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이 세계최강입니다. 그래서 연애생활도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하는 지경입니다. 간단하게 두 가지 시나리오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세계멸망시나리오 1 ‘내가 죽는다.’
“자기가 없는 세상이 있어봤자 뭐해.”
세계가 멸망할 위기에도 나서지 않는다. 혹은 직접 세계를 멸망시킨다.
세계가 멸망한다.
세계멸망시나리오 2 ‘내가 바람을 피운다.’
“자기를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내가 죽는다.
시나리오 1로 이어짐.
하. 하. 하.
농담 같지만 농담이 아니라서 제대로 웃을 수가 없네요.
하지만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일 뿐. 죽은 생각은 당연히 없을뿐더러. 바람피울 생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제 연인은 세계최강일 뿐만 아니라.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걸요.
왜요.
뭐요.
왜요.
오그라들어서 뭐 어쩌라고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뭐가 문젠데요.
……지금 조금 신경이 날카로워진 걸 이해해주세요.
“미안, 자기야. 저녁 약속 못 지킬 거 같아.”
반 년 전부터 준비했던 저녁 약속이 파투났습니다. 반년 전에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라 다시 그 식당에 가려면 다시 반년을 기다려야합니다.
“나 갑자기 추가 업무가 생겨서…….”
연인의 업무란 세계멸망을 막는 겁니다. 추가 업무가 생겼다는 건 새로운 세계멸망의 위기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진짜 미안해.”
폰에서 연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디지털에서 다시 아날로그로. 무미건조한 변화의 과정을 거치지만 그것이 목소리 속에 담긴 감정을 훼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연인은 약속이 파투난 것 때문에 저에게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저녁약속 따위는 세계멸망과 비교했을 때 시시할 뿐인데.
“자기도 많이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미안해.”
현재진행형으로 인류 수 억 명을 수 백 차례 구한 영웅이 저 한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독점욕에서 유발 된 비뚤어진 만족감이 생깁니다. 제가 여기서 그런 건 나중에 하고 저녁 먹으러 가자고 말을 하면 연인은 한참을 고민한 후에 저에게 오겠지요. 하지만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서로의 일 때문에 미안해하지 않기.’우리 처음 사귈 때부터 그렇게 약속했죠?”
“……응.”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세요.
“그치만……”
이대론 평행선을 달리겠네요. 이럴 때는 비장의 수를 써야합니다.
“사랑해요.”
“…….”
짧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립니다.
“사랑해요.”
“나, 나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연인이 얼굴을 붉히고 폰에 속삭이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인류최강이 귀여움도 최강이니 버틸 수가 없네요.
“사랑해요.”
“응. 사랑해.”
저는 폰에 대고 강하게 입으로 쪽 소리를 냅니다. 조금 늦게 폰에서도 쪽 소리가 납니다. 연인이 뜨거운 얼굴을 부여잡고 쑥스러워 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정말 보고 싶네요.
“무사히 일 끝내고 돌아오세요.”
“응.”
“힘내세요.”
“응.”
“사랑해요.”
“사랑해.”
한참 이렇게 말을 주고받다가 간신히 전화를 끊습니다.
“하아.”
한숨이 나옵니다. 연인이 세계최강이니 이런 일이 빈번합니다. 100일 기념일일 때도, 1주년 기념일일 때도 이랬습니다. 공적인 이유 때문에 사적인 영역이 침해받습니다.
“하아.”
다시 한숨.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세계최강인걸요. 인류의 수호자인걸요. 무시했다간 세계가 멸망해버릴 수도 있는걸요. 사귀기 시작했을 때부터 각오했던 것인 걸요.
“하아.”
역시나 한숨. 각오하기는 했지만 가끔씩 우울해지네요.
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달이 떠있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더 멀리. 달보다 훨씬 먼 곳을 보았습니다.
그곳에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하늘을 가득 채웠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그건 수평선 너머까지 뻗어있습니다. 그것을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네요. 일단은 지구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월등하게 지구보다 커 보이니까요.
저는 저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 알 수 있습니다. 연인은 저기에 있다는 걸. 저것 때문에 제 연인이 저녁약속을 파투 냈다는 걸요.
“…….”
우울해하는 건 이정도로만 해야죠. 우울해 해봤자 뭔가가 바뀌는 건 없잖아요.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봐야죠. 식당에 가서 포장을 해달라고 해야 할까요. 환불도 안 되는 곳이니까요. 그런데 포장을 해주는 데는 아니던데. 혼자라도 먹을까요. 아니면 급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예약했던 것을 팔아야할까요. 으응. 고민되네요. 예약시간까지 30분밖에 안 남았는데.
“안녕.”
생각에 빠져있는 저에게 누군가가 인사를 건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바라봅니다.
