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법(이앙법)은 고려후기때 일부지역에서 시작되었고 조선후기가 되면 전국적으로 시행된다.
한반도는 고대서부터 조선시대까지 쭉 중농억상 정책이었다. 이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냥 논농사에는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필요했고 이 인원들이 다른데로 빠져버리면 먹을 밥이 없어지니까 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그런데 모내기법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모내기법을 시행함으로 생기는 장점을 살펴보자면
1. 노동력 소요가 직파법의 1/5수준으로 줄어듬 (논농사는 잡초정리가 중요한데, 모내기법으로 하면 잡초정리가 용이해짐)
2. 생산량은 두배가 됨
3. 벼-보리 이모작이 가능하게됨(이전에는 보리와 벼의 재배기간이 겹치는부분이 있어 할수없었다)
이때 시기 조선의 농민들은 대다수가 소작농이었다. 근데 노동력이 이젠 조금만있어도 된다->
대다수 농민들이 강제로 농업의 결박으로부터 풀려나게 된다.
예를 들어 100명이 경작하는 땅이 있었다면 이제 80명은 필요없게되었고 그들은 실업자가 된것이다.
실업자가 되면 그대로 굶어죽어야하나? 아니다. 그들은 제 살길을 찾아나서기 시작하는데
어떤이는 수공업자가 되고 어떤이는 상인이되고 어떤이는 임노동자(임금받고일하는)가 되고 어떤이는 광산노동자가된다.
수공업과 광산업의 발달은 상업의 발달을 가져온다.
땅에 남아있는 20명의 농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생산량의 증대로 수확하는 쌀을 모두 자급자족으로 소모할수없게되었고
이제 세상에는 쌀을 사먹어야하는사람들이 넘치니(위에 80명) 쌀이 잘 팔린다.
농작물이 잘팔리는것을 보고 상품작물들(인삼,마늘,파,담배)도 더 적극적으로 재배하게된다.
상업은 점점 더 발전하고 그 이전까지 유통만됐지 상용화가 도통되지않던 화폐(엽전)가 빠르게 상용화되고
전국 곳곳에 거상들과 부농들, 수공업장인들이 출현했다.
물론 이 모든것이 모내기법 하나만의 영향은 아니다. 당시 여러가지 국가정책들도 한몫했지만
어쨌든 모내기법이 불러온 영향력이(더이상 대다수인구가 농업에 종사하지않아도되는) 굉장히 컸다고 볼수있다.
이러한 결과를 국내사학자들은 상업자본주의와 근대화의 태동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본의 식민지근대화론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주장이기도하다.
뿌리가 약해서 지하수를 못빨아들이니까 가뭄에 약했고 그래서 물이 더 많이필요했대. 그래서 저수지와 보가 이 시기에 확늘어남.
물 없을 떄 모내기법 써버리면 혼자 물 다 빨아먹는거라 금지시키던 거였던가?
이영훈은 식근론의 대표적 학자 아닌가.
뭐 요즘은 사장되고 있는 학설이라더군. 거의 판타지 수준. 근거가 없음
걍 마르크스 유물론의 자본주의 조건에 조선 후기를 끼워맞춘 곡학아세형 주장. 나라마다 다 사회상이 달랐는데 서구식 유물론을 가져다 박아서 조선이 봉건사회였는지 자본주의 사회였는지 규정하려고 드니 맞을 리가 있나... 그 러시아조차도 이론이랑 현실이 하나도 안 맞았는데
그래서 내가 배우던 교과서에는 조선 후기 이앙법(모내기)를 국가(조선)에서 금지하였다는 내용이 있었음. 100명이 하던 걸 5명이서 하게 되면 나머지 95명은 뭘 해? 현재 같은 산업사회에서야 다른 일을 하면 된다 하겠지만 그 당시 사회에선 할 일을 만들기도 어려웠고 당사자도 그걸 원하지 않았음. 본인들은 고정된 땅을 농사짓는 농민의 신분에서 다른 (날품팔이) 노동자가 되는 것을 신분 하락으로 아마 여겼을 거임.
조선 후기 민속화에서 평범한 농민들도 철제 농기구 풀세트에 새참먹는데 백자나 놋그릇에 담아먹던게 그만큼 생산력이 펌핑이 되서 그런거구나
물 없을 떄 모내기법 써버리면 혼자 물 다 빨아먹는거라 금지시키던 거였던가?
