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회군 격파
연희(延熙) 원년(=238년), 대장군(大將軍) 장완(蔣琬)을 따라 한중(漢中)에 주둔하였다.
(장)완이 대사마(大司馬)로 오른 뒤에 (강)유를 사마(司馬)로 삼으니 수차례 편군(偏軍)을 인솔해 서쪽으로 침입하였다.
-강유전
저는 비위 등과 이렇게 상의하였으므로 적군이 아끼는 곳이고, 게다가 강(羌), 호(胡)는 한나라를 그리워하기를 목마른 사람처럼 하며
또한 예전에 (우리의) 편군(偏軍)이 강(羌)으로 들어갔을 때 곽회(郭淮)가 파주(破走,격파되어 달아남)한 적이 있습니다.
-장완전
곽회의 추격
정시(正始) 원년 (240) 촉나라 장수 강유(羌維)가 농서로 진격해 나왔다.
곽회는 곧 진군하여 강중(彊中)까지 추격하였다. 강유는 곧 물러났다.
곽회는 곧 강(羌)인 미당(迷當) 등을 토벌하고, 저(氐)인 3천 부락을 순찰하여, 위로하고, 그들을 옮겨 관중을 충실하게 하였다.
-곽회전
문산 이민족 평정
(연희) 10년(247년), 위장군(衞將軍)으로 올라 대장군(大將軍) 비의(費禕)와 함께 상서의 사무를 총괄하였다.(녹상서사錄尙書事)
이 해에 문산(汶山)의 평강이(平康夷 - 문산군 평강현의 이족夷族)가 반란을 일으키자 (강)유가 군대를 인솔해 이를 쳐서 평정하였다.
조서 전투
또한 농서(隴西), 남안(南安), 금성(金城)의 경계로 출병해 위(魏)의 대장군(大將軍) 곽회(郭淮), 하후패(夏侯霸) 등과 더불어
조서(洮西, 조수洮水의 서쪽지역)에서 싸웠다.
호왕(胡王) 치무대(治無戴) 등이 부락(部落)을 들어 항복해오자(강)유가 이들을 거느리고 돌아와 안처(安處)시켰다.
-강유전
성읍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남쪽으로 촉병을 부르고, 양주의 유명 호(胡)인 치무대(治無戴)가 다시 배반으로 응하였다.
성중산 전투
전진해도 강유를 제압할 수 없고, 물러나도 요화를 함락시킬 수 없으니 계책이 아니고, 모두 합쳐서 함께 서쪽으로 가는 것만 못하며
아직은 호(胡)와 촉나라가 연결되지 않아 그 안팎이 끊어져 있으니, 이는 연합하여 적을 토벌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하였다.
강유는 스스로 있는 힘을 다하여야 하는데 비해, 요화 쪽을 안정 시키기에도 부족하고, 또한 명을 받아 분주하게 움직여야 함에 피곤하게 될 것이오. 병사가 서쪽과 멀지 않으니, 호(胡)와 촉나라의 연합은 자연스럽게 끊어지게 될 것이오.
승진하여 도향후(都鄉侯)로 봉해졌다.
국성 전투
가평(嘉平) 초(249), 곽회(郭淮)를 대신하여 옹주자사(雍州刺史)가 되었으며, 분위장군(奮威將軍)을 더하였다.
촉나라 대장 강유(姜維)가 병사들을 이끌고 국산(麴山)에 의지하여 두 개의 성을 쌓고,
아문장(牙門將) 구안(句安)과 이흠(李歆) 등을 보내 그 성을 지키도록 했으며, 또 강호(羌胡)의 인질을 모아 위나라의 여러 군을 침범했다.
정서장군(征西將軍) 곽회(郭淮)는 진태와 더불어 적을 제어할 방법을 상의했는데, 진태가 말했다.
"국성은 비록 견고하지만 촉나라에서 멀리 떨어져있고 길이 험난하므로 반드시 군량미 수송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강족은 강유를 두려워하여 부역을 징발하였으니, 반드시 그들에게 의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그들을 포위하여 빼앗는다면, 칼에 피를 대지 않고서도 그들의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들에게 구원병이 있다고 하더라도 산길이 험준하여 병사를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닐 것입니다."
