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타치바나 타키라고 합니다...!"
"저는 미야미즈...미츠, 미츠하에요"
사람은 한참동안 말 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 보았다. 생일도 아닌 날 큰 선물을 받은 것처럼, 오랫동안 마음 한 귀퉁이에 시리게 비어있었던 자리가 한 번에 채워지는 느낌은 숨을 못 쉴 정도로 격렬했고 겁이 나기도 했다.
"저기... 갑작스럽겠지만... 미야미즈 씨, 혹시 전에 만났던 적이 있던가요?"
"잘 모르겠네요... 만난 기억은 없는데... 그치만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상당히 깊게 알고 지냈던 것 같은"
타키는 매듭끈이 생각이 났다. 매듭끈을 준 사람이 누군지는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했지만 매듭끈을 볼 때면 항상 자신이 느끼는 상실감과 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타키는 허둥지둥 손목을 걷었다.
"이거!"
"아..! 이건 제가 고등학생때 쓰던 매듭끈인데...? 운석에 휩쓸려서 없어진 줄 알았는데 어째서 타치바나 씨가 가지고 계신거죠?"
"기억이 나지 않는 누군가가 저에게 준 거에요. 미야미즈 씨 물건이라면 미야미즈 씨가 주셨겠죠?"
"기억은 잘 안나지만 우린 만난 적이 있나봐요..."
타키는 가슴이 터질것만 같이 벅차올랐다. 숙제가 밀린 듯한 불안감도 깨끗히 씻겨 나갔다. 신기한 일이었다. 처음 본 미야미즈에겐 몹시 그리운 풍경을 만난 듯한 분위기가 맴돌았고 그것 때문에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눈물이 고일 지경이었다.
"여기, 여기서 이러고 있긴 좀 그러니까 어디 카페라도 가서..."
미츠하는 떨리는 한편으로 두려웠다. 조금이나마 평온을 되찾은 자신의 일상이 끊임 없이 찾던 누군가를 만난 행운으로 다시 흔들리고 부서질 것만 같았다.
"커피... 카페라떼면 괜찮으신가요?"
타키가 물었다
"아, 아뇨 저 커피는 좀"
"아 커피 싫어하시나요? 그럼 자리 옮길까요?"
"아니에요 그건 아닌데 음... 카페인을 좀 피해야 할 것 같아서요..."
"예?"
"제가 임신 중이라서..."
타키는 숨이 탁 막혔다.
"역 역... 역시 자리를 옮... 옮겨야, 옮기는게 저기 옮, 옮겨야겠죠? 임사.. 임산부한테 카페인은 먹으면 먹, 먹게되면 안 좋은 거구나..."
"죄송해요 타치바나씨 한 잔 정도는 괜찮은데 제가 벌써 아침에 마셔서요..."
"그 저 아는 전통 찻집이 있는데... 저기 녹차나 말차에도 카페인이 있는걸로 아는데 아... 어떡 어떡할까 아..."
애써 참고 있지만 내장 한구석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느낌이었다. 타키는 의자 손잡이를 꽉 잡고 떨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이 여자가 뭐라고, 기억에도 없는 사람인데 오늘 처음 만난거나 마찬가지인 사람인데 어째서 내가 이 여자의 임신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놀라고 있는걸까? 평소의 타키 같지 않은 행동이라고 타키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괜찮아요 안마셔도..."
미츠하는 애써 웃음지었다. 사회에서 익힌 진열대 같은 미소. 이럴때는 참 유용했다. 알수 없는 불안감과 혼란을 느낀 미츠하는 무의식 적으로 배를 한번 쓰다듬었다.
"네 아 그... 여기 디카페인도 있는데 저... 디카페인도 카페인이 조금 있다죠... 그러니까.. 역시 과일, 과일음료로 할게요!!"
타키는 자리를 박차듯 일어났다. 과장되게 웃으며 주문을 했다. 관자놀이엔 식은 땀이 베어 나왔다.
"고맙습니다 타치바나 씨 잘 마실게요"
"아니에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카페로 가자고 했네요... 임신이라면 결혼... 하셨나요?"
