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들으면 좋은 BGM - The Knight of Rebellion (Fate/Apocrypha 모드레드 테마곡)
버서커는 랜서와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다. 마스터를 통해 랜서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랜서와 직접 마주칠 일도 없었고 어쩌다 그를 마주칠 건덕지도 전무했다. '랜서가 동맹자를 노릴 수 있으니 주시하라.'라는 마스터의 지령에 의해 박항진을 지키고 있던 중 주인의 예측대로 랜서와 부딪친 지금이 그와 처음 마주친 것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상대의 진명도, 정체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어째서일까. 상대를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알 수 없는 불쾌감과 짜증이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불쾌감은 분노로 바뀌었고, 버서커는 주인의 방침대로 살상은 최대한 피하려 하면서도 서서히 분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창을 부순다. 새로운 창이 나오면 또 부순다. 부수고 또 부순다. 끝없이 부순다. 죽창 하나를 부술 때마다 그의 마음 속의 분노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또다시 나타나는 죽창을 보면 그 이상의 분노가 다시 끓어올랐다. 어째서 이 자는 이렇게 끈질기게 자신을 물고 늘어지며 화나게 하는가. 버서커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면서도 점점 그 이유와는 상관없이 그저 이 역겨운 사내를 자신의 눈 앞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은 충동이 샘솟았다.
"지저분하게 생겨먹은 걸 보아하니 천한 종놈이나 그런 출신 같은데, 노비 주제에 더럽게 사람 성가시게 하는구만."
자신이 부순 창의 수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부수고 랜서가 다시 새로운 창을 꺼내는 모습을 보며 버서커는 말했다. 이전에 상대했던 라이더만큼의 난적은 아니었고, 전투 기술은 명백히 자신의 우위였음에도 지친 것마냥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노비? 지금 나보고 노비라 했는가?"
버서커의 말을 듣고 랜서는 표정을 살짝 일그러트리며 대꾸했다.
"이거 하나는 말해두지. 나는 노비가 아니오. 그저 평범한 백성 중 하나일 뿐이지."
"그렇게 지껄이는 새끼들은 지겹게도 봐 왔어. 네놈도 그런 새끼들이랑 다를 거 없다고."
버서커는 무기를 고쳐잡고 달려들었다. 랜서는 한 손으로 죽창을 잡아 버서커의 공격을 막아내며 다른 한 손을 지면으로 뻗었다. 또 한 자루의 죽창이 지면에서 솟아나왔다. 랜서는 그것을 잡고 기습적으로 버서커의 옆구리를 노렸다. 버서커는 잽싸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다.
"씨.발!"
나지막히 욕설을 내뱉으면서 버서커는 돌려차기로 랜서의 옆을 가격했다. 공격을 맞고 날아간 랜서는 벽에 부딪치기 전에 죽창을 땅에 꽂고 그걸 잡아 균형을 바로잡았다. 균형을 잡자마자 랜서는 양손에 든 창을 차례로 버서커를 향해 던졌다. 버서커도 아직 균형을 회복하지 못했기에 쉽게 피할 수 없을 것이었으나, 놀랄만한 반응 속도로 첫번째로 날아온 창을 장검으로 반으로 가르고 뒤이어 날아온 창을 단검을 쥐고 있던 손으로 잡아챘다. 버서커는 잡아챈 죽창을 곧장 랜서를 향해 던졌다. 랜서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죽창을 새로 만들어낸 죽창으로 막아내었다. 두 창이 부딪치면서 동시에 부서졌지만, 랜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새 창을 지면에서 뽑아내었다.
* * *
"끈질기네."
윤아 입장에서도 랜서를 직접 보는 것도, 그의 전투를 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때문에 상대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스펙으로 저 정도까지 버티고 있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사용하는 무기, 생긴 것은 단순한 죽창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서번트의 보구급 물건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아스팔트까지 꿰뚫어버리는 정도의 내구력을 발휘하는 것도 보구 판정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지.
"저 자, 세이버하고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 같은데."
가만히 두 사람의 전투를 지켜보던 라이더도 한 마디 거들었다.
"무슨 의미야?"
"세이버는 내가 직접 싸우진 않았지만, 사야가 공의 경험으로 미루어본다면 지극히 방어에 특화된 서번트야. 온라인 게임으로 말하자면 전문탱커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겠지."
또 영문 모를 비유를 쓴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윤아는 계속 라이더의 말을 들었다.
"반면 랜서는 그 정도로 방어에 특화된 것은 아니지만, 버서커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고도 버티고 있어. 그러면서도 빈틈을 정확하게 파고들고 있고. 전문탱커는 아니지만 딜탱 정도 되는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렇다고 하기엔 지금까지 랜서가 제대로 된 유효타는 입히지 못한 것 같은데?"
