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자, 상인, …… 등 ……의 권능을 소원하는 많은 이들이 분명히 ……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용인들 중에는 영웅이나 위인은커녕 이름이 좀 알려진 ……조차 없다.
용인의 권능은 타인을 지배하거나 타인이 소유한 정보를 얻어내는 데 ……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에게 지배당할 위험에 노출되게 만드는 것이 용인의 능력이다.
……들은, 둔감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는 이 사실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눈마새 스포 주의
끝에 세 줄 요약 있습니다.
눈마새 세계 속에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카시다 암각문은 각별합니다.
소설의 대주제에 직접 맞닿아 있을뿐만 아니라 그 형태가 마치 누군가 문제를 내는 것처럼 곳곳이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해결하면, 이 빈칸들을 채워 넣을 수만 있다면 이야기 속의 모든 의문점들이 해소되고 마침내 생의 심오한 의문을 풀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물론 제가 여기서 카시다 암각문의 해답을 찾아내었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나름의 해석을 가지고는 있고, 그것을 글로 적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 생각해서 여기에 잡설을 남기고자 합니다.
배경
먼저 기초적인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카시다 암각문은 이름 그대로 카시다의 외곽 지역에 놓인, 글이 새겨진 바위 덩어리입니다.
글의 내용은 용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작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자가 선민종족들 중 하나였음은 거의 확실합니다.
그러니 카시다 암각문은 어떤 '사람'이 용인을 관찰하여 얻은 지식과 그 지식들을 고찰하여 내린 결론을 적어 놓은 글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카시다 암각문은 오랜 세월 풍화하여 많은 글자들이 지워졌습니다만
사실 대부분의 빈칸들은 문맥을 통해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지배자, 상인, [군웅] 등 [용인]의 권능을 소원하는 많은 이들이 분명히 [주지]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용인들 중에는 영웅이나 위인은커녕 이름이 좀 알려진 [사람]조차 없다.
용인의 권능은 타인을 지배하거나 타인이 소유한 정보를 얻어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타인]에게 지배당할 위험에 노출되게 만드는 것이 용인의 능력이다.
[사람]들은, 둔감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도구]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저 마지막 빈칸입니다.
그 전까지의 문장들은 계속 용인에 대해 설명하다가 마지막에 와서 갑자기 사람들의 마음이 무엇으로 가득하다는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문맥으로는 절대로 알아낼 수가 없지요. 다른 방식으로 접근을 해야합니다.
카시다 암각문의 변화 과정
이번에는 저 마지막 빈칸의 변천사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마지막 빈칸은 그 중요성에 걸맞게 세계관 내에서 여러번 변화를 맞았습니다.
가장 처음에는 당연히 전체 글을 작성한 어떤 사람에 의해서 무슨 단어가 적혀 있었을 겁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쳐서 바람과 비와 햇빛 등으로 풍화 된 끝에 단어가 지워지고 빈칸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2차 대확장 전쟁이 끝나갈 즈음 카시다에 살고 있던 어떤 소년에 의해 '미움'이라는 단어가 새겨지게 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미움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카시다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소년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이름을 불러주던 부모와 유치한 별명을 불러주던 친구들을 모두 잃고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소년에게 사람들의 마음에 무엇이 가득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좋은 소리는 못 듣겠지요.
조악하게 새겨진 미움이라는 단어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유지되다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에필로그의 끝에 와서야 어떤 여행자에 의해 지워지고 다시 빈칸으로 남게 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카시다 암각문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의 마지막 문장이 바로 카시다 암각문의 마지막 문장이니까요.
게다가 바로 전 장면에서는 사모 페이와 라수 규리하가 사람이 도달해야할 완전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카시다 암각문에 담겨있는 의미를 알아낼 수 있다면 라수 규리하가 말했던 변화하는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걸까요.
인간, 도깨비, 레콘, 나가, 서로 다른 네 선민종족들은 어째서 꼭 '동시에' 완전성에 도달해야 할까요.
사랑에 대해서
이 별 볼 일 없는 글을 준비하면서 저는 다른 사람들이 카시다 암각문에 대해 해석한 글들을 찾아봤습니다.
