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에 필요했던 혁신, 오픈월드로 나아간 ‘기어스 5’
수많은 게임과 영화, 소설이 방증하듯 이미 한 차례 완결된 시리즈를 되살리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한때 3인칭 슈터의 정점이자 Xbox 삼대장 필두로 활약한 ‘기어스 오브 워’도 이러한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에픽게임즈가 주도한 오리지널 트릴로지가 2011년 마무리되고 2년 후 피플캔플라이의 외전 ‘기어스 오브 워: 저지먼트’가 나왔지만, 원작의 열화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완성도로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참패했다.
그리고 MS Xbox 산하 스튜디오인 더 코일리션이 2016년작 ‘기어스 오브 워 4’로 배턴을 이어받았다. 슈터 장르의 손맛이나 일신된 기술력 면에서 만듦새가 나쁘지 않은 작품이었고,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몰입하며 즐겼다. 다만 탄탄한 기본기는 전작의 유산이고 정작 시리즈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던 강렬한 캐릭터와 스케일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잘 쳐줘야 절반의 성공이었다. 그래도 ‘저지먼트’를 떠올리며 이 정도가 어디야 싶긴 했지만.
더 코얼리션이 풀어내는 새로운 '기어스 오브 워', 그 두 번째 이야기.
이제 최신작 ‘기어스 5’ 출시를 목전에 두고 기자는 캐나다 밴쿠버에 위치한 더 코얼리션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로드 퍼거슨 대표를 비롯한 여러 개발자와 만나고 한국어 더빙이 적용된 ‘기어스 5’ 초반부를 시연할 수 있었다. 일련의 경험으로 느낀 바는 이들이 ‘기어스 오브 워’ 시리즈에 큰 야심을 품고 있으며 절반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더 먼 곳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과연 더 코얼리션은 위태로운 전설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수 있을까?
케이트와 로커스트,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기어스 오브 워 4’가 비판받은 서사적인 실패는 싱글 캠페인 전체가 장황한 프롤로그였다는 것이다. 전후 새롭게 개편된 COG 정부와 아웃사이더의 관계, 부활한 로커스트 스웜, JD를 비롯한 2세대 캐릭터 소개 등이 난립하다 막바지 즈음 갑작스레 케이트의 핏줄에 대한 떡밥을 투척하고 끝나버렸다. 인류의 명운을 걸고 싸우던 오리지널 트릴로지에 비하면 심각히 쪼그라든 스케일에, 다음 세대라는 녀석들이 하나같이 별 매력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아쉽지만 후대의 존재감이 떨어지는 것은 그냥 척 봐도 느낄 수 있다.
결국 모발을 전부 희생하고서야 터프가이로 각성하는데 성공한 JD.
긍정적으로 보면, 게임 하나를 통째로 예고편으로 썼으니 그 후속작은 한층 위대한 사건을 다룰 기회를 잡은 셈이다. 그리고 ‘기어스 5’는 실제로 빠르게 이야기의 본질로 접근한다. 십수년간 전세계 게이머가 셀 수 없이 많은 로커스트를 쏘고 갈고 터트렸음에도 여전히 그 기원은 불분명한 편이다. 관련 내용을 다룬 소설이 있다고는 하나 소설은 소설일 뿐이고 게임 내에서는 어쩐지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다들 군인이라 그런지 별로 관심도 없어 보이고.
사실 이는 에픽게임즈의 성향 탓인데, 로커스트에게 부여된 역할은 지저로부터 온 침략자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3편 엔딩에서 로커스트 여왕이 뭔가 누설하려다 마커스에게 난자당하는 장면은 이러한 개발 의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세계관 설명할 시간에 한 명이라도 더 죽이는 게임 업계의 ‘존 윅’이랄까. 덕분에 지난 13년간 나온 모든 ‘기어스 오브 워’를 클리어했음에도 아직까지 로커스트 여왕이 왜 그렇게 예쁜지 모르겠다. 알고 싶다, 미모의 비결!