뿌리가 약해서 지하수를 못빨아들이니까 가뭄에 약했고 그래서 물이 더 많이필요했대. 그래서 저수지와 보가 이 시기에 확늘어남.
직파하면 물이 그렇게 많이 필요없슴. 발아하면서 땅에 적응한거라 가물어도 살수있슴. 하지만 뿌리벌기가 잘안됨. 모내기 하면 뿌리를 한번 뽑았다 심는거라 물이 없으면 바로 죽음. 그리고 적응기 까지는 항상 물이 있어야 함. 그후에 뿌리벌기 하면서 수확량이 엄청나게 늘어남
모를 옮겨 심으려면 논에 물이 있어야 하는데 가물면 논바닥이 쩍쩍 갈라지니 옮겨심기가 불가능해짐 직파를 하면 어떻게든 뿌리가 박혀있으니 혹시라도 비가 오면 살놈은 살아서 수확할 수는 있게 됨 이앙은 이아할 시기에 비가 안 오면 한해를 조짐
오. 그런 장단점이 있구나.
조선 후기 민속화에서 평범한 농민들도 철제 농기구 풀세트에 새참먹는데 백자나 놋그릇에 담아먹던게 그만큼 생산력이 펌핑이 되서 그런거구나
뭐 요즘은 사장되고 있는 학설이라더군. 거의 판타지 수준. 근거가 없음
鶏胸肉
걍 마르크스 유물론의 자본주의 조건에 조선 후기를 끼워맞춘 곡학아세형 주장. 나라마다 다 사회상이 달랐는데 서구식 유물론을 가져다 박아서 조선이 봉건사회였는지 자본주의 사회였는지 규정하려고 드니 맞을 리가 있나... 그 러시아조차도 이론이랑 현실이 하나도 안 맞았는데
자본주의의 맹아론도 그렇고 당시 근현대 사회에 상업발달이 서구 제국들에 뒤쳐지지 않았다는 학설들은 절반만 걸러들어야 하긴 함. 불우한 근현대 역사에 대한 반동으로 어느정도 국뽕이 섞여서 결국 한계성이 있어서 조선 사회 전체로 퍼지지 못했거나 제도나 환경 탓에 막히거나 기타 등등이라. 우리도 싹은 있었다는 정도로 봐야할듯.
鶏胸肉
이영훈은 식근론의 대표적 학자 아닌가.
이것도 또 최신 학설에 따르면 반박된 학설일텐데
반일종족주의 쓴 그 이영훈 아녀.
이 사람 학설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이 사람 학설이 얼마나 '주류'고 '요즘'에 해당하는지가 많이 의문이다. 이 사람이 그나마 요즘 쓴 책이 반일종족주의던데
정작 식근론 주장하는 ㅇㅇㅎ의 과거 석박시절 논문 보면 식근론에 대해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아이러니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https://contents.premium.naver.com/chosondynasty/knowledge/contents/220816161115040pf 이제는 뒤안길로 사라진 자본주의 맹아론 (서강대 계승범 교수) 요즘 맹아론 진지하게 주장하는 주류사학자는 없다고 보면 됨
그래서 내가 배우던 교과서에는 조선 후기 이앙법(모내기)를 국가(조선)에서 금지하였다는 내용이 있었음. 100명이 하던 걸 5명이서 하게 되면 나머지 95명은 뭘 해? 현재 같은 산업사회에서야 다른 일을 하면 된다 하겠지만 그 당시 사회에선 할 일을 만들기도 어려웠고 당사자도 그걸 원하지 않았음. 본인들은 고정된 땅을 농사짓는 농민의 신분에서 다른 (날품팔이) 노동자가 되는 것을 신분 하락으로 아마 여겼을 거임.
지금 경제왕 연산군인가 대체역사 보면 상업의 발달은 농업의 발전과 큰 연계없이도 가능한거같음 ㅋㅋㅋ
이론상으로는 농업기술이 발달하고 잉여농산물이 철철 넘쳐야 그 때부터 다른 상품들도 사람들이 찾기 시작하고 유통이 되기 시작한다고 하긴 함
보통 그게 시작이지만 여기는 세금을 돈으로 받겠다! 로 들이박고 시작하긴함
현재는 기술이발전하고 일할사람이 줄어드니 오히려다시 직파재배가 연구되고있음
어디까지나 고려하는 수준이지만
일단 기계화가 다 된것도 크긴 함 특히 10월엔 논 주인들은 걍 멀리서 지켜만 봐주는게 속 편할 정도 5월엔 장전수 없이 아부지께서 혼자 하셔야 하지만...
