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가 멀쩡한 게 없네... 전부 불이 붙거나 기울거나 하다니...”
“이틀 전의 해일이 역대 급으로 강해서 걱정되긴 했는데, 설마 이 정도 일 줄은...”
“거 두 사람 다 말 할 시간에 정비나 빨리 끝내, 언제 녀석이 들이닥칠지 모른다고.”
일주일 전만 해도 명물인 등대들을 보기 위해 관광객이 몰려들었던 탄지아 제 1항만과 얼마 안 떨어진 해안. 한때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던 해안은 이제 일주일 전의 그 백사장이 깔려있던 아름다운 모습은 잃은 채, 먼 바다에서 떠밀려왔을 것임이 분명한 겨우 형상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처참하게 부서진 채 삐걱거리고 있는 격룡선 두 척과 그 파편들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풍기고 있었다.
“얼마나 급했으면 퇴역 직전의 구형함까지 꺼내 온 거지...”
“그나마 격룡창 하나와 발리스타랑 대포 몇 문은 쓸 만한데... 놈에게 통할지 모르겠습니다.”
“후, 그 강력한 탄지아 원양 함대를 모조리 수장시킨 놈인데 통할 리가 없겠지.”
‘쏴아아아아...’
해안으로 잔잔하게 몰려와 부서지는 작은 파도가 내는 소리를 뒤로하고 처참하기 짝이 없게 나뒹굴고 있는 격룡선을 올려다보며 나누는 카를과 리엘의 대화에는 깊은 시름이 어려 있었다.
이틀 전, 지진이 시작된 이래 가장 강력한 해일이 엄청난 속도로 밀려들어오면서 순식간에 해일에 피해를 그나마 덜 입은 편이었던 제 1항만을 초토화시키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빠른 속도로 물이 빠졌었다. 순식간에 닥쳐온 일이라 사망자는 적고, 실종자들은 많았다. 미처 피하지 못한 이들을 구호하고 피난시키는 일을 시작했던 사냥꾼들 일부도 그 파도에 제때 피하지 못하고 실종되는 등 피해는 첫 번째와 두 번째 해일에 못지않을 정도로 심각했다.
ㅡ7차는 고사하고 1차 방어선 구축도 이대로는 틀려먹었군,
그 비보를 듣자마자 카를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방위 작전의 골자였던, 피난 작업을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 한 후 구축해야할 방어선들을 아예 기대할 수 없을 거란 절망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그 상황에서 드러내는 순간 공포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리란 건 확실했기에,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에도 마음속에 품은 채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 지형이 입구가 좁은 만에 가까운데... 정말 그 용이 여기로 오고 있는 게 맞아?”
“아까 우리를 내려주고 추락한 그 관측선에서 확인한 거니까 확실해. 용은 여기로 향하고 있어.”
“정말로 이곳으로 오는 게 맞나 보구나... 정말로...”
카를 대신 답하는 저맘의 말 역시 깊은 시름이 어려 있었고, 그 말을 들은 벨라 역시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어두운 투로 중얼거렸다.
이틀 전의 해일로 쑥대밭이 된 항만에 있던 길드 건물에서 마지막으로 길드 마스터에게서 필요한 물품들을 인계받고 해안으로 마지막 남은 관측선을 통해 이동하던 이들을 먼저 반긴 것은 또 다른 해일이 아니었다. 전보다 수가 부쩍 늘어난 아이루 크기의 운석들이 하늘 곳곳에 궤적을 그리며 급히 해안으로 향하던 관측선을 뒤흔들었던 것이다.
“타이밍이 아슬아슬했지, 그때 거기서 안 뛰어 내렸으면 아마 박살이 나서 죽었을 거야.”
“아마 그게 탄지아 서사대의 마지막 관측선이었을 텐데... 이 일이 끝난 다해도 후유증이 꽤 클 것 같습니다.”
결국 카를 일행은 그 위기촉발의 상황 속에서, 비행선이 운석에 격추당하기 전에 준비한 물건들을 아래로 던진 후, 일반인들이 엄두도 못 낼 높이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그리고 그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직감한 것은 겨우 몸을 추슬러 일으킨 순간 운석에 직격당하여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절벽 너머로 이리저리 뒤틀리며 추락하는 관측선을 봤을 때였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면 모두가 개죽음을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다들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뭔가 되게 신경 쓰이는데...”
“아까부터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
“아니, 뭔가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거 같아서...”
그런 상황 속에서 여전히 무언가 찝찝한 느낌에 인상을 쓰고 곰곰이 머리를 굴리고 있는 저맘을 보며 벨라는 머리 위에 물음표를 한껏 띄운 채 물었다. 그런 두 여성의 모습을 뒤로하고 카를과 리엘은 폐허가 되어버린 격룡선 안으로 들어갔다.
“맞다, 형님 혹시 불씨 가지고 계십니까.”
“엉? 아마 예비용 물품 중에 하나 있을 거 같긴 한데, 왜 어디다 쓰게?”
완파한 격룡선에 남아있는 물건들을 점검하던 도중, 무언가 퍼뜩 떠오른 듯 묻는 카를의 말에 리엘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그 돌아온 질문에 카를은 벨트의 주머니에 넣어뒀던, 임시로 코르크 마개로 그 끝을 막아둔 작은 유리병을 꺼내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밀봉해야 하는데 왁스는 있는데 불이 없어서 말이죠.”
“그거 이제야 다 쓴 거냐? 너답지 않게 느린데.”
“뭘 써야 할지 감도 안 잡혀서 좀 늦게 완성했어요.”
병 안에 들어있는, 돌돌 말린 종이를 보자 대번에 무엇을 담아둔 건지 간파한 리엘은 의외라는 투로 말했지만, 뒤이어 온 씁쓸한 카를의 반응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약간이라도 위험부담이 있는 의뢰에 가기 전에 항상 사냥꾼들에게 어느 정도 그 작성을 필수적으로 법제화해뒀을 정도인 마지막 글귀. 카를은 여태껏 그 어떤 수렵에 나갈 때에도, 심지어 대해룡을 격퇴하기 위해 심해로 내려가야 할 때도 그 글을 쓴 적이 없었다.
그런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질 정도로 오래 고민하며 신중을 기하여 쓴 후 그것을 담은 병을 이제야 밀봉할 수 있게 불씨를 달라는 모습을 보자, 그의 자신감과 실력을 잘 아는 리엘은 착잡한 심정이 들었다.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았다.
“음 뭐, 그 사이즈 정도면 뭐 굳이 불씨를 꺼낼 필요가 없겠네, 밀봉시켜 줄 테니 줘봐.”
“넵,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없이 잠시 서있던 리엘은 이내 다시 마음을 다잡고 부싯돌을 꺼내어 바로 눈앞에 꺾여 튀어나와있던 갑판의 조각을 떼어내 바위 위에 올린 후 카를에게 병과 왁스를 달라고 손짓했다. 그 모습에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한 후 손가락만한 크기의, 관측선에서 전문 밀봉용으로 쓰는 것을 가져왔을 것임이 분명한 왁스 조각과 말려있는 종이가 들어있는 병을 건네준 후 카를은 시선을 돌리려다가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알았다.