"아뇨, 결혼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 아이에요"
타키의 머릿속에는 미혼모가 주연인 소설이며 영화가 계속 떠올랐다. 아무런 사이도 아닌 여자를 이렇게까지 원하는 자기자신이 이해 불능이라고 생각했다. 미츠하는 눈물이 핑 돌았다. 타키의 등장과 동시에 자신의 가슴에 빈 곳이 꽉 채워져 버렸지만,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자신이 오랜시간 고통과 수고를 들여 쌓아 올렸던 자신의 가치가 튕겨져서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짧지 않은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타키에게는 갑자기 이토모리 마을에 빠져있었던 기억이 있었지만 이미 그때는 미츠하가 마을을 떠난 뒤였다. 커피는 머그컵 바닥에 말라 붙었고 두사람의 대화는 점점 끊어지는 시간이 많아지다가 이윽고 정적을 맞았다. 가슴이 울렁거렸지만 아무런 접점이 없이 살았던 둘에겐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미 사회에 길들여진 그들이 어린아이처럼 아무이야기나 생각없이 캐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타키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아, 타치바나씨 아까부터 울렸던 것 같은데 받으셔야 하는게 아닐까요?"
"아뇨, 아... 저기.... 받아야겠네요 잠시만요"
카페 문 손잡이를 잡으며 전화를 받은 타키의 목소리를 통해 애인에게 걸려온 전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츠하는 차라리 후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키의 애인은 자신의 삶에 갑자기 뛰쳐들어오려는 타키를 다시 끌고 나갈 고리 같은 것이라고. 그러는 한편 아릿하게 가슴이 아파왔다. 미츠하는 다시 배를 감싸안았다.
"미안해 자기야 아니 음... 친구를 만나서... 츠카사는 아니고... 자기는 모르는 친구야. 응 응 알았어 지금? 음 갈게 아니야 안바빠 바로 갈게"
"저기 타치바나 씨..."
"죄송합니다 미야미즈 씨 아 제가... 지금..."
타키의 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네, 바쁘시죠? 죄송해 하실 것 없어요 저도 들어가봐야해서요. 외근 나온거라서요."
"아 네... 그러시구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연락처를 남길까?
"네 타치바나씨 갑자기 마실 것 대접받아서 죄송스럽네요"
연락처를 남길까?
"아니요 제가 막 이상한 사람처럼 굴었는데도 안놀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면접용 미소와 영업용 미소가 교차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연락처를 남길까? 타키의 마음속엔 여자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자기를 찾아온, 자신을 한 몸 바쳐 사랑해준, 자신의 변덕을 전부 이해해준, 자신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던 여자. 타키는 늘 여자친구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했다.
"네 타치바나씨 즐거웠어요 그럼 저도 가볼게요!"
미츠하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위태하게 쌓아올린 자신의 삶이 전부 무너지는 것만 같은 큰 흔들림. 그러나 미츠하는 많은 곡절을 겪었고 청년기를 지나 완전히 성인으로 가는 문턱에 서 있었기에 버리는 것에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미련을 가지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생각-
"저기...! 미츠하... 아니 미야미즈 씨!! 잠시만요!"
미츠하가 뒤를 돌아보자 타키의 가슴이 철렁했다. 어쩌자고 불렀을까. 주머니에선 휴대폰의 진동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네 타치바나 씨?"
"제, 제가요 어... 이토, 이토모리에 대한 그런 프로젝트나 그 그림을..."
"네?"
"이 이토모리를 그리는 프로젝트를 예전부터 예전부터 하고 있었는데요! 이게 그 예술작업 그런... 그런건데! 이토모리 출신분의 그 증언이 필요해서..."
"아 도움이 필요하신건가요?"
여기서 끊어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어른이 못되었구나, 그렇게나 오래 흔들렸으면서도. 미츠하는 생각했다.
"네... 그래주시면... 고마울 것 같아서..."
타키는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휴대폰의 진동이 끊기고 다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사람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는구나.
"네 여기 연락처가... 명함 드릴게요!"
"네 저도 명함..."
두사람은 명함을 교환하고 간단한 목례를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헤어졌다. 한참을 걷고 나서 미츠하는 진정되지 않는 마음에 안절부절 못하다가 자판기에서 아무 음료나 뽑아 들고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휴대폰을 껐다 켰다 하다가 사야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야찡 지금... 바빠?"
"아니 별로? 근데 너 목소리가 왜그래? 이시간에 왜 전화했어? 무슨일 있어?"
