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의 블로그 글 및 꺼무위키 '시민 불복종 운동' '저항권' 등의 항목에서 가져온 내용임을 먼저 밝힘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은, 인도 국민 회의와 마하트마 간디가 중심이 된 민족 운동 중 하나로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고 독립을 얻어내기 위한다는 목적이 있었음.
어떠한 폭력도 사용하지 않고 싸워 자유와 평화를 얻어내려는 목적이 있으며
상대를 죽이거나 해치지 않고
정부가 만든 법을 어김으로써, 스스로 불이익을 감내하며
정부의 정책을 바꾸는 행동 방식을 보임.
'불복종' 이라는 개념은 미국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라는 철학자에 의해 나옴.
1800년대 전반기의 미국 정부의 입장은 노예제도는 뭐 당연하고 서쪽으로 팽창하려고 했음.
그리고 소로는 이에 반발하는 이들 중 한명이었으며, 인두세를 내는 것을 6년간 거부하고 하룻밤 수감됨.
이의 가장 큰 특징 및, 비슷한 개념인 '저항권' 과의 가장 큰 특징은
저항권은 법에 의거하지만 시민 불복종은 법을 넘어서는 것도 불사한다는 것과
또한 저항권은 법에 의거하여 폭력을 용인할 수 있으나 시민 불복종은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거임.
이는 소로가 제시하는 불복종의 특징에서 기인함.
'개인의 양심과 도덕적 정당성이 다수결보다 우위이다' 라는 관점이 시민불복종의 기반에 서 있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소로의 불복종권에서 소수파는 다수파의 정의 관념에 '호소' 함.
이 때문에 불복종운동의 최종목표는 여론의 전환이며, 여론의 전환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비폭력이 발생하는거임.
목적이 정당해야 하고
자신은 처벌을 각오해야 하며
비폭력적이어야 하고
최후의 수단이어야 하며
개인이 아닌 공공을 위한 것
그것이 불복종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음.
간디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인도의 자이나교 사상을 접목했음. '불살생'과 '무해' 개념이 그거임. 무엇도 죽이거나 해치지 않는다는 것.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은 '사티아그라하 운동' 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정신의 힘에 의한 진리의 승리' 라는 뜻을 가짐.
즉 자기희생, 정신적 사랑을 통해 폭력을 휘두르는 상대방이나 악한 지도자들의 마음을 바꾸어 굴복시킨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
인도의 힌두교 사상에도 폭력을 거부하는 개념이 있었기에 인도 국민들에게 이는 널리 퍼지게 됨.
간디는 진리의 달성이라는 면에 있어서 도덕적 자아실현 과정에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자아실현은 아힘사(비폭력) 과 연결되어 있다 봤음.
또한 자아실현은 사랑과 인고의 법칙이기에, 아힘사를 믿는 이들은 의식적으로 인고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또한 자기희생조차 불사하는 각오를 가질 필요가 있다 함.
이 때문에, 간디는 '자기욕구의 의식적/자발적 자제, 안락의 거절, 금욕적 생활방식의 수용' 이 필요하다 가르침.
동시에 소로의 불복종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윤리적, 도덕적 기준선을 매우 중요시 여겼고
수단은 인간의 윤리적 의지의 표현이기에 결과보다 우위에 있다고 선언하였음.
영국: 허미싑펄;
실제로 영국은 이 점에 대해 위협을 느꼈음.
봄베이 총독인 로이드 경은 간디의 저항 운동이 '공포를 안겨주었으며, 거의 성공 직전이었다' 고 인정했음.
그러나 본질적으로, 간디가 원하는 방식으로는 운동을 통제하는 것이 여려웠고, 영국은 이 점을 찌를 수 있었음.
간디는 납세거부조차 이야기할 수 없었는데, 간디의 불복종 운동은 민족 운동이었고, 납세거부는 그 민족적으로 '인도의 토지 소유자' 에게 지대를 납부하지 않는 사태로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임. 이 때문에 투쟁으로 전환되는 것도 힘들었음.