-끼기기긱...
“...잘 못 들은 건가?”
“자, 밀봉 끝났다. 금방 끝나지.”
“아, 예. 맞다, 지금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아요?”
“뭔가 비틀리는 소리가 나긴 한다만...”
순식간에 밀봉이 끝난 리엘이 뒤에서 어깨를 툭툭 쳐서 건네주자, 다시 주머니에 넣어 굳게 닫던 중 던진 카를의 질문에 리엘은 역시 뭔가 석연치 않은 듯 찌푸린 표정으로 답했다.
“긴장에 피로도 쌓였으니 잘못 들은 걸 수도 있겠지.”
“그럴까요, 역시 잘못 들은 건가?”
마치 잘 돌아가던 태엽들을 강제로 서로 비틀어버리면서 나는 것만 같은 기이한 소리. 괴이하기 짝이 없는 그 소리는 처음에는 환청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그들에게 가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두 남자가 그렇게 스스로의 청력에 의구심을 품는 사이, 배의 밖에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던 저맘은 자신이 품고 있던 문제를 조심스레 벨라에게 말했다.
“으음... 벨라, 연흑룡의 관측기록 중에 바다가 끓어올랐다는 게 있는 거 알지?”
“응, 그거 때문에 함대가 다 수장된 거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게 왜?”
모두에게 공개된, 당연히 알고 있는 정보. 고룡 관측선들과 등대가 침몰하기 직전에 보내온 정보들에 명시된 그 상식을 벗어난 용의 행보를 언급하자 벨라는 더욱 저맘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좀처럼 짐작을 하지 못했다.
“만약 그 바다를 끓어오르게 한 정체불명의 열선이 일정한 시간을 두고 확장되고 있는 거 같은 걸 놓친 거 같으면... 넌 어떻게 할 거야?”
“그런 걸 놓쳤다면 당연히 방어 계획을 수정해야... 어, 설마....”
“아무래도... 그 용의 열선이 꾸준히 범위를 넓혀가는 것 같아.”
“세상에...”
그 말에 그제야 자신들이 놓쳤던 것을 깨달으며 얼굴이 사색이 되어가는 벨라였지만, 뒤이어 저맘이 하는 말에 안색이 더욱 새파랗게 변해갔다.
“봐, 처음 목격되었을 당시 바다가 끓어오르는 범위는 반경 0.5해리에 지나지 않았어. 하지만 두 번째 관측선이 보낸 기록에서는 반경 10해리 가까이로 늘어났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룡 관측 등대에서 보냈을 때는 반경 80해리까지 늘어났지.”
“일주일 만에 그 정도면, 맙소사... 지각변동보다 그게 더 위험할지도... 어...?”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매우 불안한 목소리로 벨라가 말했다.
“잠시만, 그럼 우리도 위험한 거 아냐?”
“육지에 본격적으로 상륙하면 온도차이 때문에 잠깐이나마 냉각 되서 범위가 줄어들겠지만...”
길드를 떠날 때 가져온 작은 종이와 깃펜에 차근차근 확산되는 수치를 적어나갈수록 벨라는 점점 지금 해안으로 다가오고 있는 존재가 고룡이 아닌, 파괴의 화신으로 생각이 퍼져나갔다. 게다가 카를이 품은 무의미한 희망을 예리하게 짚었던 저맘이 이제 스스로 작은 희망을 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현실을 알게 되자 벨라는 순간 등허리를 타고 식은땀이 주룩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근거가 없어서 확신은 못 하겠지만, 바다가 끓어오를 정도면 아마...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 혐기성 생물들도 못 살아남겠지...”
“맙소사... 그러면 반드시 탄지아에서 막아야 한다는 거잖아...”
그 지독하게 가혹하기 없는 현실을 완전히 인지하며 고개를 떨어뜨리는 벨라를 보며 저맘은 마음이 아파왔다. 인간이 결코 상대할 수 없는 존재를 상대로 몰아넣어진 것은 자신도 별 다를 바 없었지만, 그녀가 그 누구보다 아끼는 이가 엄청난 절망에 사로잡히는 것을 보는 것은 저맘에게 있어서는 더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꾸드드드득...’
그렇게 몇 분과도 같은 몇 초가 지났을 찰나, 기이한 소리가 들려오자 저맘은 바로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위와 돌멩이들이 본래의 위치에서 어긋나며 나는 기괴한 소리, 그리고 그 소리에 묻혀서 채 들리지 않는 엄청난 속도로 바닷물이 해안에서 빠지는 것을 보며 순간 그녀는 얼어붙어 버렸다.
ㅡ지진이 온다...!
그녀와 같은 것을 직감했음이 분명한 벨라와 잠시 눈이 마주친 후, 두 사람은 급히 뛰기 시작했다. 대지의 황혼의 상륙을 앞에 두며 대지가 내는 거대한 비명이 들이 닥치기 까지 채 몇 초도 남지 않았다.
-
‘꾸드드드득...’
“또 저 소리가...”
“배가 무너지려는 건가?”
다시금 귀를 울리는 기괴한 소리에 카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저히 잘못들은 것이라곤 상상하기 힘든 목재가 뒤틀리는 그 소리에 리엘은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걸 인지한 순간 다급히 장비와 짐 꾸러미를 챙기고 격룡선 안으로 달려오며 외치는 벨라와 저맘의 말에 스스로에 대한 그 이질감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얼른 배 안으로! 어떻게든 잡고 버틸 만한 거 있으면 들어가서 잡아요!”
“무슨 일이 있나? 왜 그리 급해?”
“지진이야! 엄청 큰 지진! 지금 물건들이 어긋나고 있는 건 그 전조라고!”
“전조? 그게 뭔...”
‘꾸드드득...’
‘쏴아아아아....’
사색이 된 채로 달려 들어오는 벨라의 말에 그제야 그 기괴한 소리의 정체를 안 것도 잠시, 나무가 휘는 소리와 함께 배의 갑판과 한때 배의 일부였던 조각들이 서로 어긋나듯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기 힘든 그 광경에 충격을 받을 틈도 없이 순식간에 바닷물이 빠른 속도로 후퇴하며 먼 바다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이번에 누구보다 빠르게 확인한 카를은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크게 외쳤다.
“해일이 오려한다, 전부 호흡기 물어!”
“해일까지... 맙소사, 이 장소에서 들이 닥치면 사지 멀쩡하기도 힘들 거 같은데...”
“아마 여기서 죽으면 시체 찾기도 힘들겠지... 정말로 개죽음이겠네...”
탄지아 길드에서 배급하는, 엄지손가락만 한 호흡기를 다급히 주머니에서 꺼내어 입에 물 준비를 하며 말하는 저맘의 말에 두려움이 커지다 못해 모든 것을 체념한 것만 같은 벨라의 중얼거림이 뒤따라 왔다.
