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검전설 비전스 오브 마나, 전설의 부활까지 한 걸음 더
과연 스퀘어 3대 RPG가 다시금 정상에서 만나게 될까. 상반기 ‘파이널 판타지 7 리버스’와 ‘사가 에메랄드 비욘드’가 호평 발매된 데 이어, 이달 말 ‘성검전설’도 ‘비전스 오브 마나’로 돌아온다. 비록 넘버링은 받지 않았으나 ‘성검전설 5’나 다름없는 작품으로, 십수년 만에 리마스터나 리메이크가 아닌 제대로 된 신규 콘솔 타이틀이다. 최근 체험판 배포에 열심인 스퀘어에닉스답게 ‘성검전설 비전스 오브 마나’도 출시 한 달 앞서 어떤 게임인가 살펴볼 기회가 닿았다.
배경 설정은 대저 이러하다. 작중 세계는 4년에 한 번, 충만한 마나를 널리 순환시키고자 영혼을 바칠 아이들이 선택된다. 티아나 마을에 사는 소녀 히나 역시 불의 마나의 아이로서 여행을 떠나게 된 상황. 이에 영혼의 수호자로서 히나를 지키고자 동행하는 소년 발이 바로 새로운 주인공이다. 금번 체험판은 도입부를 얼마간 지나서 바람의 마나의 아이 카리나, 달의 마나의 아이 모트레아가 합류한 시점부터 설원, 고원, 리타 항구순으로 1~2시간 가량 모험을 즐길 수 있다.
정식 발매를 한 달 앞둔 '비전스 오브 마나' 체험판이 배포됐다
동료와 정령기 둘씩, 느지막눈 폭포부터 항구 마을 리타까지 분량
사실상의 ‘성검전설 5’를 추구하다
‘성검전설’ 시리즈를 관심 있게 지켜본 팬이라면 알다시피, 본작의 개발 승인은 전적으로 3편 리메이크 ‘트라이얼스 오브 마나’가 흥행한 덕분이다. 작품성 측면에서도 오야마다 마사루P가 지휘봉을 잡은 후 나온 작품들 가운데 가장 나은 축이라, 이를 기반으로 신작을 만드는 거야 퍽 자연스럽다. 다만 ‘트라이얼스 오브 마나’ 성공의 또다른, 아니 어쩌면 진정한 수훈갑인 외주사 진(xeen Inc.)이 빠지고 넷이즈 산하 오우카 스튜디오가 실무를 넘겨받은 점은 다소 석연찮다.
어쨌든 ‘비전스 오브 마나’는 앞서 ‘트라이얼스 오브 마나’의 장점을 계승 및 발전시켜 시리즈로서 흥행 공식을 정립하려는 야심 찬 시도다. 원화가 하칸(HACCAN)이 자랑하는 수려한 조형과 색감이 한층 더 그래픽에 녹아들었고, 액션 시스템 역시 깊이를 더해줄 요소가 여럿 추가됐다. 그렇다고 너무 ‘트라이얼스 오브 마나’만 의식한 건 또 아니라, 주인공의 붉은 의상과 머리칼서 ‘성검전설’ 적통다운 인상이 잘 느껴진다. 십수년 만에 허락된 기회이니 공들인 티가 역력하다.
