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주는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습격해 죽이고,
관우에게 하비성(下邳城)을 지키며 태수의 일을 행하도록 하고(行太守事) 자신은 소패(小沛)로 돌아갔다.
건안 5년(200), 조공(曹公-조조)이 동쪽을 치자 선주는 원소(袁紹)에게로 달아났다.
조공은 관우를 사로잡고 돌아와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매우 두텁게 예우했다.
하비성 전투 패
원소가 대장(大將) 안량(顔良)을 보내 동군(東郡)태수 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공격하자,
조공은 장료(張遼)와 관우를 선봉(先鋒)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병거에 달린 대장기 덮개)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해서
달려가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刺)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제장(諸將)들 중 당해 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조공(曹公)이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했다.
vs 안량 승
유비와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따로 관우를 보내 북쪽길을 끊어 놓았다.
이통은 부대를 인솔하여 관우를 공격하고 말에서 내려 방책을 걷어내고 포위권으로 진입하여 싸우면서 앞으로 나가 조인의 군사를 구출했는데,
무용이 여러 장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이통전
vs 이통 패
악진樂進과 더불어 심구尋口에서 관우關羽를 격퇴하고 전공을 올려 연수정후延壽亭侯에 올랐고, 토역장군討逆將軍의 관위가 더하여졌다.
-문빙전
악진을 남겨 양양(襄陽)에 주둔시켰다.
(그 후) 관우, 소비(蘇非) 등을 모두 패주시켰고, 남군(南郡) 일대 산과 계곡에서 거주하던 만이(蠻夷)들이 악진에게로 와서 투항했다.
-악진전
vs 악진 + 문빙 패
또한 관우의 치중을 한진漢津에서 공격, 그 배를 형성荊城에서 불태웠다.
-문빙전
vs 문빙 패
관우가 군사를 이끌고 번(樊)에서 조인(曹仁)을 공격했다. 조공이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돕게 했다.
가을, 큰 비가 내려 한수(漢水)가 범람하고 우금이 이끌던 7군(七軍)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했고, 관우는 또 장군 방덕(龐德)을 참수했다.
-관우전
vs 우금 + 방덕 승
한편, 조공은 서황을 보내 조인을 구원했고 관우가 이를 이기지 못하자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관우전
서황은 위두의 둔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양성(揚聲-널리 소문을 퍼뜨림)하고는 은밀히 사총을 공격했다.
관우는 사총이 곧 무너지려 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보기 5천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서황이 이를 들이쳐 패주시키고, 포위망 안까지 깊숙이 추격하여 격파하니 (적군들은) 스스로 면수(沔水)에 투신해 죽기도 했다.
-서황전
vs 서황
패
여몽이 성에 들어가 점령하고, 관우 및 장수와 병사들의 가족들을 다 잡았으나, 그들 모두를 위무(慰撫)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민가에 들어가거나 약탈하는 바가 없게끔 약속하였다.
여몽 휘하의 병사 하나는 여남(汝南) 사람이었는데, 민가의 삿갓(笠) 하나를 가져다, 관의 갑옷(鎧)을 덮었다. 관의 갑옷이 비록 공적인 것이기는 하나, 여몽은 오히려 군령을 어겼으니,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법을 폐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참수했다. 이에 군중에 떨며 두려워해 길에서도 흘린 것을 줍지 않았다.
여몽은 아침저녁으로 친근하게 노인들의 안부를 묻고 위로하고, 부족한 것을 묻고, 병에 걸린 자에게는 의약을 주고, 춥고 배고픈 자에게는 옷과 양식을 내려주게 했다. 관우의 관부에는 재물이 저장되어 있었지만, 모두 봉하여 닫아놓고, 손권이 오길 기다렸다. 관우가 돌아오면서 길에서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는데, 여몽은 번번이 그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성중을 두루 다니게 하며, 집집마다 묻게 하고, 혹은 손수 글월을 써서 신의를 보였다. 관우의 사람이 돌아오자, 사적으로 서로 참여하여 묻고는, 모두 자기 집에 무탈하다는 것을 알고, 평시보다 과하게 대우받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관우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여몽전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거하고 관우 사중(士衆-사졸)들의 처자를 모두 사로잡자 관우군이 마침내 흩어졌다.
-관우전
vs 여몽 패
이에 맥성(麥城)으로 달아나 서쪽으로 장향(漳鄉)에 이르자, 모두 관우를 버리고 항복하였다.
손권은 주연(朱然)과 반장(潘璋)에게 그 지름길을 끊게 하니, 곧 (관우)를 보두 붙잡고, 마침내 형주는 평정되었다.
-여몽전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역격(逆擊)하고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關平)을 임저(臨沮-형주 남군 임저현)에서 참(斬)했다.
-관우전
반장의 부하 사마(司馬) 마충(馬忠)이 관우와 관우의 아들 관평(關平)과 도독(都督) 조루(趙累) 등을 붙잡았다.
-반장전
vs 주연+반장, 마충 패
모아놓으니 진짜 2승이네
무력 원툴이였는가
용맹하다는건 평가에서 꾸준히 나오니 그건 맞지 않을까
관우 전투는 대부분 중요한곳에 버티어줘 하는곳에 남겨두고감 하비는 본군인 유비자체가 패주했었고 강릉전투는 여러개로 쪼갰는데 유비군 주력은 조인과 싸우고 있었고 관우는 수천명인 상황 익양대치는 원래 장수랑 병사 있던거 유비가 촉에서 싸우면서 다 빼간 상황.. 마지막 번성은 아군 지원 안옴 위나라 역습에 오나라 배신이라.. 애초에 그냥 무력만 원툴이였으면 여포mk2 취급이였겠지
건업 ip 검거
뭐뭣
조조가 두씨 먹음- 패 없어서 다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