“아냐, 적어도 내 앞에선 벨라는 죽을 일이 없을 거야.”
“어?”
‘철컥’
모든 것을 포기한 것만 같은, 벨라 성격에 전혀 맞지 않는 그 말에 답한 사람은 카를이 아니었다. 둔탁한 탄을 장전하며 평소와는 다른 강한 의지가 담긴 말을 한 그 사람은 벨라가 알던 그 사람 같지 않았다.
-쾅!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끄트머리부터 박히는 방패와, 대포 마냥 파편 사이에 걸쳐지는 5발의 탄환이 전부 장전된 총창은 마치 곧 닥쳐올 위험에 벨라를 보호하려는 작은 요새 같았다.
“이 악물고 호흡기 꽉 물고 뒤에 있어, 적어도 그러면 충격으로 갈 일은 없으니까.”
“설마 해일을 막으려고? 아무리 합금으로 제작한 방패라도 그건 불가능해, 인간의 힘으론 무리다!”
“파편만 빼고 다 막아버리면 그만이잖아요? 적어도 녀석이 올 때까진 살 수 있을 거고요.”
저맘이 무슨 생각으로 방어 태세를 갖췄는지 대번에 눈치 챈 리엘의 말이 곧장 뒤따라왔다. 지금 해안에 있는 사람 중 그 누구보다도 지식을 깊이 존중하는 그녀였기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일에 도전하려는 것처럼 하는 그 말은 리엘은 물론 카를까지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무리 네가 벨라를 소중히 생각한다 해도, 지금 하려는 그건 ■■ 행위야!”
“두 분이 왜 걱정하시는지 알겠지만, 이번만큼은 제 고집대로 하게 해주세요.”
그 여느 때보다 자세를 굳건히 갖춘 저맘의 말에는 언제나 느껴지던 괴짜다움은 한 톨도 보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의지가 서려있었다. 항상 조언을 해주며 가끔 뜬금없을 정도로 멀게 느껴지는 지방의 이야기를 해주던, 고집과 아집이라곤 전혀 없던 그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게 느껴지는 말에 카를은 멈칫했지만 벨라는 오빠의 그 말에 다른 당혹감을 느꼈다.
ㅡ설마 오빠는 전부 알고 있던 거야?
대지의 황혼이 드리우는 상황에서 들은 당혹스러운 그 말에 그녀는 깊게 체념에 빠져있던 머리가 일순간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과 저맘의 관계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그 말에 당황하여 입을 뻐끔거리려는 것도 잠시,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하는 벨라의 말에 다시금 현실로 돌아왔다.
“전부 잘 될 거예요, 그러니까 믿어 주세요.”
“젠장, 알겠으니 전부 꽉 붙잡고 있어!”
-까악, 까악, 까악!
항상 카를과 벨라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하며 입에 호흡기를 악무는 그 모습에 결국 리엘은 뭐라 대꾸해야 할지 마음을 접고 장전해둔 경석궁의 안전장치를 풀며 외쳤다. 그 말에 답이라도 하듯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새들이 무리지어 해안을 떠나며 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진이다...! 전부 제대로...”
‘쿠구구구구구....!’
날개달린 짐승들이 빠짐없이 해안의 절벽을 벗어난 지 몇 초되지 않아서 리엘의 외침을 묻어버리는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진동이 격렬히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지상을 무너트릴 듯이 뒤흔들며, 어쩌면 모든 것을 영원히 바꿀 황혼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그 진동은 탄지아 항구를 넘어 전 세계를 울리기 시작했다.
-
ㅡ까악, 까악, 까악!
ㅡ퀘에엑!
돈도르마.
슈레이드 대륙에 자리한, 고룡인 라오산룽이 지나가는 통행로에 자리한 대륙 최고의 방어를 자랑하는 도시. 고룡이 자신의 영역으로써 차지하기 위해 찾아오거나 종종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몬스터가 찾아오지 않는 이상 고요하기 짝이 없는 그 곳의 하늘에 엄청난 수의 새들과 인근 산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던 비룡들의 모습이 하늘을 가렸다.
“무슨 일인가?”
“그게, 엄청난 수의 새들과 비룡들이 이 지역을 떠나고 있습니다.”
“떠나고 있다? 최근 들어 용이 감지된 적은 없는 거 같은데, 쉔가오렌인가?”
“쉔가오렌의 목격 정보는 없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마치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그곳을 떠나는 날짐승들의 모습에 돈도르마 제1 고룡 관측선 안은 당혹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여있었다. 근래 고룡의 전조는커녕 그 어떤 재난의 전조도 보이지 않는데다 대형 몬스터가 스쳐지나가려하는 모습도 관측되지 않았기에 이토록 짐승들이 부리나케 날아 도망치는 현상의 원인을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쿠르르릉....!’
“용의 소리인가?”
“아냐, 용은 이런 소리를 못 내내. 이건...”
그리고 그 순간, 미나가르데 지방을 가로질러 요새 도시로 쭉 이어지는 거대한 용의 통행로 밑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맙소사... 이건 지진이야...! 저걸 감지하고 짐승들이 도망친 거였어!”
“꽉 잡으세요! 대기가 불안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파도처럼 흔들리는 대지에 의해 대기도 뒤흔들리기 시작했고, 관측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관측선 안에서, 젊은 서사대원이 재앙의 징조를 잡아낸 용인족 남성을 붙잡으며 외쳤다. 그 굉음과 함께 시작된 어마어마한 진동에 어린 아이가 놀이삼아 지은 모래더미 마냥 요새와 바위산이 옛적부터 라오샨룽과 쉔가오렌이 오가던 길목인 용의 길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맙소사, 용의 길이...”
“신이시여, 맙소사...”
산이 무너지며 나는 굉음은 거대한 용이 아래에서 포효하는 것 같았다. 헌데 그 굉음도 땅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마치 무언가의 뱃속에서 들끓는 것만 같은 굉음에 순식간에 묻혀버렸다. 그 불과 몇 분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던 엄청난 광경에 할 말을 잃은 채로 지켜보던 이들을 뒤로하고 머나먼 곳에서부터 시작된 격렬한 대지의 파도는 지형을 뒤바꾸며 그 파동을 퍼트려나갔다. 대지의 격통어린 신음은 지형을 뒤바꾸고 있었다,
-
ㅡ쌔애애액!
먼 바다에 위치해 있는, 아직 인간의 발길이 제대로 닿지 않은 고대림에 뒤덮인 섬.
그 섬 위에서 마치 고대의 숲에 녹아들려는 것만 같은, 독특한 녹색 깃털이 수북이 난 조룡종들이 안절부절 못하며 그 두툼한 근육질의 꼬리를 튕기면서 절박함이 담긴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푸드드득..!’
‘쿠구구구구....!’
ㅡ퀘에엑!