십수년 만에 제작된 콘솔 신작이다, 사실상의 '성검전설 5'인 셈
기존 시리즈, 특히 '트라이얼스 오브 마나'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먼저 하칸의 경우, 여전히 올드 팬덤서 평가가 박한데 이제 그가 ‘성검전설’ 얼굴마담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거기다 ‘비전스 오브 마나’는 전작과 동일한 언리얼 엔진 4임에도 확실히 때깔이 좋아졌다. 3D가 주류가 된 후 소싯적 왕도 JRPG적인 작품이 의외로 드문 터라 본작처럼 밝고 화사한 그래픽은 경쟁력이 충분하다. 문제는 그 반동인지 성능, 화질 모드로 나눴음에도 양쪽 다 최적화가 불만족스럽다는 것. 액션 게임인 만큼 정식 발매까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열심히 덧대고 얹은 시스템 역시 기대와 우려가 병존한다. 사실 ‘트라이얼스 오브 마나’는 95년도 작품의 리메이크라 게임성이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그럼에도 나름의 재미와 매력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바꿔 말하자면 애써 추가한 갖은 요소가 전작을 즐긴 이들에게 반드시 환영받으리란 보장은 없다. 괜스레 복잡하고 부산스런 인상만 남길지 모른다. 부쩍 넓어진 맵이 피로만 가중시킬 수 있듯이. 요컨대 판을 키우려다 자칫 ‘대작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특유의 화사한 분위기와 경쾌한 전투는 시리즈 정체성으로 자리매김
다만 '트라이얼스 오브 마나'와 비교하면 전투가 좀 정신없긴 하다
전투와 육성의 새로운 핵심, 정령기
체험판은 파티원 셋과 정령기 둘이 갖춰진 채라 곧장 시스템 파악 및 플레이가 가능하다. 일단 전체적인 UI/UX는 ‘트라이얼스 오브 마나’, 나아가 ‘시크릿 오브 마나’부터 계승되어 퍽 친숙하다. 화면 구성이 달라진 점은 캐릭터 상태창을 좌측 하단에 몰아놓은 정도. -듀얼센스 기준-아날로그 스틱을 기울여 목적지까지 이동하다 적과 인카운터 시 □ 일반 공격, △ 특수 공격, ○ 회피, X 뛰기를 조합하여 싸우는 여느 ARPG와 크게 다르지 않은 플레이가 바탕에 자리한다.
더불어 시리즈 전통의 링 커맨드도 건재하다. 당초 ‘성검전설’ 시리즈는 턴제 RPG와 실시간 액션의 결합이 흔치 않던 90년대 과도기적 산물로서 링 커맨드를 고안했다. 여러 파티원이 실시간으로 싸우되 링 커맨드를 통해 마치 턴제처럼 게임 정지 후 차근히 다음 행동을 지시할 수 있었다. 그때보다 액션성이 훨씬 강화된 본작 역시 링 커맨드의 효용은 여전하다. 자신이 자주 사용하는 어빌리티, 아이템을 원하는 위치, 순서로 등록하여 세 캐릭터를 수월히 조작하도록 돕는다.
이제와 특별한 UI라긴 그렇지만, 어쨌든 전통의 링 커맨드도 건재
정령기는 시간을 늦추는 등 독특한 효과로 전투의 깊이를 더한다
여기까지가 기본 사항이라면 정령기의 존재는 특기할 만하다. 대대로 정령은 마나의 나무와 함께 ‘성검전설’ 시리즈를 느슨하게나마 이어주는 핵심 설정이다. 보통은 정령과 계약하거나 인정받아야 해당 속성 마법을 얻는 식으로, 이번에는 정령기(器)라 하여 일종의 아티팩트로 취급된다. 전투 시 미리 장착한 정령기를 R2로 발동하면 일반 어빌리티와 전혀 다른 효과를 발휘하는데, 일례로 루나 스피어는 일정 영역 내 적을 느리게 만들고 아군 쿨타임은 단축시키는 게 가능하다.
정령기의 등장으로 캐릭터 육성도 크게 변화했다. 누구에게 어떤 정령기를 주느냐에 따라 클래스 체인지가 이루어지며 모습과 무기가 달라지기 때문. 가령 발은 원래 한손검을 휘두르는 수호자지만, 루나 스피어를 장착하면 힘으로 돌격창과 방패의 이지스가 된다. 필살기 역시 불 속성 피닉스 블레이즈서 달 속성 가름 레이로 바뀐다. 그 외 어빌리티는 각 클래스에 딸린 엘리먼트 보드란 스킬트리 형태로 얻는다. 총 여섯 속성이니 캐릭터마다 6개 클래스가 존재할 터다.
정령기를 통해 클래스 체인지가 이루어진다. 상위직은 사라진 듯
어빌리티 메뉴 역시 엘리먼트 보드로 개편, 클래스에 종속된다
넓어진 세계로, 더 빠르고 경쾌하게
전술과 육성 선택지를 늘려주는 정령기가 오야마다 마사루P 나름의 종적 성장이라면, 세미 오픈필드라 명명된 넓은 맵은 횡적 성장에 해당한다. 애당초 고전 게임 기반이니 당연하게도 ‘시크릿 오브 마나’와 ‘트라이얼스 오브 마나’는 매 구간이 상당히 짧다. 물론 그것들이 무수히 연결된 전체 월드는 작지 않으나 어쨌든 게이머가 체감하는 공간은 협소한 셈이다. 반면 ‘비전스 오브 마나’는 최신 게임답게 맵이 무척 커져 거대한 개과 동물 피쿨을 타고 다녀야 할 정도다.