예뻐지는 약이 있으면 여왕님 혼자 먹지 말고 버서커 누나도 좀 주지…
시골 소녀인줄 알았던 내가 알고 보니 이종족의 차기 여왕 후보!?
반쯤 농담이지만 기자는 에픽게임즈가 떠나며 로커스트의 설정에 대해 인수인계나 해줬을지 의문이다. 어쨌든 더 코얼리션은 이 부분에 집중했고, 직전 엔딩에서 암시한 바와 같이 ‘기어스 5’ 캠페인은 케이트와 로커스트의 기원을 골자로 삼았다. 여기에 (아마도 모발을 잃어버린 탓에)흑화한 JD와 새로운 동료, 적들이 한데 얽히며 사태는 점차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언제나 그렇듯 로커스트 문제는 백 마디 말보다 랜서 톱질 한 방으로 해결을 봐야 한다.
게임의 무대는 오픈월드로, 배를 타고 탐험하자
서사의 방향성이 ‘확실한 목표가 있는 임무’가 아니라 ‘불분명한 단서를 쫓는 탐험’이 됨에 따라 게임 구조도 변화했다. 바로 부분적인 오픈월드의 도입으로, 케이트 일행은 스키프(Skiff)라는 작은 육상 배를 몰아 설원이나 사막과 같은 광활한 지형을 돌아다닌다. 이제까지 ‘A지역 - 컷신 - B지역’ 구성이 ‘A지역 - 직접 이동 - B지역’이 된 느낌인데, 물론 그 사이에는 수많은 수집 요소와 선택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작은 교전이 산발적으로 존재한다.
백문불여일견, '기어스 5' 한국어 버전의 캠페인 초반 플레이를 감상하자.
오픈월드라고 무조건 환호하던 시절은 지났지만 여전히 게임 스케일을 키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은 분명하다. 거기다 ‘기어스 오브 워’ 세계관에 디테일을 더하려는 더 코얼리션의 시도와 오픈월드라는 표현 방식은 아귀가 잘 맞는다. 액트2 배경은 오리지널 트릴로지에서도 모습을 비춘 새희망 연구소와 설원이며, 액트3 배경은 ‘저지먼트’ 주연 중 한 명인 패덕의 UIR 미사일 기지와 사막이다. 선형적인 구조에서는 이런 지역을 단편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이동간 즐거움을 책임질 스키프의 조작감이 썩 훌륭하다. 너무 가볍고 장난감 같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또 너무 난해하거나 짜증을 유발하지 않는 적절한 탈것이다. 전체적으로 풍광 묘사가 시원스럽고 날씨 효과가 뛰어난 게임인지라 스키프를 모는 것만으로 레저 장르의 재미가 느껴지기도 한다. 주요 지역에 도착하면 입구에 주차하고 들어가는 식이며, 주무기를 두 개까지 밖에 소지할 수 없는 캐릭터 대신 여기다 장비 선적도 가능하다.
오픈월드와 스키프 도입 덕분에 이런 시원스러운 풍광을 볼 수 있게 됐다.
전투 구간과 구간을 오가는 이동 수단이자 인벤토리 역할을 겸한다.
하지만 여전히 ‘기어스 5’의 오픈월드 도입이 약간은 불안하다. 과거 오리지널 트릴로지가 ‘전투 – 컷신 – 전투’ 구성을 취한 것은 ‘기어스 오즈 워’ 팬덤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어드벤처 파트를 기반으로 오픈월드로 발전시킨 ‘언차티드’나 ‘툼 레이더’와는 걸어온 길이 다르다. 자칫 모처럼 구현한 오픈월드가 떨어지는 밀도로 되려 몰입감을 헤칠 수도 있다. 본격적인 탐험을 즐기기에 짧은 시연이었던 만큼, 정식 출시 후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오픈월드가 독이 될지 약이 될지, 짧은 시연만으로 속단하긴 어렵다.
