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촉 지방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수리시설이 완료되어 도강언을 위시해
전근대 수천년간 압도적인 중국제일의 식량생산량을 자랑했으나
의외로 식량을 뜯기지 않았다.
곡물은 그 무게가 끔찍하게 무거워서
옮기는데 보통 배로 옮겼는데
파촉은 길이 개떡같아서 저따위 잔도로 식량을 나르는건 손해가 막심했고
수로길도 폭포나 다름없는 격류라 강으로 운송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파촉을 수중에 둔 통일 왕조들도
파촉에서 생산된 식량을 세금으로 뺏기보단
오히려 비단을 위주로 거둬들여 촉금이란 비단이 유명해져
파촉은 식량을 뜯기지 않아 고대부터 식량이 풍족한것
수로가 개판이라 대운하에서도 제명당해서
강남이 개발되자 대운하로 대규모 식량을 세금으로
수백만석씩 뜯긴 것과는 천지차이
알아서 가져오라고 하지는 않아서 다행이군
중앙과 분리되어서 따로 먹고 살수 있다니 천국이다
그리고 모택동은 저런 사천에서조차 농사를 망치게 만들어서 수많은 아사자를 만들어 냈다. 모택동의 정책이 만든 부작용으로 사망한 대륙인의 수는 일제가 전쟁중에 죽인 중국인 수의 약 네배에 달한다고 한다.
차마 옮겨라 시키기에도 개같은 지형이구나
저거 만든 사람을 수신으로 모신다니까ㅋㅋ
그러다 죽으면 더 손해로 생각 했다거나
그래서 짱박혀서 농성하기는 최적의 장소인데 외부로 진출하는건 어려운 곳이었지
알아서 가져오라고 하지는 않아서 다행이군
나15
그러다 죽으면 더 손해로 생각 했다거나
윗 놈들이 생각해도 미친 짓인데 그거 고집하다가 반란나면 비단도 못 받음. 그렇다고 쉽게 반란 진압이나 가능한가? 잔도로 한줄로 가다가 다 죽기 vs 등산하기
저거 만든 사람을 수신으로 모신다니까ㅋㅋ
현대에도 치수 사업 망쳐서 돈은 돈 대로 쓰고도 물이 썩는 사례가 나오는데 반복되는 수해를 막고 농수 공급을 안정되게 해서 일대가 풍족해졌으니 도강언 만든 부자는 떠받들만 하죠.
첨에 소설에서 봐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줄 몰랐는데 도강언 사진이랑 만든시기 듣고서는 납득함
중앙과 분리되어서 따로 먹고 살수 있다니 천국이다
저 산지 안에 있는 사천분지 평지면적이 한반도만함
차마 옮겨라 시키기에도 개같은 지형이구나
장강은 사천지방에도 이어지지 않나?
중상류인데다 암초랑 급류가 ㅈㄴ많아서 절대 한강처럼 생각하면 안됨
그리고 모택동은 저런 사천에서조차 농사를 망치게 만들어서 수많은 아사자를 만들어 냈다. 모택동의 정책이 만든 부작용으로 사망한 대륙인의 수는 일제가 전쟁중에 죽인 중국인 수의 약 네배에 달한다고 한다.
마오주석 아니었으면 진짜 바이두가 구글과 양강으로 붙고 있었겠지…
지딴엔 수확량 늘린다고 벼 모종을 엄청나게 빽빽하게 심으래서 ㅈ됐던가... 참새 잡은것도 있고, 농기구를 토법고로에 녹여서 고철로 만든것도 한 몫 했고. 그 와중에 핵실험 성공한거 보면, 경제를 말아먹은게 대단한건지, 핵개발이 ㅈ밥인건지....
대약진 운동과 천안문 학살로 중공은 진정한 중국, 중화가 될 가능성을 최소 반백년에서 한세기는 스스로 늦춰버린 것이라고 봄
모택동 없었으면 진작에 소련 붕괴하면서 중국도 사방팔방 찢어졌을지도. 근데, 우리나라랑 일본은 저기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북부처럼 벼농사만 짓는 촌동네 국가 됐었을거임.
그래서 덩주석이 만회해야 하니 도광양회 하라고 그리 일렀는데 근데 거기서 습가놈이
무한반복 루프물
심경밀식도 결국은 그냥 농업전문가인 지주들을 문혁으로 싸그리 다 죽인 결과물임 모택동의 부친 모의창은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농업 전문가로서 자수성가 하여 아들 모택동은 자신처럼 모진 일 없이 자라고 집안에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글공부를 시켰다고 함 그러나 모택동은 글공부로 머리가 굵어지자 집안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말빨로 주변 어른들 이겨먹는 곳에만 써먹음 그래고 집에 돌아와서도 집안일을 거들기는 커녕, 공부를 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협조를 안 해서 큰일이라며 되려 뻔뻔하게 굴며 농사일을 우습고 하찮은 일 취급함 그리고 먼 훗날 그는 과학자를 불러서 오직 수치만으로 면적대비 노동량과 생산량을 계산하여 적용한 심경밀식을 실시하게 된 것 모택동의 진짜 대단한 점은 딱히 이상기후 등의 천재지변이 아닌, 농업을 포함한 산업 시스템 전반을 엉망으로 만들어 일어난 인재로 아사자를 대량으로 만들었다는 것임
삼모작 치트를 못 쓰는 우리나라라면 그래도 훨씬 열심히 살았을 거 같기도 한데…그 IF 따지기엔 변수가 장난아니게 많네
그래서 짱박혀서 농성하기는 최적의 장소인데 외부로 진출하는건 어려운 곳이었지
그렇다고 아무생각없이 짱박혀 농성만 하고 살다보면 결국 중원 통일한 세력에게 체급으로 밀림
뭔소리야 춘추전국시대부터 어찌저찌 잘 운송해왔음 진나라가 통일한게 사천, 관중이라는 땅을 장악한 후에 관중에서 군사 일으키고 군사들 대느라 부족한 관중 땅의 식량을 사천에서 가져와서 메꾸는걸로 전국 7웅 다 때려잡았는데 뭔...
효율성이 ㅈ망인거지 불가능한건 아니라 급할땐 그렇게 했는데 소하가 유방 서포트할때도 가까운 관중을 위주로 털어먹었고 파촉은 잔도때문에 거지같아서 제대로 수거를 못했다더라
제대로 수거를 못할 지경이였을 정도면 파촉 바로 옆인 관중이 본거지인 진나라에서 파촉땅은 왜 정벌했으며 거금을들여서 도강언까지 지었던거..?? 글쓰면서도 뭔가 이상하지 않음?
그리고 장강타고 하류랑 교류하기 힘들다던데 장강 하류에서 사천쪽으로 올라오는게 힘든거지 사천쪽에서 장강 하류로 가는데는 문제 없었음 진나라가 촉나라 정벌한 이후 순식간에 오나라 밀어버린 이유도 그걸 이용해서임
전시체제인 춘추전국시대엔 진나라가 파촉을 정벌하고 개발할 메리트가 있었는데(바로 옆임) 천하통일을 하고나자 반쯤 관리가 붕 떠버린게 대다수였음 뭣보다 기록상으로도 한나라 시대 이후에도 파촉에서 대량의 식량을 거둬들여 장안or낙양으로 날랐다는 기록이 거의 없음 전시때와 분열기때는 비효율적으로라도 급하니까 나르지만 평화시기때는 비효율의 극치라 안했다는거임
이 글 출처가 어디냐
자료물 올라온것들 찾아보고 쓴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