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이전에 유비와 함께 형주에 있었소. 그대는 유비의 재략이 어떻다고 생각하시오?"
"그로 하여금 중원에 있게 하면 사람들을 소란스럽게는 할 수 있겠지만 다스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틈을 타서 요충지를 지킨다면 한 쪽의 군주는 충분히 될 수 있습니다."
- 정사 삼국지 배잠전
이미 당대부터도 '중원에서는 사람들을 격동시킬수 있을지는 몰라도 생존싸움은 어렵고 한쪽 구석의 군주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받음. 이게 배잠이 조조에게 좋게 말했다고 하기엔, 실제 유비의 행적도 결국 중원에서 밀려나서 익주 1주를 차지했을 뿐이고, 결국 동으로는 양주, 형주, 교주를 차지하고 걸터 앉은 손권조차도 이기지 못하고 끝났음.
결국 전반적인 3국 군주 능력치를 따지면 세력크기로 봤을때는 조조>손권>유비가 될 수밖에 없지 않나...
이러느니 저러느니 해도 조조가 연주를 다 잃고 빌빌거리던 시절에 유비는 서주를 다 꿀꺽한 시절도 있어서 세력 차이 유비가 더 앞서는 시기도 있던걸 감안하면 좋게 보긴 어렵지.
아 글고보니 8리메 낼 아침이구나
흐음, 유비가 모든 재량이 갖쳐줬을때 한중에서 조조를 이긴 적 있었고(이때는 역으로 조조가 총기를 잃은 상태였지만) 서주얻은 것은 조조와 그전에 착융이 휩쓸고 간거, 그리고 서주 호족은 몰라도 단양병이 비협조적이었던것 을 따지면 올바른 비교는 못됨 개인적으론 군사수도 조조가 더 많았을거라 예상함 그리고 연주 잃을 뻔 한건 조조 본인의 병크였었던데다가 본인도 쪽팔려서 지운 원소에게 한번만! 찬스도 있었지
일단 차지한 땅을 따지면 능력치 평가가 그리되도 뭐 이상하지 않을만하지만 그렇다고 시작한 기반을 따지자면 결국 유비가 제일 불리했던건 사실이라 그 점도 고려해야하지 뭐 애초에 코에이 삼국지 유비는 근본적으로 연의를 기반으로 한 캐릭이라 '주변 인물이 유능하고 본인은 무능하거나 무난한 군주'를 표방하고 있으니 능력치가 삼군주에서 제일 낮은게 이상하지는 않음
유비가 서주에 정착했을때 연주에서 3현만 남았고 곧이어 기근이 겹쳐서 조조는 거의 떠돌아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는데다가, 원소한테 구걸까지 하기 직전에 몰렸다가 재기했음. 어차피 양쪽 모두 전란과 자연재해로 피폐한건 마찬가지고 내부적으로 협조하지 않는 세력 있는것 역시 마찬가지였지. 서주 호족들은 유비가 서주에 돌아왔을때 수만명의 대군까지 뽑아다가 유비에게 바쳐준 전력도 있었으니 서주의 피폐 정도가 연주보다 더했다는 얘기는 결국 그냥 유비에게 호의적인 해석이지. 근데 이렇게 서주에서 수만명의 대군을 가지고도 유비는 조조 대장기 보이자 마자 처자를 버리고 패퇴하는 수준이었지. 결국 여기서 두 사람의 그릇이 결정난 거라고 봄.
서주에서 수만명 뽑았었어? 생각보다 생산력 대단하네
그것도 여포의 지배를 거친 이후의 기록임. 여기서 두 사람의 기량은 거의 비교가 끝난거라고 봐야.
근데 수만명이 있는데 왜 조조 대장기 보고 튈 이유가 어딨어... 아직 서주온지도 얼마 안됬고 내부 복속 안되서 뒷통수 맞기 쉽상이니까 그렇지. 확실히 이때는 조조가 한수 앞선건 맞는데, 수만명의 대군을 풀가동할수 있는 것처럼 말하면 좀 그래
?