"아니 그냥... 그냥 오늘 발표를 했더니 목이 쉬었나봐"
"무리하지마! 홀몸도 아닌데 내가 조심하라고 했잖아!"
"있잖아 사야찡 지금 볼 수 있어?"
"응? 지금? 나야 언제든지?"
"어... 저번에 왜 예식장 고르는 거 봐달라고 했었잖아... 그거 음... 지금 하려구"
"아아아! 고마워! 카탈로그가 좀 많은데 우리집으로 올래? 나 엄청 맛있는 쨈을 샀는데 마침 와플기계도 들여왔고!"
"응... 금방 갈게 금방..."
타키는 여자친구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죄책감이 타키의 가슴을 아프게 짓눌렀다. 가슴이 떨리고 어깨가 시렸다. 불안감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자신을 아껴준 사람을 볼 면목이 없었다. 미츠하는 임신했다... 배가 뻐근하게 아파왔다. 타키는 늘 불안할때마다 배가 뻐근하고 구역질이 났다. 그렇게 불안할 때 찾아가 기댈 사람은 오직 하나, 여자친구 뿐이었다.
타키의 발은 늘 가던 익숙한 길을 따라 후들후들 걸었다. 여자친구의 자취방으로 가는 길. 때가 타고 군데군데 파인 낡은 철문은 죄스럽게도 익숙했다. 타키는 왜 전화를 안받았냐는 여자친구의 말에 얼버무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여자친구를 끌어안았다. 여자친구 역시 자주 있는 일이라 그런지 더 물어보지 않고 타키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부드럽게 타키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도둑질을 한 사람처럼 타키는 죄책감과 불안함에 숨이 막혔다.
양복 외투를 벗고 휴대폰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아래쪽으로 해서 의자에 올렸다. 그 위에 가방을 올리고 와이셔츠를 벗어 올리고 그리고 또 바지를... 마치 피가 묻은 흉기를 파묻는 사람처럼 타키는 휴대폰 위에 옷가지를 쌓아올렸다. 그리곤 여자친구를 안았다. 여자친구의 살결도 촉감도 냄새도 숨소리도 모든 것이 너무나도 익숙한 그대로 였다. 그것이 타키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여자친구와 살이 맞닿을때마다 여자친구와 함께한 3년이라는 시간이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타키는 여자친구의 몸을 구석구석 기억하고 있었다. 살의 굴곡 하나하나에 자신이 여자친구를 대했던 기억이 맺혀있었다. 그러나 여자친구를 안고 있는 동안 머리에선 계속 미츠하의 얼굴과 임신 사실이, 그리고 자신이 미츠하를 만나고 대화했던 두어시간동안 느꼈던 뜨거운 감동들이 맴돌았다. 타키는 자괴감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관자놀이와 이마에서 땀이 후두둑 떨어졌다.
"사랑해"
여자친구가 말했다.
"사랑해 타키"
사랑한다는 말이 말뚝이 되어 타키의 심장에 박히는 듯. 타키는 괴로웠다.
"정말 사랑해 타키 너무 좋아해"
자기 자신이 이렇게까지 추잡하게 느껴진적은 없었다. 스스로가 밉고 원망스럽고 더러워보이자 타키의 온몸에 공포감이 엄습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대로 버려지면 타키라는 미천한 인간은 세상에 다시 두발로 설 기회를 얻지 못할 것만 같은.
타키는 여자친구를 숨막힐정도로 끌어안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사랑한다고 말했다. 버려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또 다시 거짓말. 스스로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인간이라고 타키는 생각했다. 다시는 타치바나 타키로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타키는 그렇게 하루종일 과장되게 좋은 애인으로 여자친구 옆에 붙어있었다. 여자친구는 타키의 작은 행동에도 크게 기뻐하고 웃어주었다. 여자친구의 웃음을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여자친구가 웃을 때마다, 미츠하가 떠오를 때마다 타키의 심장엔 계속해서 못이 박혔다. 그리고 그 박힌 곳에서 피가 흘러나와 흉곽을 따라 줄줄 흐르는 느낌이 아릿하게 뱃속과 숨을 따라 전해졌다. 분명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라고, 타키는 확신 할 수 있었다.
너의 이름은
-끝-
어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