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만큼은 이념과 프레임에서 벗어나 여야 간 책임 있는 결정을 하도록 연정(聯政) 수준의 토론과 협력을 해야 합니다.”
지난해 7월 발간된 김동연 경기도지사의 저서 ‘대한민국 금기 깨기’(쌤앤파커스)에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 나온다. 김 지사는 자신의 책에서 “협치가 이뤄지려면 이를 제도화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낮은 수준의 정책연합에서 높은 수준의 연립내각 구성에 이르는 ‘협치’로 발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당시 대선 출마를 꿈꿨던 김 지사는 아쉽게도 출마를 접으며 일보 후퇴했다. 하지만 주요 부처 장관과 위원회 위원장을 진보·보수 정당이 분할하는 낮은 수준의 정책연합은 그가 도백을 맡은 경기도에서 조금씩 가시화하고 있다.
◆ “중앙정부와 다른 경기도 보여주겠다”…尹정부 겨냥 독립 선언
그의 저서에서 언급된 ‘여·야·정 공통공약 추진위원회’ 추진이 그것이다. 지난 1일 도와 도의회가 참여한 소통·협치 기구인 ‘여·야·정 협의체’는 이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첫 회의에는 경제부지사와 도의회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 대표의원, 도 정무수석과 기획실장, 도의회 정책위의장 등 17명이 참석해 정치, 경제, 사회, 인사, 조직 등 도정 전반에 걸쳐 서슴없는 의견 교환을 다짐했다.
방점은 민생현안에 찍혔다. 협의체는 상·하반기 1회씩 정례회를 열고, 분기별 임시회와 현안에 따른 수시 모임도 갖기로 했다. 주요 정책과 조례, 예산안, 도의회 정책·전략사업 등을 놓고도 논의를 이어갈 계획이다.
이런 김 지사는 9일 “경기도를 지금의 국가 운영이나 국정 운영에서 조금 다른 지역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며 사실상 ‘정책 독립선언’을 했다. 옛 도지사 공관인 도담소에서 열린 경기도 민관협치위원 및 시민사회단체 대표들과의 오찬 간담회 자리에서다.
그의 발언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의중을 명확히 꿰뚫을 수 있다.
김 지사는 이날 “지금 돌아가는 국정 운영에 대한 여러 가지 난맥상, 잘못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중앙정부와 다른 경기도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어 “제가 경기도가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뀐다는 얘기를 하는데, 대한민국이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 늦게 정치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지금도 똑같이 생각한다”며 “대한민국 전체를 바꿔보려고 하는 시도를 경기도에서부터 해서 경기도가 바뀌면 대한민국이 바뀌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최근 지지율 롤러코스터를 탄 윤석열 정부를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진보·중도 진영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던 윤석열 대통령을 향한 도전장이자 차기 대권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도 풀이된다.
◆ 연정 수준의 협치 가능할까…여·야·정협의체 첫발
김 지사는 내년 예산안이 자신의 정책 구상을 구현할 첫 단추임을 밝혔다. “지금 잘못 가고 있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목소리를 내면서 정책과 실천으로 보여주려 한다”는 출사표였다.
이날 간담회는 민선 8기 민관 협치와 시민사회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간담회에는 최순영 공동부위원장 등 민관협치위원 7명과 송성영 경기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 등 김 지사의 우군이라 할 수 있는 시민사회단체 대표 8명이 참석했다.
최근 김 지사의 행보는 다소 앞서간다는 비판에 직면한 바 있다. 이태원 참사 직후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나오기 전 먼저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작은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 8일에는 경기도의 32개 기관을 동원해 500명 넘는 인원이 참여하는 대형 사회재난 예방 훈련을 전국에서 처음으로 실시했다. 수원의 한 대형 백화점에는 헬기 3대 등 85대의 장비가 집결해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이 벌어졌다. 경기도와 도 소방재난본부, 경찰, 한전, KT 등이 함께한 민·관 합동훈련이었다.
같은 날 김 지사는 도담소에서 여·야·정협의체 위원들을 만나 “안전과 민생, 기회에 힘을 모아달라”고 호소했다. 이날 간담회에서 그는 “여·야·정협의체는 민선8기 대한민국 광역 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이라며 “경기도를 바꿔서 대한민국을 바꾸자”고 발언했다.
앞서 지난 6일 도의회 민주당 청년의원들과의 간담회에선 “도전, 시도, 창의와 같은 청년의 힘이 경기도를 발전시키고 대한민국을 발전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일 ‘아래로부터의 반란’ ‘협치’ ‘기회’ 등 자신의 정치 철학을 퍼뜨리는데 집중하고 있다.
◆ 도의회와 협치는 여전히 ‘산 넘어 산’…내년 상반기 김동연 ‘리더십’ ‘정치생명’ 시험대
주사위는 던져졌다. 김 지사가 주장해온 ‘낮은 단계의 협치’는 이미 시동을 걸었고, 다소 느리지만 차분하게 정치적 구상도 하나씩 실현되고 있다. 다만,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되지 않으려면 보다 세밀하고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야 동수의 경기도의회는 전국 광역 지자체 가운데 가장 늦게 원 구성과 추경안 의결을 마친 뒤 최근에야 궤도에 올랐다. 김 지사가 ‘협치’를 외치는 가운데 역점사업인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플러스의 기본용역비 10억5000만원은 최근 해당 도 상임위원회에서 여야 동수인 6대 6으로 부결됐다. 도는 GTX 최적노선의 대안 제시를 위한 연구용역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도의회 국민의힘은 국토교통부 용역과 중복돼 예산과 행정력 낭비라며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GTX 플러스 용역비는 앞서 2차 추경안에도 편성됐지만, 지난달 도의회 심의 과정에서 전액 삭감된 바 있다.
또 다른 역점사업인 김 지사의 ‘기회소득’ 역시 예산 편성 과정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상태다.
이런 분위기에서 김 지사의 리더십은 내년 상반기쯤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를 전망이다. 자신의 정치생명을 가늠하게 만들 무대이기도 하다.
도 관계자는 “중앙정부와 국회가 알력을 빚는 가운데 경기도에선 느리지만 협치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며 “경기도를 바꿔 대한민국을 바꾼다는 구호가 내년쯤 구체화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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