ㅡ쌔애애액!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며 갈팡질팡하는 사이, 엄청난 수의 새들과 터를 잡고 살던 비룡들이 숲을 벗어나려는 듯 날아오르는 소리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진동이 섬을 덮치기 시작했다. 그 진동은 순식간에 깃털 덮인 조룡들을 패닉으로 몰고 가며 비명과도 같은 울음소리를 숲에 울려 퍼지게 만들고 있었다.
‘쿠르르릉...’
미친 듯이 날뛰며 도망칠 곳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조룡들이 발작하듯 나뒹구는 곳 너머, 오랫동안 분화는커녕 온천조차 식어가던 화산의 분화구 깊숙한 곳에서 뱃속에서 무언가 들끓는 것만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랜 잠이 끝났음을 선언하듯 뭉게뭉게 치솟기 시작하는 연기 기둥과 함께 산을 뒤흔들기 시작한 진동은 섬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던 용의 뼈가 가득한 무덤도 진동시키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ㅡ키이이익...
언뜻 보면 아무것도 살지 않을 것만 같은 그 뼈와 사체의 산의 가운데에서 뼈를 두른 쌍두를 이리저리 움직이던 나락의 요성이 내는 기이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기괴한 분위기의 용의 무덤에서 울려 퍼졌다. 기괴한 저음이 섞인 그 소리는 대형 몬스터를 포식할 때 내던 소리와는 달랐다. 지금 숲 속에서 공포에 빠져 날뛰는 조룡들의 비명소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 소리였다.
빠르게 짙은 회색으로 물드는 하늘 아래, 재가 흩날리는 고대림을 거대한 파도가 대지를 울리는 진동과 함께 덮쳐오고 있었다.
-
천검산
‘쿠르르릉...’
인류가 수 세기 전 재발견한 이래, 엄격히 출입이 금지된 용의 안식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주인은 그 안식처인 검처럼 깎여나간 봉오리에 똬리를 틀고 침묵을 지킨 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탁한 눈동자가 가끔씩 굴러가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그 뱀의 황제가 살아있다는 걸 모를 정도였다. 그 고요함과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은, 천의 검을 두른 자가 머물고 있는 산에 낮은 울음소리와도 같은 대지의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쿠구구구....’
그리고 이내, 대지를 뒤흔들기 시작한 진동이 뱀의 안식처에 치닫기 시작했다. 결코 지각변동에 휘말릴 일이 없는, 학술원의 학자들이 감탄할 정도로 완벽하게 평온하던 산을 뒤흔들기 시작한 지진은 오로지 정적만이 감도는 그 산에, 아니 전 세계에 격변이 일어나고 있음을 격렬히 알리고 있었다.
‘쿠구구구...’
ㅡ후두두둑...
다시금 대지를 흔드는 진동과 함께, 오랜 세월 동안 그 움직임의 징조조차 안보이던 천의 검을 두른 뱀의 머리와 팔에서 조각들이 무수히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ㅡ후두두둑...
ㅡ쿠두두둑...
지진이 산을 뒤흔들 때마다, 더 많은 조각들이 떨어지면서 죽은 듯이 산에 똬리를 튼 채로 잠들어 있던 달을 빚은 자의 거대한 상체가 그 거처인 산을 깎으며 나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서서히 움직였다. 그 모습은 지상 위를 거니는 생물들에 있어선 결단코 환영받을 리가 없는, 등골에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리게 만들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ㅡ쉬이잇...
특히 그 크기조차 확언할 수 없는 거대한 머리는 서서히 고개를 움직이기 시작하며 어마어마한 크기의 뱀과 같은 혀를 천천히 날름 거렸다. 단지 그렇게 몸을 끌어올려 머리를 든 것만으로 산을 뒤흔들며 깎은 불멸을 구가하는 황제는, 그것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비늘 조각이 비처럼 쏟아지는 그 머리를 더욱 돌려서 그 시선을 산 너머 머나먼 지평선을 향해 그 보석과도 같은 두 눈을 굴려서 고정했다.
ㅡ쉬이잇...
그 붉은 시선을 향한 채 달을 빚은 자는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쉭쉭거리는 소리를 나지막하게 냈다. 마치 머나먼 황혼의 근원을 보고 있는 듯... 천검의 제관 위로 짙게 드리운 재를 흩날리는 오로라가 난무하는 회색빛 하늘에도 대지의 황혼이 내리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
‘쿠르르릉...’
고도.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들여 파도와 바람이 만들어낸 자연의 작품이나 다를 바 없는 아름다운 섬들이 수없이 많은 군도. 그 천해의 섬들은 대지 깊은 곳부터 울리는 진동으로 인하여 지난 며칠 간 수도 없이 뒤흔들리며. 하늘에서 내리는 재들에 의해 회색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쿠구구구...’
그런 고도에 이번에 들이닥친 진동은 며칠 간 뒤흔든 지진과는 너무나 다르게 느껴질 정도로 고통스레 대지를 뒤흔들어 보이며 바위가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은 굉음도 울려 퍼트리고 있었다.
‘쿠르르릉...’
ㅡ퀘엑! 퀘에엑!
ㅡ퀴이익!
그 고통스러운 대지의 신음으로 인해 바다가 오랜 시간 동안 그 파도로 깎고 다듬은 해저 동굴은 서서히 가라앉듯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며, 며칠 동안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재난을 피하기 위해 숨어있던 짐승들에게 패닉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ㅡ끼이익! 끼익!
ㅡ퀴익!
‘쿠구구구...’
생태계의 지위를 막론한 두려운 재난이 시작되자 뒤엉키듯 숨어있던 무파와 재기, 그리고 루드로스들은 그들만의 공포 어린 소리를 냈다. 일부는 무너져 내리는 동굴에서 탈출하려고 은신처에서 빠져나와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공포에 머리가 마비된 것만 같은 필사적인 질주였지만, 그 모든 것이 의미 없음을 깨닫게 되는 데에는 정말로 얼마 걸리지 않았다.
‘쿠르르릉....’
‘쏴아아아....!’
ㅡ끼이이익!
무너지기 시작한 천장에 뚫린 구멍들에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바닷물들은 은신처에 숨어있던 짐승들과,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던 짐승들을 모조리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로 밀려들어오는 짜디 짠 해수에 짧은 비명을 흩뿌리며 물에 파묻혀가는 짐승들을 뒤로하고 빠르게 대지를 헤집은 파도는 이내 넘칠 듯 넘실거리며 탄지아 항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고통어린 대지의 몸부림은 바다마저 무시무시한 괴물의 입으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
‘쿠구구구구구....’
“엄청난 지진이었는데 해일은 안 오다니, 다들 괜찮아?”
“콜록, 절벽이 좀 무너졌는지 먼지만 엄청나네요.”
탄지아 제 1항만.
어마어마한 지진이 겨우 가라앉기 시작하자 먼지와 재의 안개로 한치 앞도 제대로 안 보이는 가운데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외친 카를의 말에 흙먼지로 엉망이 된 저맘이 가까스로 방패를 기둥삼아 몸을 일으키며 콜록거리며 스스로가 멀쩡함을 알렸다. 그 말에 카를은 잠깐의 안도감을 느꼈지만 이내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나머지 두 사람에게서 무언의 불안감을 느꼈다.