야성미 넘치는 미녀네요. 마구 자란 머리가 마구 뻗쳐있는데도 일부러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입고 있는 옷도 편한데로 주워 입어서 딱히 코디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더군다나 미소조차도 그에 어울리게 먹이를 발견한 포식자의 미소네요. 무서워라.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저는 만남의 인사와 작별의 인사를 연달아 한 후 몸을 돌리고 그 사람과 멀어집니다.
“어딜 도망가?
큰일 났네요. 잡혔어요.
“그렇게 노골적으로 피하면 나 상처 입는다.”
그렇게 말하며 저를 돌려세웁니다. 이 아가씨가 방금 ‘상처 입는다.’라고 말했잖아요. 그런데 그게 상처 입은 맹수라는 말로 자동으로 완성되어버리네요. 무서워요.
“딱히 피한 건 아니에요.”
“거짓말하면 혼난다.”
무서워라. 어떻게 혼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습니다.
“거짓말해서 죄송합니다.”
그래서 자백하고 사과했습니다.
“그래, 그래. 착하네. 난 착한 아이가 좋더라.”
아이라는 말을 듣기에는 나이가 좀 많지만요.
“착한 아이를 괴롭히면 즐겁거든.”
누가 저 좀 구해줘요. 저 가학적인 미소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듭니다. 맹수에게 산채로 잡아먹혀도 지금보단 덜 무섭겠네요.
“나는 왜 피했어?”
“솔직하게 말씀드려요? 아니면 거짓말해드려요?”
“솔직한 거짓말.”
“무리네요.”
제 말에 그녀는 깔깔 웃습니다. 일단 외형만 보자면 털털하고 야성미 넘치는 미녀입니다만 외형만 보지마세요.
세계최강 언랭커 1위인 폰로네 양입니다. 언랭커 1위라는 말이 모순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어쩔 수 없어요. 여기서 말하는 언랭커라는 건 자연인이라는 뜻이니까요. 막대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인류를 위해 싸우지 않고, 자기가 살고 싶은 데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가끔씩 세계멸망을 시도하기도 하는 그런 부류입니다. 물론 가끔씩 변덕으로 세계멸망을 막기도 하고요. 색깔로 따지자면 한 없이 블랙에 가까운 그레이입니다.
폰로네 씨가 얼마나 강하냐면요. 세계멸망을 획책해서 제 연인이랑 스물여덟 번이나 싸웠는데 아직까지 멀쩡히 잘 살아있어요. 세계최강이랑 그렇게 싸웠는데도 멀쩡하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할 수 있잖아요.
“으흥. 그런데 우리 아가는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을까?”
댁을 만났으니까요.
“반년 전부터 약속했던 저녁약속이 갑자기 파투나서 그런걸까?”
“……처음부터 듣고 있었나요?”
폰로네 양은 씨익 웃더니 제 호주머니에서 폰을 꺼내고 제가 통화하면서 했던 말과 행동을 반복합니다. 할 때는 안 부끄러웠는데 삼자가 따라하는 모습을 보니 부끄러워졌습니다.
제가 부끄러움으로 거의 울 지경이 되었을 즘에야 폰로네 양은 절 따라하는 것을 멈춥니다.
“그거 내가 대신 가 줄 수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요. 이 아가씨는. 아니. 알고 있지만. 그래도 좀.
“무슨 말인가요?”
그래서 모르는 척 묻습니다.
“내가 대신 너랑 같이 저녁 먹어 줄 수 있다고.”
“거절하면요?”
“죽는다.”
“도망가면요?”
“죽는다.”
“애원하면요?”
“계속 이런 식으로 시간 끌면 죽여버린다.”
저 이 사람 싫어요. 미녀라도 싫어요.
하지만 저의 감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겠죠. 폰로네 양은 양 가슴에 제 팔이 끼이도록 제 팔을 끌어안으며 저를 이끕니다.
“배고프다. 빨리 가자, 달링.”
전후사정을 모르는 제삼자가 본다면 이 아가씨가 제 연인이라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친근하게 구네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아가씨는 저의 연인이 아닙니다. 아니 연인은커녕……강간미수 열아홉 번, 살인미수 네 번, 납치는 쉰한 번, 납치 미수는 세 번. 제가 이 아가씨에게 당한 범죄 횟수입니다. 비교적 가벼운 성추행, 폭행, 갈취, 협박을 빼고도 이 정도네요.
“후후, 기대된다. 그지, 달링?”
누가 저 좀 구해주세요.
근처에있는 제3자들:미안해.. 너를 구하다간 우리가 ...죽을...지도...
아니 주인공한테 꿀을 발라놓았나요(ㅂㄷㅂ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