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번째 서번트라고?"
"네.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인가요?"
늦은 밤, 윤아의 집. 지금까지의 경과를 보고할 겸 아침에 있었던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그녀는 시계탑의 엘멜로이 2세와 화상채팅을 하고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 일반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경우의 수는 이전 성배전쟁의 서번트가 모종의 경로로 수육하여 다음 성배전쟁에 난입한 경우네. 실제로 후유키의 5번째 성배전쟁에서도 모종의 경로로 이전 번 성배전쟁에서 수육했던 서번트가 난입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국에서의 성배전쟁은 이게 처음이잖아요."
"그렇지. 때문에 우선적으로 가장 높은 경우의 수가 배제된다. 그렇다면 남는 경우의 수는 대개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것들 뿐이라는 게 문제겠군."
"어떤 경우인가요?"
엘멜로이 2세는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어나갔다.
"하나는 서로 다른 2개의 성배전쟁이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 아종성배전쟁 중에서 그러한 사례가 있었다고 하네."
"그러면 성배가 2개였나요?"
"거기까지는 나도 잘 몰라. 그저 그런 사례가 있었다는 기록만 확인했으니까."
"다른 경우는요?"
"...이건 부연설명이 필요한데... '억지력'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억지력... 이요?"
처음 듣는 개념에 윤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엘멜로이 2세는 알겠다는 듯 가볍게 손사래를 치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억지력이라는 것은 이 세계를 존속시키기 위한, 세계가 가진 힘. 세계 그 자체나 인류의 미래에 위협을 받았을 때, 그 요소를 배제하기 위해 개입하는 힘이지. 자세히 설명하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 이 정도로 간단히 설명해주겠네."
"네, 괜찮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서, 다른 경우는 이 억지력이 개입하여 서번트를 파견한 경우다. 다만 이 경우라면..."
엘멜로이 2세는 망설이듯 뜸을 들였다. 윤아는 그가 할 얘기가 무엇인지 알아채고 말을 대신 이어나갔다.
"...이 성배전쟁이 세계나 인류의 위협이 될 정도의 사안... 이라는 얘기인 거죠?"
윤아의 답변에 엘멜로이 2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빛이 처음보다 다소 어두워진 것이 모니터 너머에도 보였다. 엘멜로이 2세는 나지막히 욕설을 내뱉었다.
"가능하면 후자의 이유가 아니었으면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장담하기 힘들겠군. 위험할지도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수고해주게."
"네. 걱정 마세요. 교수님의 조언을 받아 소환한 제 서번트는 이 나라에서도 이름 높은 대영웅급 인물이니까."
엘멜로이 2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화상채팅을 끄기 위해 화면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참. 깜빡하고 말하지 않은 것이 있네."
마찬가지로 화상채팅을 종료하려던 윤아는 그의 말을 듣고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자네의 마술을 보조할 마술예장이 완성되었네. 국제우편으로 보냈으니 수일 내로 도착할 예정이네."
"아, 드디어..."
"전달할 사항은 이상. 그럼 , 다시 힘내도록."
화면이 꺼지고, 윤아는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봐?"
방에서 나오자 어느새 돌아온 라이더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소파 앞 테이블엔 어디서 사 들고 왔는지 치킨과 맥주가 놓여 있었다.
"왠일로 피시방에 안 들르고 곧장 여기로 왔어?"
"그냥... 좀 생각이 많아져서."
라이더는 맥주캔 하나를 그녀에게 권했다. 윤아는 피식 웃으면서 캔을 받아들고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을 캔을 따고 가볍게 캔을 부딪쳤다.
"마술예장이 완성되어서 곧 온다고 하더라고."
"오, 좋은 소식이네 그거? 네 마술은 그 체계 때문에 밤엔 쓰기 힘들다고 그렇게 불평하더니만."
"그랬지. 덕분에 너한테 전투 전부를 일임할 수밖에 없었지만, 앞으로는 다를거야. 나도 전력으로 보조해줄 수 있으니까."
윤아는 맥주를 들이켰다. 라이더는 그녀의 모습을 잠시 보다가 맥주를 마시고 말을 이어나갔다.
"광화문 광장이었나, 거기에 들렀다 왔거든."
치킨을 들고 한 입 뜯으려는 윤아는 멈칫하더니 치킨을 내려놓고 라이더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거기에?"
"어. 현대에 소환되면서 지식을 부여받아서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직접 봐 두는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기분은 어땠어?"
"글쎄... 뭐라고 말해야 할까......"
라이더는 잠시 침묵하면서 치킨을 하나 집어들고 한 입 뜯어물고 말을 이어나갔다.
"......묘하더군. 그 동상...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라."