"당연하지. 버서커 저 자의 전투력이 그 빈틈을 노리는 것까지 캐치하고 피하고 있으니까. 넌 마스터니까 대략 두 사람의 스펙 차이는 알 수 있지?"
"어. 사역마의 눈이라고 해도 서번트의 능력치를 못 보는 건 아니니까. 랜서가 압도적으로 불리하다는 건 알고 있어."
성배전쟁에 참가하는 마스터는 서번트의 스테이터스를 볼 수 있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스테이터스는 알파벳 랭크를 통해 보이는 반면,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스테이터스를 보는 케이스도 있다. 윤아는 후자로, 그녀는 서번트의 스테이터스를 불꽃의 형태로 보고 있어서 불꽃이 크고 밝게 타오를수록 스테이터스 수치가 높은 것으로 인식한다.
"불꽃의 크기가 다른걸. 세세하게 본다면 모를까, 전체적으로 본다면 버서커가 압도적으로 커."
"그치? 가뜩이나 기본 스펙도 딸린 랜서가 빈틈을 노려봤자 기본 스펙부터가 넘사벽인 버서커에게 유효타를 입힐 수 있을리가. 보구를 배제한 순수 전투력으로는 버서커 저 자는 이 성배전쟁에서 최상급이야. 내가 붙어봐서 알아."
그와 직접 교전해 본 라이더의 말이라 윤아는 신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라이더 역시 이 성배전쟁에서 전투력 측면에서는 최상급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만큼 윤아는 라이더의 경험에 비춘 의견은 적극적으로 수용할 가치가 있는 의견이었다.
"그렇다면 저대로 가봤자 랜서에게 승산은 없는 거잖아?"
"그건 또 모르지. 랜서가 딜탱이라고 말했지? 내 생각에 랜서가 버티고 있는 건 본인 스스로의 집념, 거기에 이어지는 저 자의 스킬 때문이라고 보거든."
"전투속행이나 그런 걸 말하는 거야?"
"비슷하겠지. 게다가 저 자, 본인의 신념에 흔들림이 없어. 자버프가 본인 특정 스탯에 영향을 받는데 그 스탯이 최고수치라 자버프 효과도 최대나 마찬가지인 셈이야. 버프에 의존하는 딜탱인데 그 버프 수치가 밸붕 수준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아, 거 영문 모를 소리 그만하고! 그래서 결론이 뭔데?"
윤아가 쏘아붙이자, 라이더는 섭섭한 듯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은 버서커가 몰아붙이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 전투의 겉만 보았을 때의 얘기라는 거야. 오히려 지금 심적으로 더 여유로운 쪽은 몰아붙이는 버서커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랜서겠지."
"그렇다면 저 싸움이 장기화된다면... 버서커가 오히려 불리해지겠네."
"어. 누군가의 난입이 없는 이상 둘 중 하나겠지. 버서커가 스스로 자멸하거나, 아니면..."
잠깐의 침묵 이후, 라이더의 말을 윤아가 이었다.
"...랜서의 보구 개방으로 결판이 나거나."
* * *
"좃도 없는 새끼가 존나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구만."
두 사람이 몇 번 더 합을 주고받고 나서 버서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능구렁이 양반도, 왜놈 양반도 이 정도로 개같진 않았거든? 근데 네놈은, 그 두 양반에 발끝에도 못 미치는 새끼가 끈질기기만 더럽게 끈질겨서 빡치게 하고 자빠졌단 말이야."
"...확실히, 난 그대보다 약하겠지. 그대가 싸웠던 다른 이들보다도 못할 수도 있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싸움의 승패가 결정난 것은 아니오."
버서커는 랜서의 말이 거슬렸는지 움찔했다. 그리고 비꼬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 양반아, 사람이 살다 보면 적당히 물러나고 포기할 때를 알아야 하는 법이야. 무작정 물고 늘어진다고 뭐가 될 것 같아?"
"옛말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이 있소. 포기하지 않고 나아간다면 비록 목표에 다다르지는 못할지라도 손에 쥐는 것이 있는 법이오."
"핫, 망상도 정도가 있는 법이야. 내가 댁같은 인간 하나 오랫동안 봐 와서 알거든? 그 새끼는 마지막에 어떻게 됐는 줄 알아? 결국 마지막까지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못 얻고 개죽음당했어. 댁이라고 다를 것 같지? 천만에 말씀, 댁은 모처럼 이 세상에 불려와서 개죽음당할거야."