새로운 적과 무기, 그리고 드론이 창출하는 전략
전투에 있어선 오픈월드 도입처럼 인상적인 변화는 그다지 없다. 기자가 비교적 최근 ‘기어스 오즈 워: 얼티밋 에디션’을 다시 하며 느낀 점은, 이 시리즈의 슈팅 메커니즘이 1편에서 이미 정립되었으며 여전히 잘 작동하다는 것이다. 이를 충실히 계승하는 소임은 더 코얼리션이 성공적으로 수행해온 바이며 ‘기어스 5’ 또한 여전히 찰진 손맛을 자랑한다. 발전이 부족하다고 지적할 수는 있겠으나 굳이 멀쩡한 장점까지 갈아엎을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쏘고 달리고 엄폐하고, 시리즈 전통의 슈팅 메커니즘을 충실히 계승했다.
신생 로커스트는 더욱 위협적이지만 어쨌든 쏘고 달리고 엄폐하면 된다.
물론 몇 가지 변화도 있다. 일단 게임이 오픈월드 구성을 취함에 따라 자연스레 로커스트에게 선공을 걸 기회가 생겼다. 전투에 돌입함과 동시에 집중 포화를 당했던 전작과 달리 이제는 서성거리는 로커스트 소대를 어떻게 요리할지, 조용히 은엄폐하고 준비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여전히 이런 순간이 많진 않으며 워낙 근거리에서 교전이 이루어지는 게임인만큼 대단한 전략이랄 것도 별로 없지만. 후술할 잭의 여러 스킬이 이와 관련 있다.
신규 무기로는 신생 로커스트제와 ‘저지먼트’에 나왔던 UIR제 등이 있으며, 신규 로커스트는 쌍수 둔기를 휘두르는 워든과 메뚜기마냥 뭉쳐 다니는 거머리떼 플록, 감염된 좀비 로봇 리젝트가 대표적이다. 이 역시 신작에 흥미를 더해주는 요소이나 기본적인 은엄폐 슈팅 메커니즘을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워든처럼 맷집이 좋은 적은 HP가 보이도록 변경되었는데 호불호가 갈릴 법하지만 기자는 나쁘지 않았다. 언제 죽을지 판단할 수 있으니 화력 낭비가 줄어든다.
이제는 하다하다 로봇까지 감염시킨다. 이게 로커스트야, 저그야?
워든처럼 간부급 로커스트는 HP가 표시되므로 언제 죽을지 알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추가점은 드론 잭의 스킬 및 업그레이드다. 이제껏 컴퓨터 해킹하고 잠긴 문이나 따주던 잭이 아군을 치료하고 감춰주며, 함정을 깔거나 적을 조종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한다. 더 코얼리션은 잭을 구현할 때 RPG 장르를 참고했다는데, 실제로 강습/지원/패시브로 나뉜 여러 스킬과 각각 네 가지 세부 업그레이드가 RPG 캐릭터 육성과 유사하다. 기자는 여전히 직접 쏴 죽이는 쪽을 선호하지만, 잭의 몇몇 스킬은 전황을 뒤집을 정도로 강력하다.
그러니까 이런 재주가 있는데 4편 내내 뒤에서 놀았다 그 말이군.
최신 트렌드 반영, 캐릭터 기반으로 재편된 호드
‘기어스 오브 워’가 처음 호드 모드를 들고나왔을 때는 그야말로 혁신적이었으나, 그간 숱한 경쟁작이 벤치마킹함에 따라 이제는 너무 흔하고 어쩌면 낡은 방식이 됐다. 이에 더 코얼리션은 최신 트렌드를 반영하여 ‘기어스 5’ 호드 모드를 캐릭터(혹은 스킬) 기반으로 전면 개편했다. 금번 시연에서는 케이트, 델, JD, 마커스, 파즈, 잭, ‘헤일로: 리치’에서 넘어온 캣과 에밀, 그리고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속 늙은 사라 코너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들 아홉 명은 정찰(케이트), 공격(JD, 파즈, 에밀), 방어(마커스, 사라 코너), 공병(델, 캣), 지원(잭)으로 역할이 구분되며 역할군에 따른 패시브와 캐릭터별 궁극기를 보유했다. 가령 마커스를 보면 방어 역할로서 패시브는 ‘피해를 입으면 궁극기가 천천히 재충전된다’이고 고유 궁극기는 ‘살아있는 전설: 시야 내 적의 머리를 자동으로 사격한다. 함께 엄폐 중인 아군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이다. 어딘가의 바이저 쓴 김병장이 떠오른다면 기분 탓이다.