라이더는 단숨에 맥주를 들이키더니 순식간에 캔을 비우고 새 캔을 열었다. 윤아는 조용히 치킨을 먹으면서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뭐, 이번 성배전쟁에 불려온 영령 중에 이 나라를 보고 감회에 젖지 않을 인물이 누가 있겠냐만 말이지... 역시 그 동상이 이 나라의 중심에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렇겠지. 이해해."
윤아는 자신이 집어들려던 치킨을 다시 집어들고 한 입 물었다. 한 조각을 전부 먹을 즈음, 문득 생각나서 윤아는 라이더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걸 사 온 거?"
"뭐, 그런 것도 있고. 현대의 음식이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고생하시는 우리 마스터한테 일개 서번트가 해 줄 건 싸우는 거 말고는 이런 것 밖에 없잖아."
"뭔 낯간지러운 소리를..."
윤아는 피식 웃으며 닭다리를 잡고 한 입 베어물었다. 그 순간...
윤아의 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사역마가 뭔가를 감지했어."
윤아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방금 전까지 엘멜로이 2세와 화상채팅을 하던 노트북이었다. 윤아는 노트북을 열고 뭔가 조작을 했다. 잠시 후, 모니터 화면에 영상 같은 것이 출력되었다. 영상 안에는 사람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있었다.
"마술로 현대기기에 접속한 거야?"
"좀 편법을 썼지. 사역마의 시야를 컴퓨터로 볼 수 있도록 말이야."
윤아는 추가적으로 조작을 가했다. 영상이 줌인되더니 영상 안의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화면이 커지고 선명해졌다.
"이건..."
한 사람은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들이 봤던 그 얼굴이었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은 그들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분위기와 인상착의로 정체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거친 인상의 낡은 두루마기를 입은 남성. 딱 봐도 현대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남자의 한 손에는 대나무로 만든 창이 쥐어져 있었다.
"버서커랑..."
"랜서인가."
* * *
랜서의 계획은 간단했다. 자택에 있는 국회의원 박항진을 습격하여 사살하는 것. 애초에 마스터와 처음 이 일을 하기로 합의할 때부터 목표로 두고 있던 인물 중 하나였던만큼 사무실이나 자택의 위치는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해물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 앞에 이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봐, 형씨. 이 밤중에 어딜 가시나?"
이 시대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오래된 가죽 옷. 그리고 같은 서번트라면 느끼지 못할 리 없는 마력의 기척. 랜서는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담담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버서커 서번트인가."
"그쪽은 보아하니 랜서 서번트겠구만. 일단 초면에 뭐 하나 먼저 물어보지."
버서커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의 앞에 펼쳐보였다.
"혹시 이 여인을 본 적이 있나?"
그것은 그가 언제나 처음 조우하는 상대에게 의례적으로 펼쳐 보였던 여성이 그려진 두루마리였다. 랜서는 그 그림을 대충 한 번 보고 신경쓰지 말라는 투로 답했다.
"본 적 없소."
"이봐, 이봐. 그렇게 까칠하게 굴지 말라고. 어차피 마스터한테 예속되어 있는 종놈이나 마찬가지인 건 피차 같은 처지 아닌가."
"쓸데 없는 참견 마시오. 이 쪽은 볼일이 급하니 그대를 상대하고 있을 여유도, 상대하고 싶은 마음도 없소."
랜서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버서커를 무시하고 자신의 목표가 있는 곳으로 발을 옮기려고 했다. 그 순간, 그의 목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닿았다.
"미안하지만 이 쪽은 그 쪽의 볼일에 용건이 있어서 말이야."
어느 새 단검을 꺼낸 버서커는 자신의 옆으로 지나가려는 랜서의 목에 단검을 대고 있었다. 랜서는 버서커를 잠시 곁눈질로 노려보더니 조용히 자신의 손으로 단검을 내리고 뒤돌아 걸어갔다.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는 모습에 버서커는 속으로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갔을까, 랜서는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대에게 몇 가지 물어보지. 그대의 마스터가 박항진인가?"
"...그 양반은 그저 내 마스터랑 계약 관계일 뿐이야. 이쪽은 마스터의 명령 때문에 잠시 그 양반을 지키고 있을 뿐이고."
"그렇다면 그대나 그대의 마스터나, 결국 박항진의 개나 마찬가지일 뿐이군."
랜서의 말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버서커는 순간 움찔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거 아가리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쇼. 난 마스터의 명령에 따를 뿐이고, 마스터는 저 양반이랑은 계약 관계일 뿐이니까. 방금 전 말했을텐데? 어차피 그쪽이나 나나 마스터한테 예속되어 있는 종놈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대는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오. 나와 마스터의 관계는 뜻을 함께하는 동지이지, 그대와 같은 주종관계는 아니니."
랜서는 말을 마치더니 전투 태세를 갖추듯 양손으로 손에 든 죽창을 쥐었다.