정의에 호소하고, 여론을 전환하는 설득을 해야 하는데,
그 설득에 필요한 행동력을 이끌어내기 힘들었던거임.
그나마 문제가 이 뿐이었으면, 비폭력 불복종 운동 자체가 매우 거대했던 바를 보았을 때 나름 괜찮았겠지만....
(1919년 암리차르 학살을 묘사한 그림)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에 따라 인도인들은 평화적으로 영국에 저항했지만 결국 폭력 사태를 완전히 막을 수 없었기도 했음.
묘사되는 바를 보면 알겠지만 불복종운동은 스스로를 견제하고 통제하는 수행에 가까웠으며
외적이든 내적이든 깨지기 쉬운 상태였다는 문제가 있었음.
22년 2월 차우리 차우라 마을에서는 경찰이 시위대와 난투극을 벌이고 총을 쏘자, 시민들이 경찰서를 불태우고 22명의 경찰을 죽임.
경찰들은 그 보복으로 12명의 농민을 죽였고, 저항운동 전체가 주춤하게 됨.
물론 이후에도 비폭력 불복종 운동은 전개되었으나 주춤한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고, 영국 정부는 운동을 마음껏 탄압하고 간디를 체포하였음.
심지어 간디 스스로가 스스로를 종교적으로 중립으로 두려고 애썼어도, 결국 간디 자신도 자이나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인도 전체의 민족적으로도 종교의 영향이 존재하며
종교적인 분열에 의한 결집력의 약화도 문제가 되었었음.
하지만, 행동력의 약화, 폭력성 통제의 어려움, 종교분열로 인해 문제가 되었다 하더라도, 비폭력 불복종 운동은
거대집단에 대한 저항이 반드시 폭력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음.
1930년의 소금 행진은 22년과 같은 수많은 비극과 다양한 불리한 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폭력 불복종 운동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음
먼저, 백인 중심의 공무원 체계가 흔들렸음.
당연히 영국에서 인도의 거리가 너무 멀고 싫다는 사람 잡아올 수도 없으니 백인 비율이 감소한 건데
한편으로는 비폭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때문에 영국 식민정부에 대한 불신이 너무 거대해져서 영국 정부가 인도를 통제하기 힘들어지기 시작함.
1930년 시점에서 소작농들마저 지세를 내는 걸 거부하자 인도 식민지의 핵심 세원인 토지세까지 감소하고
백인 비율이 감소하면서 자연스레 인도인들이 장악하는데 성공한 지방정부에서는 영국인 징수인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펼쳐버림.
결과적으로 이러한 압박에 영국은 1935년 인도의 독립적 의회 구성을 허가함.
물론 혐성영국 답게 식민지에서 분열이 일어나도록 최대한 유도했기에
인도 국민회의(간디, 네루) 와 무슬림 연맹은 별로 좋게 보지는 않았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고
국민회의는 1937년 치뤄진 첫 의원선거에서 11개의 지방정부 의회들 중 7개의 의회에서 과반수로 압승하게 됨.
비폭력 불복종은 설득의 중요성을,
그리고 그 설득을 하기 위한, 피억압자 본인이 스스로 가져야 할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함.
소로의 불복종 개념, 즉
목적이 정당해야 하고
자신은 처벌을 각오해야 하고
비폭력적이어야 하고
최후의 수단이어야 하며
개인이 아닌 공공을 위한 것
이러한 개념을 유념하지 않으면
비폭력 불복종이라 할 수도 없을 것이고, 그것이 효과적이라고 할 수도 없을 거임.
잘읽었어
사실은 최근에'우리는 피해자인데 언제까지 고결해야 하느냐' 라고 말한 걸 들은 게 너무 마음에 걸려서 작성하게 됨. 피해자들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래서 그것을 놓는 것이 '용인' 된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그 놓는 것이 피해자들에게 있어서 옳은 일은 아니라는 것을 비폭력 불복종에서 찾고 싶었음. 심지어 법을 어기는 수준으로 '불복종'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설득을 위한 것, 공통선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
우리나라도 위대한 비폭력 운동이 있었지.
3.1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