저와 거의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기발한 해석도 몇 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카시다 암각문의 마지막 빈칸에 '사랑'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케이건 드라카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케이건은 심장탑 위에서 대호왕에게 '사랑하기 위해 사는 삶'을 원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타인에게 사랑을 주기를 원했고 또 사랑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희망에 대한 나가의 보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나가들은 그의 조국을 멸망시켰으며 그의 아내를 찢어 죽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는 어떤 선택지가 남아있을까요.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남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언제나 복수를 원합니다.
사랑에는 사랑을, 미움에는 미움을.
케이건도 그렇게 했습니다. 나가들에게 증오를 보답으로 받은 이후로 케이건은 똑같이 나가들을 증오하며 사냥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힘듭니다.
우슬라 사르마크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충고라고.
오레놀 대덕도 하늘치 위에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소망을 품을 수야 있지만, 그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상대방도 같은 소망을 품어야만 가능하다고.
이를 바탕으로 카시다 암각문을 생각해보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저는 지금 카시다 암각문의 마지막 빈칸을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에서 실수가 어쩌니 했습니다만 그거야 그저 의도와 결과가 불일치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지,
그 사람들이 헛된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비관적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며 사는 삶을 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용인 륜 페이가 하텐그라쥬를 향해 죽음의 행진을 떠나고 사모 페이가 필사의 추격으로 마침내 하텐그라쥬 근방에서 따라잡았을 때,
륜은 좌절에 빠져 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 장면에 대한 묘사와 그 안의 대사들은 정말 아름답고 다양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제가 눈마새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들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륜은 용인의 감각으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생각들을 느끼게 됩니다.
그 중에서 비형은 사모와 륜이 다시 만났다는 사실에 무조건적으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적절한 감정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륜과 사모가 재회하게 된 데에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슬픔과 불안이 녹아들어 있었으니까요.
비형은 타인의 마음속에서 사랑이나 재미 같은 감정들만 찾기를 갈구하는 도깨비적 특성을 발현시켰을 겁니다. 그럼으로써 륜의 일부를 부정했던 겁니다.
하지만 그런 부정에도 불구하고 륜은 비형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위의 경우처럼 사랑만을 갈구하는 사람들은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는 있겠지만요.
"다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작가의 다른 작품인 폴라립스 랩소디에서 나온 대사입니다.
우리들은 살면서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말을 흔하게 접하고 가끔은 직접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진짜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힘듭니다.
나를 무시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나를 증오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인샤 대사원에서 비형은 케이건이 나가를 사냥하는 행위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냥해서 잡아먹는 일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용납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독자로서 케이건의 과거를 모두 알게 된 후에 이 대사를 다시 살펴보면 마음 속에서 뭔지 모를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네가 케이건에 대해 도대체 뭘 아냐고 묻고 싶어집니다. 오만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는 안되겠지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힘들지만, 그렇다고해서 그걸 실천하는 사람을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관습적인 이유에서든 종교적인 이유에서든 우리는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선망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미움에 대해서
물론 선망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이성과 덕에 해당하는 부분까지이고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케이건의 행동에 공감을, 최소한 이해를 하게 됩니다.
눈마새 세계관 안에서 나가들이 벌이는 온갖 개짓거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키타타 자보로의 유령이 강림해서 나가살육신을 강림시키고 싶어집니다.
자타공인 그 최대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케이건이 자신이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 앞에서 사랑 타령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케이건의 증오심은 또 다른 증오심을 낳게 됩니다.
케이건에 의해 세페린이 두 번째로 죽었을 때, 갈로텍은 나가살육자를 찾아내 복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켰죠.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누구나 다 아는 케케묵은 이야기지만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가 가장 중요한 법입니다.
증오에 사로잡힌 두 인물들은 증오를 사방으로 퍼뜨렸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증오의 연쇄를 끊어낼 수 있을까요.
수많은 현인들이 되뇌었듯이 원한을 잊고 원수를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사람들의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찰 때까지 내가 먼저 모두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할까요.
그걸 알기 위해서는 륜 페이의 삶을 살펴봐야 합니다.
용인 륜 페이는 물처럼 예리한 자입니다. 물이 가장 날카롭죠.
그는 그 날카로운 감각으로 북부의 눈물을 모두 마시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가의 증오까지 모두 가져가고자 했습니다.
그의 행적은 겉보기에는 케이건이나 갈로텍과 다르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셋 모두 수천, 수만명의 죽음에 직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으니까요.