"그대가 나를 방해할 생각이라면, 그대 역시 배제할 수밖에 없소. 무의미한 살생은 하고 싶지 않으니 길을 터 줄 것을 마지막으로 부탁하겠소."
버서커는 잠시 랜서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진명을 알 수 없는 상대였지만 그를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속에서 끓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버서커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라고. 당신 낯짝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면서 당장에라도 그 모가지를 따 버리고 싶은 기분이긴 하지만, 이쪽도 불필요한 살생은 피하는 방침이라 말이지. 그러니까 지금 조용~히 내 앞에서 사라져주시라고. 쫓아가진 않을 테니까."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겠군."
두 서번트 사이에서 침묵이 감돌았다. 들리는 것은 오로지 바람소리 뿐이었다. 그리고 불던 바람이 멈추었을 때,
"배제하겠소."
먼저 달려든 것은 랜서였다. 버서커는 씨익 웃으며 장검을 함께 꺼내들었다. 제 아무리 서번트의 무구라고 해도 죽창은 죽창일 뿐. 그렇게 생각하면서 버서커는 양손에 쥔 검으로 랜서의 창을 맞이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무기가 부딪쳤다.
"...어랍쇼?"
두 무기가 부딪친 찰나의 순간, 단순히 대나무로 만든 조잡한 무기라고 하기에는 생각 외로 묵직하고 날카로운 타격감이 그의 손에 느껴졌다. 예상 외의 감각에 버서커는 살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내 창을 단순한 죽창이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오."
"...하! 과연, 영령의 무기라 단순한 죽창은 아니다 이 말이시구만."
버서커는 단검을 역수로 쥐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랜서는 창을 왼손으로 바꿔쥐고 다시 한 번 달려들었다. 그의 창이 버서커의 몸을 노리고 곧장 돌격해왔으나, 버서커는 장검으로 창을 쳐내며 그대로 랜서의 몸으로 달려들었다. 랜서의 죽창이 지면에 부딪치는 충격은 아스팔트가 파일 정도였으나 그의 창은 멀쩡했다. 버서커의 말대로 대나무로 만든 창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랜서의 몸으로 파고든 버서커는 그대로 팔꿈치로 랜서의 복부를 가격했고 뒤이어 주먹을 쥔 손등으로 그의 안면을 가격하고 발차기로 랜서를 밀어냈다. 가격당한 위치가 복부인 만큼 상당한 타격을 입었겠지만, 랜서는 잠시 주춤할 뿐이었다. 곧장 뻗었던 죽창을 빠르게 끌어들이며 짧게 잡아 다시 한 번 버서커의 옆구리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버서커는 가뿐히 창을 피하며 몸을 뒤로 뺐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랜서는 오른손으로 창을 길게 잡아 휘둘렀다. 아슬아슬하게 창은 버서커의 눈 앞을 지나가며 그의 앞머리카락만 살짝 베어낼 뿐이었다.
"니미럴, 죽창 주제에 쓸데없이 날카로워서 성가시게 하는구만."
랜서는 다시 죽창을 양손으로 쥐고 달려들었다. 그의 창이 뻗어 나오자 버서커는 두 검을 교차해서 랜서의 창을 막아냈다.
"그래봤자, 죽창은 죽창일 뿐이지만."
버서커는 양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바깥쪽에 걸린 단검과 안쪽에 자리잡은 장검의 칼등이 교차하며 순식간에 랜서의 창을 박살내었다. 자신의 창이 부서진 것을 본 랜서는 다소 놀란 기색을 얼굴에 내보이면서 뒤로 물러났다.
"이걸로 댁은 무기가 없고, 맨주먹으로 싸워 봐야 나한테 승산은 없고. 지금이라도 도망친다면 살려는 드릴게."
랜서는 부서진 자신의 창과 버서커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다, 짧게 훗 하고 웃더니 창이었던 대나무 토막을 버렸다. 그의 손에서 떠난 대나무 토막은 먼지가 되어 허공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무기가 없다고, 누가 그랬소?"
랜서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땅에서 갈색 파문과 함께 무언가가 솟아올라왔다.
"...뭐?"
버서커는 살짝 놀랐다. 아무것도 없었던 맨바닥에서 튀어나온 것은 방금 전 그가 부쉈던 것과 똑같은 또 한 자루의 죽창이었다. 랜서는 죽창을 뻗은 손에 쥐고 다시 자세를 취했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이 죽창은 부숴도 부숴도 끝없이 나올 것이오."
"호오, 그러셔?"
랜서의 말에 버서커는 방금 전까지 짓고 있던 여유로운 웃음을 싹 걷어냈다. 랜서와 마찬가지로 무감정해보이면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난 나와도 나와도 박살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