그러니까 결론은 중농억상 정책은 수공업과 광산업의 발달은 상업의 발달을 가져온다. ...라는거지!?
잡초제거가 용이 했던 이유는 한줄로 세워서가 아니라 처음 모를 심을때 논에 물을 높게, 모 마저도 잠길락 말락 하게 채워놓으면 잡초들은 자라려고해도 물에 뿌리가 녹아서 그런거임 그래서 현대에도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짓는 논은 물관리가 매우 중요함
벼농사 자체가 밀농사나 보리농사에 비하면 도박성이 있는데 (벼는 수생식물 비스무리해서 가물면 그냥 100% 망함) 모내기까지 하면 더더욱 위험요소가 높아진다고 함. (얘는 더 망함) 그래서 초기에는 반대가 심했다고 함....
우리논도 모판이 뿌리가 엉성해서 올해는 장담 못할듯 싶음 모판 기껏 했더니 키만 크고 뿌리가 엉성한...
한능검과 공무원 한국사에도 잊을만하면 나오는 모내기법
글 본문의 내용은 우리나라에서는 모내기법의 효과라기 보다는 대동법의 효과지...
자본주의맹아론은 좀..
최신 학설에서는 맹아론도 다시금 지지받고 있는 걸로 아는데
전혀
안타깝게도 조선은 그놈의 (아무도 안지키지만) 빡빡한 법안 (이러면 맘에 안드는 놈을 털어먹을 때 도움이 됨), 조선업, 광업, 공업 등에서 뒤떨어진 기술, 농본주의적인 관념 때문에 상업의 발달도 제한적이었고 제조업 역시 제한적이었다는게 밝혀져서 자본주의 맹아론은 폐기 수순임
뭔 소리야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그런 만은 아녔단 연구도 있는데
조선은 길이 구려서 상업이 힘들다. 그런데 알고보니 정부에서 일부러 길은 그냥 구리도록 방치한 거라고... 세곡은 어차피 조운으로 받는 거고 길 잘 닦아봤자 적 침입하기만 좋아진다고 상업 발달 또한 (자기 말고) 아래 백성들이 이상한 물건에 욕심부리면 안된다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듯함. 이건 현재 저개발 국가에서도 보이는 현상. 지도층들이 자국경제개발 같은 거 싫어함.
대표적으로 어업 관련 법안은 세금을 아주 세세하게 짜놨는데 고을 수령들이 이를 악용해서 어민들을 털어먹으니 어업이 발전하지를 못함
구리도록 방치하기보다는 윗사람들도 길 잘닦인건 좋아했음 다만 작은 정부 지향 때문에 돈이없어서 포기했던거고 적군 방비용은 걍 이유로 둘러댄거지 핵심적인 사유는 아니었음
조선이 돈없어서 포기하고 다른 이유 둘러대는 사례가 꽤 많은데 대표적으로 성종 말 연산 초 때 창고가 망가져서 세곡 저장을 못함 - 저장을 못해서 세금을 많이 못거둠 - 세금이 없어서 창고 지을돈이 없음 의 악순환이 몇년간 이어졌음 이거에 대한 대책은 어차피 못걷는거 세금 감면해주죠? 였고.... 결국 수십년 뒤에 창고를 다시 짓긴 함
에잉 이서방 쯧쯧 일 좀 잘 하지
국제무역상은 농업생산력이 낮았던 고려시대에 오히려 더 크고 활발했으니... 유럽 중심의 사회진화론을 들이대면 맞는 게 없지
식민지 근대화론도 "식민지 시절에 우리가 근대화가 되었단 뜻이지 일제가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지만 당장 그 저자가 반일종족주의 같은 책을 쓴거 보면 의도가 아주 투명하지 아마존 밀림도 뚫고 전기와 철도가 들어가는게 그 시절인데 도대체 그 "근대화"에 누가 주체였든 시류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참고로 자본주의 맹아론이 나가리 수순이라고 딱히 식민지 근대화가 맞는 얘기도 아니다 근대화는 차라리 개발독재 시절 얘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