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8년 1월에 단행된 조선의 시전 부락 번호에 대한 정토에는 당시 정토의 감독자였던 북병사 이일의 지휘 하에 육진 지역의 지휘관들이 대거 동원되고, 그와 함께 육진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군병들이 다수 동원되었다.
대장으로는 북병사 이일이 직접 나섰으며, 좌위의 위장으로 회령부사 변언수가, 우위의 위장으로 온성부사 양대수가 나섰다. 좌위 선봉장으로는 고령진 첨사 유극량이, 우위의 선봉장으로는 조방장 이천이 나섰다. 이들 외에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또는 이 시기의 조선군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익히 이름을 들어 보았을 이들이 대거 기용, 참전했다. 이순신, 원균, 선거이, 황진, 김억추, 서예원등의 인물들이 바로 그들이다.
시전부락 정토에 투입된 지휘관들의 면면을 통해서, 당시 육진 지역에 유망하다고 평가 받던 지휘관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인데, 1583년에 니탕개의 난이라는 번호 세력의 대규모 질서 이반 사태를 겪은 데다가, 명과 조선의 변경지대의 질서가 서서히 진동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던 조선으로서는 육진 지역의 방비에 철두철미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이 때에 전투에 투입된 병력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지난 번에 필자가 작성한 글인 『1588년 시전부락 정토 당시 정토 조선군 지휘관 명단』에서 간략히 다루었듯이, 이 때에 투입된 조선군의 수효는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뉜다.
하나는 소수설인 2,500 명 투입설이며 또 하나는 다수설인 2,700 명 설이다.
2,500명 설은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을 출전으로 한다.
북병사(이일)의 계본에, 경원의 번호 중 녹둔도에서 적과 작당한 시전 부락에 대해 이달 14일에 본도의 토병 및 경장사 2,500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눠 들여보내, 이경에 행군하고 삼경에 강을 건넜다가, 15일 평명에 그들의 궁려(穹慮) 2백여 좌(坐)를 분탕하고 수급 3백 80급, 말 9필, 소 20수를 참획하고 전군이 무사히 돌아왔다고 하였다.
-『선조실록』 22권, 선조 21년 1월 27일
선조실록의 본 기사에서 드러나듯, 기사에는 북병사의 계본에 2,500여명의 군대가 투입되었다고 기술되었다고 한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투입 조선군의 수효를 2,500명으로 보는 입장이 존재한다.
한편 다수설인 2,700명설은 병서인 『제승방략』에 기술된 지역 고사를 기초로 한다. 관련된 기술만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전략)이듬해 무자년 1월에 길주진 이북 온성진 이남에 주둔하는 1등 토병, 2등 토병과 행영의 군사, 경장사 및 경흥진의 관할하에 있는 4보(서수라보, 무이보, 조산보, 아오지보)의 군마등 모두 2,700명을 징발하고, 회령부사 변언수를 좌위장으로 삼고 온성부사 양대수를 우위장으로 삼아 (중략)
-『제승방략』 권1 무이보 고사
이상은 시전 부락 정토에 관련한 제승방략의 기술이다. 이 기술을 참조하자면 북병사 이일은 총 2,700명의 군병을 조발하여 시전부락의 정토를 준비했다.
2,500명설과 2,700명설 중 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은 무엇인가? 필자는 2,700명이 실제에 가깝다고 판단한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조선의 실제 총동원 병력 규모는 2,700명이 사실일 것이라 본다.
제승방략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이일에 의해 작성된 병서인데, 그는 시전 부락 정토의 최고 책임자이기도 했다. 그에 의해 기술된 동원 군병 수효가 2,700명이라면 그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로서는 동원 군세를 과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제승방략의 편찬 시기 자체가 시전 부락 정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임을 생각해 보자면 제승방략의 기술이 찬자의 기억의 왜곡으로 인하여 변질되었을 가능성 역시도 거의 없다.
그렇다면 실록에 기술된 2,500명과 제승방략에 기술된 2,700명간의 괴리는 어째서 발생하는 것일까?
실록에 기술된 2,500명의 동원 군병 기록 역시도 결국 북병사 이일의 계본을 1차 출전으로 하고 있다. 즉, 2,700명설의 출처 뿐 아니라 2,500명설의 출처 역시 결국 이일이다. 애초에 이일을 출처로 하는 기록이 2개가 존재하며, 두 기록이 상충되는 탓에 이렇게 시전 부락 정토 당시에 투입된 군병 규모에 대한 이견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일이 단순히 실수를 한 것인가?
필자는 이에 대해 실록에 기술된 2,500명의 동원병력은 군적상에 기룩된 정규 병사들만을 지칭하는 것이며, 2,700명의 동원병력은 '잡류', 즉 정원외 인원을 포함한 병력이라고 추정한다. 요컨대 2,500명은 정규전력, 2,700명은 실제 총동원 병력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잡류, 또는 잡수종인들은 군병 정원에는 포함이 되지 않으나 전투나 원정등에 동원되는 정원외 인력을 총칭한다. 각 장령들의 휘하에 위치하는 정원외 비전투 인원에는 자신의 자식들이나 노복 역시 가산될 수 있다.
시전 부락 정토와 같이 정토 유형에 속하는 원정인 건퇴 정토 당시에도 이런 인원들이 다수 동원되었음이 기록으로도 확인된다.1이런 점을 보건대 시전 부락 정토에도 역시 이런 정원외 인원이 다수 종군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실록에 기술된 2,500명의 동원병력은 정규 전투전력만을 지칭하는 것이며, 제승방략에 기술된 2,700명은 정원외 비전투 전력까지 도합한 수치일 가능성이 존재한다.
무엇이 되었던, 2,500~2,700명의 군 동원은 여진 번호나 타 여진 세력에 대한 조선의 정토에 있어서 최대규모에 가까운 병력 동원이었다. 예컨대 두만강 유역의 강력한 여진 세력이었던 로툰에 대한 정토나, 조선과 접한 번호들을 월등히 상회하는 울라 군주국을 상대로 한 정토에 동원된 병력들은 모두 3천선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당시 조선이 시전 부락의 힘을 강하게 보고, 녹둔도 전투의 주동 세력중 하나인 그들을 확실하게 응징하기 위해, 그리고 그로서 조선의 영향력과 강성함을 선전키 위해 대규모 군대를 동원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선조실록』 권189 선조 38년 7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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