“벨라?”
“.....”
“형님? 다들 무사하죠?”
“....용이다.”
‘쿠구구...’
그 불안함을 떨쳐내려는 듯 안위를 물은 카를의 말에 대해 리엘은 넋이 나가버린 것만 같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치 대지가 박동하는 것만 같은 짧은 지진이 울려 퍼졌다.
‘쿠구구...’
“저건... 도저히 용이라고는...”
“맙소사, 바다에 불이...”
‘쏴아아아...’
완전히 패닉에 빠져버린 벨라의 중얼거림과 도무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없는 것만 같은 저맘의 말을 뒤로하고 카를은 지금 자신의 눈에 들어오고 있는 광경을 어떻게든 납득하려고 모진 애를 쓰고 있었다.
ㅡ바다가 불타오르고 있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도저히 눈으로 봐도 납득하기가 어려운 기괴한 현상. 그와 동시에 마치 파도가 치는 듯한 소리를 내며 점차 새하얗게 끓어오르는 바다는 지금 그의 눈에 들어오고 있는 그 상식을 초월한 현상에 더욱 비현실성을 더하여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쿠구구...’
그런 비현실적인 느낌에 머리가 마비되어있던 카를이 다시 현실로 돌아온 때는 주홍빛으로 타오르는 바다 아래, 검은 연기를 꼬리처럼 하늘에 흩뿌리는,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지진을 일으키는 대지의 거인의 툭 튀어나온 거대한 돌기가 눈에 들어왔을 때였다.
“저게... 정말 용이라고...?”
‘쿠구구...’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만 같은 떨리는 목소리의 리엘의 말. 도무지 현실감이라곤 느껴지지 않으며 그렇기에 단지 그 신체의 일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더욱 공황을 불러일으키는 그 모습에 다들 발걸음을 떼지도 못할 정도로 압도되어 망연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쏴아아아아....’
순간 무언가가 앞을 가로막은 듯, 전진을 멈춘 대지의 용. 그 옆에 부글거리며 타오르는 바닷물은 마치 거대한 가마솥에 넣고 끓이는 물 마냥 빠르게 그 수면을 낮추며 점차 먼 바다로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ㅡ그오오오오오.....
그 도저히 상상하기도 힘든 이질적인 광경에 둘러 싸여있는, 용암을 두른 것만 같은 거대한 용은 먼 바다로 물러나가며 끓어오르는 바닷물 아래에 잠겨있던 몸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내 서서히 바닥에 사지를 붙이고 있듯 기어가던 그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몸을 일으키며 느릿하게 내는 먼 바다에 사는 고래가 내는 것만 같은 낮은 저음의 울림은 네 사냥꾼의 정신을 헤집어 놓으려는 듯 그 머릿속을 파고들어갔다.
“히이이익!”
“끄으으윽...”
‘쏴아아아아....’
ㅡ구오오오오오.....
그 패닉을 불러일으키는 소리와 함께 지옥불과 같이 뜨겁게 끓어오르며 타오르는 바닷물을 가르고 완전히 바다를 가르고 솟아나는 용의 머리. 그 모습이 저맘의 눈에 들어왔다. 대지를 울리는 포효가 무의식 깊숙이 박힌 공포, 유전자에 각인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와중에 저맘은 그 모습을 고통스럽게 본 것이다.
-맙소사... 저 모습은...
그 모습이 무엇을 연상케 하는 지 떠올린 저맘은 희망이 순식간에 앗아져가는 것을 느꼈다. 전 세계, 모든 지방의 전설에 나오는 숙명의 싸움, 그 여느 때보다 찬란하였던 슈레이드 왕국을 일순간에 썩어 들어가게 만들었을 지도 모르는 내려앉는 전설. 그 터무니없는 전설 속에서나 기록되어있는 그 두려운 모습을 메제포르타 사냥꾼 길드 소속의 헌터이자 메제포르타 고생물학 서사대에 소속되어 숱한 문헌을 책벌레처럼 읽어왔던 그녀가 결코 모를 리가 없었다.
‘쿠구구....’
심장의 맥동처럼 진동하는 대지는 거대한 고룡의 움직임을 자극하는 신호가 된 것만 같았다. 잠시 그 거구에서 엄청난 양의 증기를 몸에서 내뿜으며 고개를 아래로 향한 채로 움직임을 멈췄던 대지의 화신은 서서히 그 격룡선에 필적할 정도로 거대한 머리를 들어 올리며 그 붉은 기운을 두르고 있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다들 귀마개를 써! 안 그러면 정말로 미쳐 죽는다!”
순간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지 알아챈 리엘의 외침에, 나머지 세 사람은 극도의 공포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있는 상황에서 부두부들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 넣어뒀던 귀마개를 끄집어내어 귀에 필사적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기 시작했다. 간신히 귀마개를 밀어 넣은 그 순간, 탄지아에 사는 이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을 하루가 시작되기 시작했다.
-
ㅡ크오오오오오.....!
지상 모든 것의 막을 내릴 대지의 황혼, 연흑룡 그란 밀라오스는 인류의 전설 속에 나오던 용의 모습을 한 그 기다란 몸을 뻗치며 화산재로 인해 더욱 어둡게 어둠이 내리 깔린 자정의 하늘을 향해 포효하기 시작했다.
머나먼 고대, 첫 번째 대멸종을 불러온 대지의 격변을 불러왔을 때의 모습에서 일말의 변화도 없는 그 타오르는 두 눈에는 그 때와 마찬가지로 분노는커녕, 단 한 톨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미건조할 뿐이었다. 오직 자신이 지금 해야 할 것을 하려 한다는 그 무미건조한 눈은 거대하게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와중에도 일절 다른 곳으로 쏠리지 않으며, 관심조차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쿠오오오오오....!’
그 엄청난 하늘을 향한 포효와 함께, 화산을 연상하게 되는 그 기이한 모습의 날개 끄트머리의 분화구와도 같은 구멍에서 엄청난 열과 불꽃이 튀며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으려는 것만 같은 그 어마어마한 붉은 불꽃과도 같은 기운이 하늘로 쏘아지듯 퍼지기 시작하자 결코 인간의 머리로는 납득하지 못할 괴이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지진과 함께 두터운 구름의 가운데에 마치 구멍이라도 뚫리듯 서서히 옅어지는 재의 장막 사이로 밤의 어둠을 걷어내며 드리우기 시작한 마치 해가 드리운 것만 같은 붉은 노을의 빛. 마치 태양을 만들기라도 한 듯 점차 괴이하게 밝아져가는 하늘은 지상의 수많은 생물들이 보면 결코 이해하지 못할,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만 같은 두려운 일이었다.
ㅡ크오오오오오.....!
‘쿠구구구구....’