탁 특인 오픈필드가 주는 해방감은 이처럼 모험을 내세운 한 게임에게 있어 그 자체로 훌륭한 콘텐츠다. 다만 ‘비전스 오브 마나’가 여느 대형 RPG와 비교할 때 특별히 돋보이는 맵 디자인이나 기믹이 있느냐면 그건 또 아니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멋진 풍광을 만끽하고, 서브 퀘스트를 수주하고 수행하며, 몇몇 네임드 필드 몬스터와 챌린지 던전인 정령의 보금자리에 도전하는 등등. ‘성검전설’로 한정할 경우 발전임에 분명하나 뭇 게이머로선 질리도록 봐온 구태일 따름이다.
오픈필드는 모험심을 고취시키는 것만으로 이미 큰 효용이 있다
서브 퀘스트, 네임드 몬스터, 챌린지 던전 등 뻔한 구성인 건 사실
그래도 지형지물에 의한 제약이 별로 없고 피쿨이 굉장히 잽싼 데다 높이 뛰어오르는 터라 시원스러운 맛은 있다. 보물상자 등 각종 오브젝트도 곧잘 표시해주기 때문에 뭘 찾느라 스트레스 받을 걱정은 접어둬도 좋다. 전투와 연결되는 지점인데, 형제뻘인 ‘파이널 판타지’나 오래 전 살림을 합친 ‘드래곤 퀘스트’에 비해 속도감이랄까, 시종일관 경쾌함을 잃지 않으려는 기획 의도가 느껴졌다. 플랫포머 마냥 뛰어다니며 자연스레 습득하라고 흩어둔 곰꿀이 하나의 좋은 예다.
또한 앞서 힘주어 소개한 정령기가 여기에도 쓰인다. 흘러가는 유빙을 루나 스피어로 멈추어 밟고 지나거나 높다란 언덕을 진 부메랑이 일으킨 돌풍에 올라타 등반하는 식. 일견 흥미롭지만 게이머가 주도적으로 활용할 수 없고 딱 정해진 위치서 발동하기 때문에 이 역시 새로운 기믹은 못된다. 그저 설정뿐 아니라 실제 플레이를 이루는 양 축인 전투, 모험 와중에 정령의 존재감을 키우려는 시도는 나쁘지 않다. 이 부분은 좀 더 많은 정령기를 얻은 후 재평가토록 하자.
열심히 먹은 곰꿀은 마을에 특정 NPC가 좋은 아이템과 바꿔준다
정령기로 오픈필드의 장애물을 넘는 기믹도 나름 재미있는 편
무리하지 않는, 단단한 한 걸음 더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체험판 개시 시 주인공 발이 대검을 든 룬 나이트라는 것. 전작의 누굴 의식했나 모르겠지만 하필 무기가 무기인지라 행동이 영 굼뜬 클래스다. 대다수 게이머가 우선 발부터 조작하려 들 텐데, 아직 불안정한 프레임레이트와 맞물려 자칫 게임의 첫인상을 망칠 우려가 있다. 그 자리서 바로 클래스 체인지가 가능하고 최소한 엘리먼트 보드만 열어도 플레이가 쾌적해지니 모쪼록 인내심을 발휘하길. 막바지에 보스전까지 즐길 거리가 꽤 많은 체험판이다.
스퀘어 3대 RPG 가운데 ‘사가’가 카와즈 총괄의 의지로 시스템적 차별화를 중시한다면, 오야마다P가 만들어가는 ‘성검전설’은 경쾌함 흐름과 밝은 분위기로 ‘파이널 판타지’와 선을 긋는다. ‘파이널 판타지’ 액션성이 나날이 강화되는 데다 그게 아니라도 작금의 시장은 ARPG가 넘친다. ‘성검전설다움’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명답까진 못되더라도 일단 그 중에서 괜찮은 게임으로 인정받는 게 선결이라 판단한 듯하다. 모쪼록 여기서부터 전설의 부활이 시작되길 바란다.
일단 '무난하게 잘 만든' 정도의 평가를 목표하지 않나 싶다
메인 스토리 역시 마냥 밝게 흐르지만은 않을 듯한 암시가…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