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8년 음력 4월 15일, 누르하치는 무순을 기습공격했다. 그 과정의 경우 이설이 있으나, 결과적으로 누르하치는 무순을 함락하고 수장 이영방을 투항시켰다. 누르하치가 무순을 함락한 그 때 후금의 다른 별동부대도 동주, 마근단을 공략하고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그 지역들을 함락하고 막대한 전리품과 포로들을 확보했다.
1618년 음력 4월 16일 군을 집결시킨 누르하치는 무순을 파괴하기 위해 4천여명의 군대를 무순에 남겨둔 뒤 주력부대를 이끌고 경계를 넘어 기야반에 재차 군영을 구축했다. 이후 누르하치는 노획물을 정리하고 포로들을 가호로 구성하는 한 편 포로중 일부를 선별하여 명나라에 자신의 전쟁명분인 칠대한과 화친 제안이 쓰인 서신 및 노자를 쥐어주고는 서쪽으로 보냈다.
이는 후금에 대한 명의 역습을 늦추기 위한 기만책으로 볼 수도 있으나, 누르하치는 해당 화친 제의에 어느정도 진심이었던 것 같다. 당시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명과의 패권경쟁이기 보다는 여허의 병합과 여진 통일이었으므로 최대한 빨리 명과의 전쟁을 끝내고 명-여허 공조 체제를 차단할 필요성이 있었다. 다만 그가 보낸 서신이 내포한 내용과 명의 체제를 생각해 보자면, 이 시점에서의 화친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보여진다.
누르하치의 군대는 4월 16일을 포함하여 약 5일간인 4월 20일까지 노획물 정리 작업과 공적에 따른 포상 작업을 계속하는 동시에 무순에서 철거작업을 진행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군대가 복귀/합류하기를 기다렸다. 해당 부대는 동월 20일에 누르하치의 군영에 합류했다.1그런데 그 시점까지도 노획물과 포로의 분배는 끝나지 않았기에, 누르하치는 일단 그에 대한 분배는 허투 알라에서 진행키로 했다. 그는 대군을 동원하여 포로와 노획물을 허투 알라로 이송하고 본인은 그보다 작은 규모의 군대를 대동하고 후방에서 천천히 기동, 복귀하는 군대의 후위를 지탱했다.2
삽화 출처 : 칼부림
누르하치가 군대를 한꺼번에 움직이지 않고 포로 및 전리품 이송부대와 후방 엄호부대를 나눈 뒤 본인이 직접 후방 부대에 남은 것은 아마도 명군의 추격을 경계한 행동으로 보인다.
비록 무순을 비롯한 작전 대상들을 기습공격하는데에 상당한 공을 들여 기습 당일날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지만, 일단 전투를 치룬 이상에야 요동아문에 자신의 침공에 관한 정보는 전달될 수 밖에 없었다. 무순에서 탈출한 전령이 없다고 하더라도 동주, 마근단, 그리고 주변 진보와 농장 및 마을까지 공격대상이 되었는데 거기서 한 명도 빠져나간 이가 없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선전포고 겸 화친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포로들까지 석방했으니 설사 공격 과정에서 탈출한 생존자에 의해 침공 사실이 누설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요동아문측에는 어떻게 해서든 후금의 공격 사실이 전해질 수 밖에 없었다.
비록 화친에 관련한 서한을 보내긴 했지만, 당연히 누르하치로서는 그것만 믿을 수는 없었다. 그는 명군의 추격 가능성을 고려해야만 했다. 그런데 군대를 나누지 않고 한 덩어리로 움직이자면 기동성도 느려지는데다가, 자칫 정말로 명군이 추격해 와서 교전이 벌어지게 된다면 전리품과 포로들의 존재 때문에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싸울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한 부대에게는 포로들과 전리품을 이송하게 하는 임무를 맡기고 선행하여 허투 알라로 이동하게 하고, 본인은 전투부대와 함께 후방 지역에 남아 적성방향을 견제하며 그들의 뒤를 지키려 한 듯 하다.
여기서 누르하치와 함께 한 것으로 확실히 파악되는 버일러는 대 버일러 다이샨과 두이치 버일러 홍타이지 두 명이다. 당시 포로와 전리품을 이송하는 부대의 규모가 누르하치가 대동한 후방견제부대보다 더 많았음을 생각해 보자면, 아마도 아민, 망굴타이등의 호쇼이 버일러들은 더불어 선행하여 복귀한 것으로 유추된다. 선행해서 복귀하는 부대 역시도 결국 버일러들의 통솔하에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삽화 출처 : 칼부림. 좌 : 다이샨, 우 : 홍타이지
누르하치가 다이샨과 홍타이지 두 명을 자신과 함께 하도록 한 것은 의미심장한데, 아마도 위험한 임무가 될 수도 있던만큼 가장 믿음직하다고 할 만한 두 명을 자신과 동행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3
허투 알라로 복귀하는 부대와는 달리, 누르하치와 그가 인솔하는 군대는 복귀 부대가 향한 방향의 반대 방향인 명과의 국경선쪽으로 다시 움직였다.4즉, 명의 추격부대가 접근해 올 수 있는 쪽으로 움직인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누르하치가 선행해서 돌려보낸 포로 이송부대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그들과의 거리를 벌리는 한 편, 가능하다면 전력운용을 보다 용이하게 할 수 있는 곳을 전장으로 삼으려 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 움직임을 보인 누르하치는 당일 야간을 국경 인근에서 숙영했다.
하룻밤을 후금과 명의 경계 근처에서 숙영한 뒤인 21일에도, 누르하치는 얼마간 본래 숙영하던 곳에 머물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보다 자세히 서술하겠으나 누르하치의 군대가 이 날 움직인 거리는 고작 20여리에 불과한데, 그렇다면 누르하치는 21일 날이 밝아서도 꽤 긴 시간동안 본래의 숙영지에 머물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명군의 역습을 경계하여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후방에서 대기하던 것으로 판단된다.
21일 오후쯤, 누르하치는 기야반으로 철수한 16일로부터 6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명의 요격군이 관측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후방 지역의 위협 가능성이 대부분 사라졌음을 확인, 군을 돌려 본인 역시도 허투 알라로 복귀하려고 했다. 이제 무사히 허투 알라로 복귀만 하면 명을 상대로 한 누르하치의 첫 전역은 완벽한 승리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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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주실록』 천명 3년 음력 4월 20일
2. 이에 대해 만문노당과 청태조계실록은 후금군의 규모를 처음부터, 혹은 기록 도중에 과장했다. 만문노당의 기록을 모토로, 선행 복귀 병력은 6만, 누르하치 휘하의 군대는 4만으로 서술되었다. 그러나 실제 운용병력은 이와 달랐다고 추정된다. 현재시점의 운용 병력은 후술.
3.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본인의 구사들, 다이샨의 구사들, 홍타이지의 구사로 후방부대를 편성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역시도 후에 쓸 글에 다루고자 한다.
4.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4월 20일, ha i beye, duin tumen cooha be gaifi, fakcafi ing gurime julesi aššafi jasei jakade dedu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