버서커의 도발을 가만히 듣고 있던 랜서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대와 나는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기엔 서로의 거리가 너무 먼 것 같소. 어쩔 수 없군. 빠르게 끝을 보도록 하지."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찌를 것 같은 태세를 갖추고 있던 랜서는 그렇게 말하면서 전투태세를 해제했다. 그리고 죽창을 한손으로 잡고 똑바로 세우더니 그 자리에 정좌 자세로 앉아버렸다. 빠르게 끝을 보자는 말을 듣고 긴장하고 있던 버서커는 상대의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잠시 황당함을 느꼈다.
"이봐, 이봐. 설마 빠르게 끝을 보겠다는 게 그대로 목을 베어달란 얘기였어?"
버서커의 말에 랜서는 앉은 자세를 유지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 버서커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상대 쪽에서 전투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이쪽의 기회이리라. 버서커는 드디어 저 꼴보기 싫은 인간의 목을 딸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되기 시작했다.
"그래, 정 그렇게 나오신다면 기꺼이 목 따드리지. 바라시는대로 말이야!"
버서커는 단검을 집어넣고 장검을 양손으로 쥐고 랜서를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고, 몇 보 앞에서 버서커는 도약했다. 이대로 칼을 휘두르면 그대로 상대의 목은 떨어진다! 버서커는 그렇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앉으면 죽산이요.』"
"......!!!"
랜서가 나지막히 무언가 말한 순간, 버서커는 직감적으로 위기를 감지하고 허공에서 재빨리 몸을 비틀었다. 다음 순간, 그의 코 앞에서 무언가가 지면으로부터 솟아올라 지나갔다. 지겹게도 봐오며 부쉈던 것. 죽창이었다.
"이런 니미...!!"
그대로 버서커는 지면을 굴렀다. 그가 균형을 잡고 일어나려는 순간, 직감적인 위기가 또 한번 그를 덮쳤다. 제대로 몸의 균형을 잡을 틈도 없이 재빠르게 몸을 뒤로 빼자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 바로 아래에서 또 다른 죽창이 땅에서 솟아나왔다. 제때 피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꿰뚫릴 속도였다. 그가 몸을 피할 때마다 간발의 차이로 그가 있던 자리에 죽창이 그 자리에 있던 것을 그대로 꿰어버릴 기세로 솟아올랐다. 어느 정도 랜서와 거리를 벌리고 나니 더 이상 지면에서 죽창이 솟아오르는 일은 없었다. 방금 전까지 버서커가 지나왔던 자리는 그대로 솟아올라온 죽창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궤적을 표시하고 있었다. 연쇄적으로 이어진 기습적인 공격에 버서커는 더 이상 위기를 감지하지 않고 있음에도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뭐야 이거... 네 녀석..."
랜서는 그 자리에서 정좌 자세를 취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버서커는 깨달았다. 저 자가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이미 저 자의 보구가 발동되었다는 것을.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라.』 생전에 내가 가담하고 이끌었던, 나와 동지들의 운동을 그렇게도 부르더군. 우리가 앉아 있으면 꼿꼿이 선 죽창들이 대나무 숲을 이루고, 우리가 서 있으면 백의를 입은 농민들의 노습이 하얀 숲을 이루었다고 말이오."
"......동학 농민 운동......"
"그대는 말하였지. 무작정 물고 늘어진다고 뭐가 되는 것은 없다고. 그 말대로, 생전에 우리는 부정부패와 외세를 상대로 투쟁했고,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소. 그러나 나는 그것이 개죽음이었다 말하지 않소. 그대가 봤다시피 지금도 이렇게, 그 당시 함께했던 동지들이 지금도 내게 힘이 되어주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말이오."
버서커는 잠시 멍하니 랜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깨닫고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흐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한참을 미친듯이 웃어댄 버서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런 거였어. 어째서 그쪽 낯짝을 처음 볼 때부터 기분이 더러웠나 싶었더니만, 그런 거였구만."
버서커는 장검을 땅에 꽂고 허공에 크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장검 한 자루가 또 튀어나왔다. 두 자루의 장검을 양손에 든 버서커는 한쪽 칼끝을 랜서를 향해 겨누었다.
"이제 임무고 뭐고 집어치우겠어. 어디 여기서도 그 개같은 근성이 통하나 한번 보자고. 녹두장군, 전봉준 나리."
반도성배대전 - 10화. 녹두
몸은 죽창으로 되어있다...!!
11화 이후 랜서 프로필을 공개하면서 설명이 추가될 예정입니다만 랜서의 보구는 고유결계는 아니라 UBW보다는 극형왕 쪽과 비교하게 될 보구입니다.
기대하고있습니다!ㅎㅎ 언제나 잘 보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