캐릭터(스킬) 기반으로 개편된 호드 모드, 서포터인 드론 잭을 만나보자.
다른 캐릭터가 기존 은엄폐 슈팅에 스킬이 추가된 정도라면 드론 잭은 아예 플레이 메커니즘이 다르다. 캠페인에서처럼 두둥실 떠다니며 남들은 돌아가야 하는 지형을 넘나들고 아군을 치유하거나 적을 전기로 지진다. 어그로를 거의 끌지 않기 때문에 적진에 떨어진 무기를 주워 오거나 보상 포인트를 쓸어 담아 동료에게 증여할 수도 있다. 대신 화력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지원만 가능하다. 갓 오브 썬더 메타 이런 거 하지 말자.
캐릭터 기반 멀티플레이므로 당연히 중복 선택은 불가능하다. 덕분에 제한된 시간 동안 서로 사라 코너를 하려는 각국 미디어의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더 코얼리션은 ‘기어스 5’ 출시 이후에도 장기적으로 멀티플레이를 지원할, 여타 경쟁작의 ‘배틀 패스’ 같은 풍성한 업데이트 플랜을 준비 중이다. 끝으로 이 기사를 작성하는 와중에 발표되었는데, ‘기어스 오브 워’ 실사 영화 출연을 갈망해온 WWE 스타 바티스타가 멀티플레이 캐릭터로 나온다는 모양이다.
T-800이 아니라 사라 코너가 나오다니! 궁극기는 영화의 오마주다.
그곳이 예민하여 제트팩을 못 입는다면서 COG 군복은 제대로 착용했다.
시리즈에 필요했던 혁신, 그 도전이 성공하길
‘기어스 오브 워 4’는 여러모로 오리지널 트릴로지에 대한 더 코얼리션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묻어났다.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되 원작 팬덤이 괴리감을 느끼지 않도록 추가점보다는 시리즈의 유산을 계승하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이제 소기의 성과를 거뒀으니 본격적으로 자신들이 품은 야심과 독창성을 드러낸 작품, 그게 바로 ‘기어스 5’다. 도전이란 언제나 실패의 가능성을 내포하긴 하만 그럼에도 시리즈의 명성에 적당히 업혀 가려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물론 반가운 얼굴도 많이 나온다. 실패작 ‘저지먼트’의 패덕도 돌아왔다.
옆 동네 독점작 가운데 ‘기어스 오브 워’와 비슷한 행보를 보이던 시리즈가 있다. 제목도 살짝 겹친다. 그 작품도 굉장히 과격한 액션과 파격적인 연출로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핵심 개발자가 떠나고 발전 없는 외전만 나오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다. 그런데 지난해 기존 게임성을 완전히 일신한 신작이 나왔고, 여러 시상식을 휩쓴 끝에 역대 최고의 명작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기사 첫머리에서 언급한 시리즈의 부활을 성공시킨 완벽한 예다.
사실 ‘기어스 5’는 그 정도로 큰 혁신을 추구한 작품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건 우리에게 익숙한 ‘기어스 오브 워’이며 4편에서 곧장 이어지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오픈월드와 RPG 요소를 도입하고 서사성을 강화하는 일련의 노력이, 이 침체된 시리즈를 되살릴 큰 한발짝이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본작이 성공한다면 더 코얼리션은 자신들이 세운 새로운 이정표로 더욱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 ‘기어스 5’는 오는 10일 Xbox One과 PC로 한국어화 정식 발매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부디 침체된 시리즈의 새 희망이 되어주길 바란다.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