곽회는 진태의 계책을 따라서 진태에게 토촉호군(討蜀護軍) 서질(徐質)과 남안태수(南安太守) 등애(鄧艾) 등을 인솔하고 병사를 나아가게 하여
그들을 포위하여 그 운송로와 성 밖의 물의 흐름을 끊도록 했다.
구안 등은 도전을 하였으나 위나라 군사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성안의 장수와 병사들은 곤궁하였고, 식량을 나누어 배급하고 눈을 모아서 시간을 끌었다.
강유는 과연 구원하러 와 우두산(牛頭山)으로부터 나와 진태와 서로 대치했는데, 진태가 말했다.
"병법에서는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 우두산을 끊으면 강유는 돌아갈 길이 없으므로 우리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각자 보루를 견고하게 하고 적과 싸우지 말도록 하며, 사자를 파견하여 곽회에게 진언하고
자신은 남쪽으로부터 백수(白水)를 건너 물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곽회로 하여금 우두산으로 달려가 적의 퇴로를 끊도록 하려고 했다.
이와 같이 하면 강유를 취할 수 있으며, 구안 등을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곽회는 그의 계책을 칭찬하고, 군사들을 인솔하여 조수(洮水)로 진군하도록 했다.
강유는 두려워 군사를 이끌고 도주하였고, 구안 등은 고립되었는데도 원조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모두 투항했다.
-진태전
서평 출병
(연희) 12년(249년) (강)유에게 부절(節)을 내리니(가절假節) 다시 서평(西平)으로 출병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강유전
연희 13년(250년), 강유가 다시 서평(西平)으로 출병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후주전
남안 전투
(연희) 16년(=253년) 여름, (강)유가 수만 명을 이끌고 석영(石營)으로 출병하여 동정(董亭)을 거쳐 남안(南安)을 포위하자
위(魏)의 옹주자사(雍州刺史) 진태(陳泰)가 포위를 풀기 위해 낙문(洛門)에 도착하였고 (강)유는 군량이 다하여 퇴환(退還)하였다.
-강유전
연희 16년(253년) 여름 4월, 위장군 강유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남안(南安)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후주전
이듬해(=254년), 독중외군사(督中外軍事)가 더해졌다. 다시 농서(隴西)로 출병하자
수적도장(守狄道長)(농서군 적도현의 현장縣長) 이간(李簡)이 성(城)을 들어 항복하였다.
양무 전투
진군하여 양무(襄武)를 포위하고는 위장(魏將) 서질(徐質)과 교봉(交鋒,교전)하여 수급을 베고 적을 격파하니 위군(魏軍)이 패퇴(敗退)하였다.
3현 평정
(강)유가 승세를 타 항복시킨 곳이 많았고 하관(河關), 적도(狄道), 임조(臨洮) 세 현(縣)의 백성들을 뽑아 (데리고) 돌아왔다.
조서 전투
그 뒤 (연희) 18년(=255년), 다시 거기장군(車騎將軍) 하후패(夏侯霸) 등과 함께 적도(狄道)로 출병하여
위(魏)의 옹주자사(雍州刺史) 왕경(王經)을 조서(洮西)에서 대파하니 (왕)경의 군사들 중 죽은 이가 수만 명에 달했다.
-강유전
왕경은 이미 강유와 싸워서 크게 패하고 만여 명만이 돌아와 적도성을 지키고 있었고, 그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진태전
적도성 전투
(왕)경이 퇴각해 적도성(狄道城)을 보전하니 (강)유가 이를 포위하였다.
위(魏)의 정서장군(征西將軍) 진태(陳泰)가 진병(進兵)하여 포위를 풀자 (강)유는 물러나 종제(鍾題)로 가서 주둔하였다.
-강유전
진태의 군대가 몰래 행군하여 갑자기 적도 남쪽에서 나타나자, 강유가 산을 따라 진태의 군사를 습격했다.
진태는 그와 교전하여 퇴각시켜 돌아가게 했다.
양주 군사는 금성(金城)을 지나 남쪽으로 옥간판(沃干阪)에 도착했다. 진태와 왕경은 비밀리에 날짜를 정하고 함께 강유의 퇴로를 막으려고 했다. 강유 등은 이 계획을 듣고 즉시 도주했다. 적도성 안의 장수와 병사들은 비로소 성을 나오게 되었다. 왕경이 감탄하며 말했다.