그리고 그렇게 하늘에 뚫린 황혼의 빛을 뿜어내는 것만 같은 구멍을 향해 다시금 그 거대한 붉은 입을 벌리며 울부짖는 연흑룡에 화답하듯, 하늘을 두터이 가리고 있던 화산재의 장막은 격렬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먼 바다에서 끊임없이 하늘을 향해 그 내용물을 퍼트리고 있던 거대한 화산재 구름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며 나는 엄청난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지만, 그 소리를 제대로 못 듣게 할 정도의 또 다른 이변도 일어나고 있었다.
‘쿠과과과과!’
‘쒸이이잇!’
하나 둘 긴 붉은 꼬리를 이끌고 대지로 떨어지던 유성들의 수도 대지의 황혼의 부름에 화답하듯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며 탄지아 항구 제 1항만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에 종막을 선언한 것만 같은 그 길디 긴 포효가 끝난 후, 고개를 정면으로 내린 대지의 거인은 서서히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는 그 거대한 팔을 앞으로 뻗었다.
ㅡ쿵....
‘쿠구구구구....!’
‘쏴아아아아!’
끊임없이 날개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어떤 것을 두른 그란 밀라오스의 팔이 엄청난 무게를 자랑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닿자 파도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소리가 공중을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대지를 진동하는 맥동과 함께 미처 먼 바다로 빠지지 못하고 남아있던 물들의 웅덩이가 맹렬한 파도소리를 내며 끓어오르다 사라지기 시작했다.
ㅡ쿵...
‘쉬이이이익...!’
다시금 한발을 내딛자, 어느새 수분이 전부 증발하고 그 바닥에 잔뜩 눌어붙은 하얀 결정들이 맹렬한 소리와 함께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격렬한 지진이 일어나 땅이 울렸다. 이변이 단지 탄지아 항구만 뒤흔들지 않을 것을 알리면서.
ㅡ쿵...
‘쿠구구구구구....’
오로지 앞만 보며 전진하는 대지의 황혼의 발이 다시금 한발 앞으로 내딛어 졌다. 그와 함꼐 격렬하게 울리는 지진은 이제 단지 탄지아 항구만 뒤흔들지 않음을 알리는 이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꿈틀거리는 먼 바다의 파도는 그 진동에 더욱 너울이 커지며 서서히 그 지진의 근원인 자를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진동에 의해 더욱 가파른 속도로 바다로 빠지고 있는 해수가 내는 소리는 결코 대지를 뒤엎는 이 대지의 화신이 불로만 세상을 씻을 것이 아님을 명확히 알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ㅡ크오오오오오오....!
다시금 어두운 하늘을 울리는 거대하고 무거운 포효와 함께, 대지의 황혼이 마침내 막을 올리기 시작했다.
-
“..이거 아무리 봐도 우리 무기가 통할 것 같진 않은데...”
포효가 끝나자, 귀를 막고 있던 카를이 말을 꺼냈다. 현실에 없을 것을 본 듯한 그의 말은 무의식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진 공포로 넋이 나간 다른 세 사람의 정신을 현실로 돌려놨다.
“상상을.. 완전히 뛰어 넘었어요... 여태껏 저런 용은... 들어본 적도 없는데...”
“한발 움직일 때마다 땅을 뒤집어버리는 녀석이 어딜 봐서 용이야...”
겨우 정신을 다시 잡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공황 상태에 빠져있는 저맘과 벨라의 말에는 더욱 그 극도의 두려움이 뚝뚝 묻어났다. 인간의 두뇌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자연의 법칙을 아득히 초월해버린 대지의 화신 앞에서 느껴지는 그 극심한 무력감도 공황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일조하고 있었다.
ㅡ쿵....
‘쿠구구구...’
모든 것을 무너트리고, 불태워서 지워버릴 것만 같은 재난을 한발 한발 움직일 때마다 불러일으키는 대지의 악마는 그런 절망감에 질식되어가고 있는 자그마한 생물들이 자신의 발아래에 존재하는 것조차 모르는 듯 천천히 그 몸을 전진시키고 있었다.
-어라, 뭔가 이상한데?
공포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벨라는 뭔가 상당히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다들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인 존재에 압도되어 깜빡 잊은 그 사실을. 일반적으로 몬스터를 포함한 야생동물들은 그 감각이 지극히 예민하여 그 어떤 수렵에서든 후각이나 청각, 또는 시각을 통하여 사냥꾼들과 동반자들을 발견하고 경계를 표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기에 수렵에 나서기 전 인공적인 향이나 채취를 최대한 숨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반쯤 의무화 되어있을 정도였지만, 지금 눈앞에서 그저 전진만 하려는 듯 그 살아있는 화산과도 같은 거체를 움직이고 있는 대지의 화신은 그런 경험과 지식에 전혀 반대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ㅡ쿵...
‘쿠구구구...’
그 설명되지 않는 기이함이 그저 넘겨짚기가 아님을 차츰 확신하게 된 것은, 땅에 서있는 자신들은커녕, 일반적인 몬스터면 바로 감지하자마자 경계를 할 것이 뻔한 격룡선의 파편에도 눈길을 주지 않으며 전진만을 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였다.
“오빠,.... 저 녀석 아예 아래에 우리가 있는 걸 모르는 것 같은데...?”
“나도 느끼고 있어, 저 녀석은 아예 우리를 포함해서 수면이나 지상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것 같다.”
‘쿵!’
카를이 등에 짊어지고 있던 해룡 소재 대검을 풀어내리자, 땅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의 목숨과도 같은 무기를 헛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저항을 위해 뽑아들면서 하는 카를의 말에 저맘도 자신이 느끼고 있던 기이함을 입으로 뱉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용은 아예 시선을 지평선으로 고정하고는 아예 다른 곳을 보질 않네요..?”
“나발데우스는 저러지 않았었잖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저거?”
남매에 비해 살짝 늦게 그 이질감을 제대로 느낀 저맘의 말과, 도저히 자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상충되는 대지의 용의 행동에 대한 깊은 의문을 품고 있는 벨라의 말 두 개가 날아들자 카를은 즉답을 하지 못하고 나름대로의 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빠르게 굴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저 녀석에게 있어서 지상 위의 모든 것들은 우리 입장 기준으로는 세균 이하라서 인식을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건 좀 많이 섬뜩한 거 같은데... 그러면 아예 저 녀석은 우리를 보지 못 하는 거잖아.”
“하지만 그게 가장 말이 되긴 하니까... 어라? 잠시만...”
순간 느껴지던 이질감이 해소되지만, 온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은 가설. 순식간에 와 닿게 만드는 그 말은 순간 벨라는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똑같은 카를의 말에 저맘은 또 다른 의문이 뒤따라오는 것을 느끼며 차마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운 듯, 의아한 목소리로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는 건 지금껏 모든 재난들은 공격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건데... 어찌된 걸까요?”
“악의 없이 불러 온 세계구급의 대재앙이라... 빌어먹을,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데.”