물론 죽을 필요가 있어서 죽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우리는 항상 사회가 정한 덕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그래서 타인을 바라볼 때도 그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겉보기는 비슷할지언정 세 명의 의도와 동기는 전혀 같지 않았습니다.
케이건과 갈로텍은 오직 복수심에 사로잡힌 삶을 살았습니다. 목적인 삶을 복수의 도구로 바꾼 겁니다.
반면에 륜 페이의 마음 속에 복수심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끊임없이 패배하기를, 그럼으로써 몰락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패배주의나 희생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표현을 배제하고 설명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첫째로, 륜 페이의 마음 속 기저에는 항상 사모 페이가 존재합니다.
륜이 북부의 눈물을 모두 마시겠다고 결정한 것은 사모가 왕으로서 눈물을 마시고 죽게 내버려둘 수 없어서였습니다.
그리고 나가의 증오를 받아내기로 결정한 것은 대호왕에게 겨누어질 나가의 증오를 줄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사모가 하텐그라쥬로 돌아가 행복하기를 원했습니다.
둘째, 륜은 용인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동화합니다.
사모는 륜이 북부군의 증오에 동화하여 또 하나의 나가살육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만,
사실 그는 희생당하는 나가들 한 사람, 한 사람까지 모두 느끼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륜이 자신을 긍정하는 방식은 굉장히 특이합니다.
"당신에게, 그리고 사모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내가 되고 싶어요."
하인샤 대사원에서 륜이 발자국 없는 여신을 부르면서 했던 말입니다.
독자들은 륜이 사모에게 헌신하고 타인에게 동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잊은 채 세상을 위해 희생하는 영웅적인 희생정신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륜은 자신의 존재를 자기 밖에서 찾아내어 긍정했던 겁니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말은 모순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특성들로 말미암아 륜은 세계와 하나가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리미의 모습을 빌려 나가살육신으로 각성하려는 케이건을 일깨울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이제 다시 카시다 암각문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문제의 마지막 빈칸은 한참 동안 미움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가, 작품의 끝에서 어떤 여행자에 의해 다시 빈칸으로 돌아왔습니다.
여행자는 방풍복을 걸치고 있었고 걷는 것에 능숙해보였으며 대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은 케이건 드라카와 갈로텍을 떠올리게 합니다.
책 속에서 여행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행자는 미움에 사로잡혔던 인물들의 총합이고, 그런 그가 카시다 암각문에 새겨져 있던 미움을 지워냈다는 겁니다.
마지막 빈칸은 사람의 가능성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무엇으로 가득하다고 단정짓는 것은 삶을 편리하게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하게 만듭니다.
남자는 / 여자는 이럴 거야,
기성세대는 / 젊은세대는 이럴 거야,
한국 사람은 / 다른 나라 사람은 이럴 거야, 등등.
이런 생각들은 대부분의 경우 제대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중요한 순간에 사람을 배신합니다.
피마새에서 틸러는 정우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그게 누구라도 그 사람을 알면 그 사람을 이해시킬 수 있다고 믿으세요?"
그러자 정우는 믿고 싶다고 말합니다.
정우에게 있어서 아스캄의 남작은 새로운 사람, 새로운 관계였습니다.
그가 권력자이건 아니건,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상관 없이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겁니다.
우리들은 세상을 살면서 나가처럼 차가운 사람, 도깨비처럼 따스한 사람, 레콘처럼 강렬한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전체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고 미래의 모습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가능성을 기대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때,
어쩌면 삶이 더욱 재미있어질지도 모릅니다.
다름을 긍정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은 마지막 빈칸을 빈칸 그대로 남겨두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역시 ……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세 줄 요약
카시다 암각문의 마지막 빈칸은 빈칸 그대로 두는 것이 맞다.
그렇다고해서 사랑이나 미움 등의 단어를 적어 넣는 것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반박시 당신 말이 옳습니다.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글이 올라온 타이밍이 나빠서였을까요? 이란 좋은 글에 댓글 없는게 조금 아이러니하네요. 수도없이 정주행을 했지만 마지막 빈칸에 대해서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이런 해석은 생각해본적 없었기에 정말 흥미롭게 읽었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글이 올라온 타이밍이 나빠서였을까요? 이란 좋은 글에 댓글 없는게 조금 아이러니하네요. 수도없이 정주행을 했지만 마지막 빈칸에 대해서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이런 해석은 생각해본적 없었기에 정말 흥미롭게 읽었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