아니 뭐 실제 있는 기록이기도 하고, 설령 그 기록을 믿지는 않더라도 유비는 조조가 친정을 오자마자 수만명을 들고도 처자와 심복인 관우를 버리고 패퇴했어야 할 정도로 조조에게 대패한 건 그냥 사실임.
미안한데 기록 어디서 나오는지 가르쳐줄수 있음? 여포 통치 거치고 나서 군사 나오는것도 어디에 나오는지
팩트는 조조는 내부에 원소랑 내통하는 놈들이 한트럭이었는데도 그걸 견디고 이겼고, 유비는 거의 모든 서주 호족들과 서주 주민들이 호응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도 조조에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퇴했다는 거야.
동해(東海)의 창패(昌霸)가 모반하고 군현들 다수가 조공(曹公)을 배반하고 선주 편에 서니 그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손건(孫乾)을 보내 원소와 연화(連和-연결하여 화친함)했다. 조공이 유대(劉岱), 왕충(王忠)을 보내 이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건안 5년(200년), 조공이 동쪽으로 선주를 정벌하자 선주가 패적(敗績-대패)했다. (주15) (주 15) [위서] – 이 무렵, 공(公-조조)은 바야흐로 관도(官渡)에 위급한 일이 있어 제장들을 나누어 관도에 주둔시키고, 친히 정병(精兵)을 이끌고 유비를 정벌했다. 당초 유비는 공(公)이 대적(大敵)과 연접해 있으므로 동쪽으로 오지 못하리라 여겼는데, 후기(候騎-척후기병)가 갑자기 와서 조공이 친히 왔다고 말했다. 유비는 크게 놀라면서도 이를 믿지 않았다. 친히 수십 기를 이끌고 나가 공의 군대를 살펴보다가, 휘정(麾旌-대장기)을 보자 이내 군사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조공은 그 군사들을 모두 거두고 선주의 처자를 붙잡고, 아울러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나도 저거 읽어봤는데 저 '무리'가 병사수였어?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병사가 맞지 東海昌霸反,郡縣多叛曹公為先主,衆數萬人 한국어 번역 제가 이 중국 고전 텍스트를 한국어로 번역해드리겠습니다: "동해 지역에서 창패가 반란을 일으켰고, 군현의 많은 지역이 조조에 반기를 들어 선주(유비)를 따랐으며, 그 병력이 수만에 이르렀다." 클로드 AI 에서도 비슷하게 번역했고.
衆數萬人 자체에는 딱히 병력이라는 의미의 한자도 없고 파파고랑 구글 번역에도 그렇게 나오는데... 반란일으키는게 단순 병사들만 그런게 아니라 백성들도 반기를 들수 있는거고...
아, 근데 한가지 말하자면, 난 딱히 조조보다 유비가 능력치 낮다고 별 생각은 없음 실제로 조조가 유비보다 능력적인 면에서는 우월한 면모를 많이 보였으니까 그렇다고 너무 내려치는건 별로라 생각했던거고
무엇보다 언급했던 서주 배신은 유비가 회심의 한수를 놓은건데 그걸 돌파했다는 거 자체가 조조의 기량이 어마어마하다는건 느끼고 있음, 다만 역으로 유비가 놓은 수도 결코 얉은 수는 아니었음을 말하고 싶은거고
뭐 유비가 조조, 손권보다 더 받아야 한다 이런 얘기 하는 애들도 있으니까 유비의 객관적 위치를 상기 시키고자 했을뿐임.
객관적 위치라고 하지만, 나는 각자 장단점이 있고 밸런스가 맞는다고 생각해서 뭐가 객관적이라곤 말 못하겠음 뭐 그래도 님이 좋게 말하니까 얘기하기는 좋았음, 새벽 밤에 수고해
그래서 통솔 정치는 80 중반 줘야하지 않나 싶은데
소폭 올려줄 수도 있다고 보지만 그 경우에는 부하장수들을 크게 깎아야겠지. 특히 관우랑 조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