걸려서 나한테 고백하거나 그런 거겠지. 그래, 난 분명히 그런 상황에 처한 거야. 여기서 당황해봤자 이 일을 기획한 녀석들한테 놀아나는 꼴 밖에 안된다. 침착하자.
----------------------------------------
아직 여기까지밖에 못 썼네요.
사실 자려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스토리가 퍼뜩 생각나서 퇴고도 없이 올려봤습니다.
나중에 만화 스토리로 해서 어디 단편 공모전 같은 곳에 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이야기입니다.
근데 생각해보니 시나리오라 해놓고서 소설을 쓰고 가네요, 그것도 미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