"식량은 열흘분도 못 남았습니다. 만일 때에 이르러 구원병이 오지 않았다면 성을 들어 궤멸하여 옹주를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
진태는 장수와 병사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앞뒤로 나누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따로 사람을 보내 지키도록 하였으며, 아울러 성과 보루를 수리하도록 하고, 군대를 돌려 상규에 주둔했다.
-진태전
단곡 전투
(연희) 19년(=256년) 봄, (사자가 종제로) 나아가 (강)유를 올려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했다.
다시 융마(戎馬,군마;군대)를 정륵(整勒,정돈)하고는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호제(胡濟)와 상규(上邽)에게 모이기로 기약하였는데
(호)제가 서약을 어기고 도착하니 않으니 이 때문에 (강)유는 단곡(段谷)에서 위(魏)의 대장(大將) 등애(鄧艾)에게 격파되어
(군사들이) 별이 흩어지듯 유리(流離,떠돌고 헤어짐)하고 죽은 자들이 매우 많았다.
후화 전투
(경요) 5년(=262년), (강)유가 군대를 이끌고 한(漢), 후화(侯和)로 출병하였다가 등애(鄧艾)에게 격파되니 답중(沓中)으로 돌아가 주둔하였다.
-강유전
경원 3년(262), 또 후화에서 강유를 격파시켰으며, 강유는 퇴각하여 답중을 지켰다.
-등애전
강천구 전투
등애는 천수태수 왕기 등을 파견하여 직접 강유의 진영을 공격하게 했으며, 농서태수 견홍 등을 보내 강유 군대의 앞에서 싸우도록 하고,
금성태수 양흔 등에게 감송으로 가도록 했다.
강유는 종회의 군대가 이미 한중에 진입하였다는 것을 듣고 물러나 돌아갔다. 양흔 등은 강천구까지 추격하여 큰 싸움을 하였다.
강유가 패하여 달아났는데,
-등애전
검각 전투
(장)익과 (동)궐이 이제 막 한수(漢壽)에 이르렀을 때 (강)유와 (요)화 또한 음평(陰平)을 버리고 퇴각하다가 (장)익과 (동)궐을
만나 서로 군대를 합치고는 모두 물러나 검각(劍閣)을 보전하며 (종)회를 막았다. (종)회가 (강)유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공후(公侯)는 문무(文武)의 덕을 갖추고 매세(邁世,세속을 초월함)의 지략을 품고 공을 세워 파(巴), 한(漢)을 구제하여
화하(華夏,중국)에까지 명성을 드날렸으니 멀고 가까운 이들 중 그대의 명성에 귀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소.
늘 지난날을 생각하면 일찍이 (그대와 나는 위나라의) 큰 교화를 함께 입었으며 오찰(吳札,오나라의 계찰季札)과 정교(鄭喬,정나라의 자산子産)가
우리의 우호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오.”
(강)유는 서신에 답하지 않고 군영을 벌려세우고 험요지를 수비하였다.
(종)회는 이길 수 없고 군량을 운반하는 길이 매우 멀었으므로 장차 (군대를 물려) 귀환할 것을 의논하였다.
vs 위병들
위(魏)의 장사(將士,장졸)들이 분노하여 (종)회와 (강)유를 죽이고 (강)유의 처자식이 모두 복주(伏誅,주살)되었다.
요약하면 대충 7승 11패
높다면 높고 낮다면 낮고 그렇넹
왕평인가 누구 평가대로 능력이 대촉방면 장군들보다 월등히 뛰어나지도 않았고 굴릴 수 있는 병력제한도 있던 상태라 그정도면 강유 입장에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전적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음;
경요5년(262) 강유(姜維)가 군을 이끌고 적도(狄道)로 출병하자 요화가 말했다, “ ‘전란이 끊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불태운다’고 하더니 백약(伯約-강유의 자)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지모가 적보다 뛰어나지 않고 역량도 적으면서 용병이 끊이지 않으니 어찌 스스로를 보존하리?" 혹시 이거?
ㅇㅇ
샌드백이지만 깡깡한 면이 있어서 좋은 양반
능력이 없다고 폄하하기도 그렇지만 확실히 단점이 있는 지휘관이네
적당히 사릴줄알라야했는데 나라 뒤져라고 와장창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