라이트 보우건을 장전하며 질린 듯이 던진 리엘의 말은 이 전대미문의 재난을 불러온 존재에 대한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의 공포를 재각인 시켰다. 도저히 인간의 머리로는 그 이상으로 해석이 힘들다는 것도 큰 이유였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겠다고 시도하는 그들의 마지막 희망마저 잿더미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것도 크게 그 공포를 부추기고 있었다.
“격룡창을 꽂으면 어떻게든 타격을 주지 않을까 싶긴 한데, 저거 작동하겠지?”
“작동은 하겠죠, 그 호산룡이 들이받아도 멀쩡히 작동하는 물건이니까요.”
ㅡ쿵....
‘쿠구구구....’
날개에서 끊임없이 마치 붉은 아지랑이처럼 솟아나고 있는 붉은 기운을 두른 대지의 화신은 가깝다 못해 눈 감고 쏴도 격룡창을 명중시킬 수 있을 정도로 접근했다. 평상시라면 우려는커녕 헛된 걱정, 기우로 여길 말이었다.
하지만 그 일반적인 격퇴 임무였으면 그저 기우로 넘겨버렸을 그 말은 대격변이 대지를 뒤흔들고 있는 지금에 있어선 너무나 다르게 느껴졌다. 그런 불길함을 애써 넘기며 말한 벨라의 말에 리엘은 거뭇한 투구를 꾹 눌러 쓰면서 일어났다.
“그럼 내가 올라가서 작동시켜 보도록 하지.”
“잠시 만요, 중요한 건 저게 작동하나 마나가 아니에요, 녀석은 멸룡재를 이용한 포격에도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고요.”
“젠장,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거냐!”
저맘의 말을 듣자 리엘은 그가 잊으려고 노력했던, 무력하게 궤멸된 탄지아 함대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 때문에 그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지만, 그건 곧 스스로도 희망이 없다는 걸 인정한 꼴이었다. 벨라와 저맘은 뭐라 말해야 할지도 잊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쓸려면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녀석은 조금만 있으면 격룡창 타격 범위를 벗어날 거예요!”
“망할, 일단 쓰고 생각해야겠군. 내가 작동시키마.”
ㅡ쿠구구구구....
다시금 숨이 막힐 정도로 차오른 절망을 어떻게든 떨쳐내기 위하여 카를이 느리다 못 해 느긋한 걸음으로 한 발짝씩 움직이고 있는 살아있는 화산을 힐끗 본 후 외친 말. 그 말에 리엘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은 후 경석궁을 다시 등으로 옮기고 격룡창이 실려 있는 격룡선으로 뛰어 올라가려했지만 그 순간 어마어마한 진동이 땅을 울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이 진동은... 다들 배 안으로 들어가요! 해일이 몰려올 거예요!”
“해일이라고? 지금 시점에서? 아까 물이 빠졌는데도 안 왔는데?”
‘쿠르르릉...’
당황스러울 정도로 엉뚱한 시점에서 해일이 몰려오고 있다는 저맘의 말을 들은 리엘은 얼이 빠져버렸지만, 먼 곳에서 들려오는 산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소리와 함께 다시 진동이 대지를 흔들자 그제야 그녀의 말이 옳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 앞에는 파도가 전혀 안 보이는데? 대체 어디서 온 다는 거야?”
“알 수 없어, 옆에서 올지 뒤에서 올지 지금 짐작도 안 가! 내 예상이 완전히 틀린 거였어..!”
ㅡ쿵!
‘쏴아아아아아!’
여전히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벨라의 말에 저맘은 이 완전히 예상을 벗어간 사태에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그와 동시에 머지않은 곳의 대지를 울리며 밀려들어오고 있는 파도의 소리가 들리자 안색이 잠시 사색이 되었다.
“카를 씨! 얼른 벨라를 데리고 들어가서 뭐라도 붙잡고 있어요! 절대로 무기고 근처에 있지 말고요!”
“알겠으니까 너도 얼른 들어와라! 거기 있으면 네가 제일 위험해!”
‘쿵!’
서둘러 무기를 다시 등에 맨 후 호흡기도 다시 꺼내어 물며 카를이 외친 말에 벨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격룡선의 뭉텅 잘려나간 옆구리의 입구에서 방패를 다시 박듯이 내리꽂으며 말했다.
“아까 제가 고집을 좀 부리겠다고 했죠, 이제 그 때가 온 것 같네요.”
“어디서 올지도 모르는 해일을 막겠다고? 제정신이야?”
“큰 구멍은 여기 하나뿐이니 어떻게든 최대한 막아보도록 할게요, 총창이 괜히 움직이는 요새가 아니니까요.”
‘쿠르르르르릉...!’
ㅡ쿵....
‘쿠구구구구....’
말을 끝마치며 호흡기를 굳게 물려고 하는 순간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다시금 엄청난 진동이 땅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한발을 더 내딛는 대지의 화신을 중심으로 흔들리는 대지는 처음보다 훨씬 크게 출렁거렸지만 그 진동에도 일말의 흔들림 없이 저맘은 자세를 낮췄다. 업화보다 더욱 파괴적인 악마의 입과도 같은 파도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
‘쿠르르르릉...!’
‘끼이이이익....’
탄지아에서 그리 머지않은 해상.
거대한 파도가 수없이 많은 파편을 품고 으르렁거리며 빠르게, 더욱 빠르게 탄지아 항구를 향해 달려갔다. 이렇게만 보면 지난 며칠 간 간격을 두고 들이닥쳐 왔던 여타 해일하고 비슷하게 보였지만, 지금 항구를 향해 그 엄청난 무게를 밀어붙이고 있는 파도는 이전의 지진 해일과 명확한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쿠구구구구....’
ㅡ콰르르르릉...
탄지아 시의 명물인 등대들을 차례대로 무너트리며 집어삼키고 있는 이번 해일은, 마치 대지의 황혼을 피하려는 것만 같이 제 1항만으로는 전혀 퍼지지 않으며 양 옆으로 갈라져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파도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경로로 들어와 무시무시한 속도로 제 2항만과 제 4항만으로 쏟아져 들어가 모든 것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쿠구구구구...!’
“여기에도 결국 들이닥치는 것인가....”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더 대피하는 것을 보고 갈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봐야겠습니다.”
한 때는 주말마다 장터가 열릴 정도로 거대한 광장. 그 광장에 부상자들과 낙오자들을 하나라도 더 대피시키기 위해 임시 대피소가 급히 설치되어있었다. 그 임시 대피소는 재로 뒤덮여 회색으로 물들어있었고, 누추하기 짝이 없었다. 그 곳에서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진 얼굴의 탄지아 시장과 대피를 할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남기를 자처한 다른 이들은 순식간에 가까워져오고 있는 파도가 불러온 파괴의 소리를 들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서사대와 학술원의 사람들은 안전하게 대피했습니까?”
“예, 마지막으로 출발한 피난행렬에 안전하게 합류하여 지금쯤이면 탄지아 시외에 닿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헌터들은요? 그들이라도 살아남아야하지 않습니까.”
연흑룡을 막기 위해 떠난 헌터들의 수정된 계획에 찬동하여 최대한 미처 못 피한 이들을 구조하여 대피행렬에 합류시키던 사냥꾼들이 떠오른 시장의 말에는 근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들만이라도 살아남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 말이었지만, 그 말에 사냥꾼 길드마스터는 눈을 감으면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최대한 많은 수를 대피시기겠다고 방어선 구축도 미루고 남은 이들입니다. 그들도 아마... 피하지 못할 겁니다.”
“후... 결국 그렇게 되는 군요.”
“서사대원들 중에도 헌터 자격이 있는 이들은 남아서 돕고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들도 피하지 못 하겠지요...”
역시 눈을 감으며 하는 서사대장의 말은 너무나 평온하다 못해 마치 평소에 보고를 올리던 것과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말 안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었다.
‘끼이이이익...’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 보냈으면 했습니다만, 결국 이렇게 되는 군요.”
“가족들이라도 보냈으니 다행입니다, 도와드릴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시장님.”
어마어마한 물이 밀려오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판을 뒤트는 소리가 들려오자 탄지아 학술원장은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머리를 돌린 후 조용히 말했다. 그 말에 천천히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 본 탄지아 시장은 눈을 감으며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부디 살아남을 이들에게 하얀 용의 가호가 함께 하길.”
‘끼이이이이익...’
ㅡ콰드득!
며칠 전 대지의 황혼에 의해 거대한 고철이 되어 먼 바다에서 떠돌던 철갑선. 한 때 탄지아 해군의 자랑이었던 그 철갑선의 갑판은 뒤틀린 채 파도에 떠 밀려와서 거센 파도와 함께 광장을 덮쳐 집어삼켰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이들과 모든 것을 포기한 이들을 집어삼킨 괴수의 아가리와도 같은 그 거센 파도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 영역을 넓혀갔다.
-
‘쿠르르르릉...!’
ㅡ쿠구구구구...!
“큭...!”
그 방향조차 짐작이 안 가던 해일은 기암절벽을 넘어, 엄청난 굉음을 일으키며 재앙의 바다로 밀려들어왔다. 그 예상치 못한 위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무시무시한 양의 해수에 저맘의 얼굴에는 난감함이 떠올랐지만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쿠르르르릉...!’
ㅡ쏴아아아아아!
“우우우웁...!”
다른 생각을 품기도 채 전에, 엄청난 양의 해수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반파된 격룡선 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폭포와도 같이 쏟아져 내린 해일에 떠밀려가 익사하지 않기 위해 배 안에 있는 이들은 최대한 힘을 넣은 손으로 기둥과 난간들을 붙잡고 버텨냈다.
‘꾸드드드득...’
ㅡ부글부글...
멈출 기미라곤 보이지 않으며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엄청난 무게의 파도에 짓눌리기 시작한 격룡선은 더 이상 견디기가 버거운 듯, 뒤틀리는 소리를 내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버텨야할 버팀목이 무너지고 있는 걸 알았음에도 해일의 격렬한 충격에 그들은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끼이이익...’
‘쿠구구구구...’
배 위에 남아있던 마지막 무기고가 있는 갑판이 부서지기 시작하며 안의 물건들이 이리 구르기 시작했지만, 이 상황에서 그 여느 때보다 신경이 쓰였어야 할 그 소리는 느닷없이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한 대지가 내는 신음에 묻혀버렸다.
ㅡ크오오오오오...!
‘쉬이이이익...! 쉬이이익..!’
격렬한 지진을 신호탄 삼아 울리는 포효는 물속에서 귀를 짓이기고 무의식 속 심연까지 울렸으며 상상을 아득히 벗어난 현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물이... 끓어오르고 있다고?
파도가 내는 하얀 거품에 한치 앞도 제대로 보기 힘든 해수 속에서 간신히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포효와 해일로 인한 충격을 흡수하는데 여념이 없던 저맘의 머릿속은 얼어붙듯 새하얗게 변해갔다.
약 일주일 전부터 인류가 목도한 최악의 대격변을 불러 온 근원이자, 서사대와 길드에서 연흑룡 그란 밀라오스라 그 이름을 부여한 존재. 그 숙명의 싸움을 이어받은, 대지의 숙명이라 칭해진 거대한 고대의 용이 길드가 머나먼 해상에서부터 바다를 끓어오르게 하고, 수면을 불타오르게 만든 존재라는 것은 길드마스터와 고룡관측소가 제공해준 정보에 의해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그 제공받은 정보에 허점이 있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부글부글부글부글...’
‘쿠르르르릉...’
ㅡ그오오오오오....!
물이 몸에 닿기도 전에 날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선에 의해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모습. 마치 스스로의 몸에 바닷물이 닿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 같은 그 모습은 충격적이게도 비현실적이었다. 그렇게 끓어오른 해수가 만든 어마어마한 양의 수증기의 층은 마치 그 주변에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는 해일을 밀어내려는 듯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었다.
‘퍼엉!’
‘쿠구구구구...!’
-설마 해수가 몸에 닿지 않게 하려는 건가?
상식을 벗어난 사태에 순간 자신의 저맘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란 밀라오스는 확실하게 그 몸에 물 한 방울이라도 닿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위해 재난을 마치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다루고 있었다.
그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비현실적인 현상이 이내 파괴적인 형태로 변모하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마치 밀려든 해일을 전부 날려버리려는 것 마냥 일어난 엄청난 폭발은 순식간에 몰려든 바닷물들을 모조리 밀어내며 엄청난 충격파와 굉음을 사방에 퍼트렸다.
‘쿠드드드득...!’
-설마 이건 배가... 안 돼...
그 충격파에 뒤틀려 으스러져가던 격룡선은 일순간 산산이 무너져 내리며 그 일부였던 파편들을 사방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불길함이 저맘의 머리를 찌르고 지나갔다. 저맘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해수 때문에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 속에서 힘껏 방패를 뽑아든 후 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무너져내려가는 배와 순식간에 수위가 낮아져가는 해수를 가로지르고 나아갔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이내 눈에 들어온 것은, 무너지고 있는 배 깊은 곳 안에서 매달린 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벨라였다. 그녀가 우려한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이다.
-맙소사, 어째서 저런 깊은 곳으로 들어가선....!
카를과 리엘은 그녀가 알고 있는 사냥꾼들 중 가장 반사 신경이 뛰어나기에 자신이 가지 않아도 무너지고 있는 선체에서 구멍을 통해 빠져나올 수 있지만, 벨라는 그녀의 오빠에 비해 반응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능력을 살짝 과대평가하는 벨라를 항상 우려했지만, 하필 이 시점에서 다시금 그런 판단 착오를 한 것을 보고 저맘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없어...
처음 이 방위 작전을 구상할 때부터 늘 우려했던 부족한 시간, 그것이 더욱 부족해지고 있음을 느끼며 저맘은 있는 힘껏 물과 파편을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지금 이 순간 저맘이 그 누구보다 아끼는 사람의 생명이 달린 시간이 너무나 촉박할 정도로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